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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정혼자 - # 05








“정우형!! 효재누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핸드폰을 열자마자 터져나오는 현우의 고함에 깜짝 놀란 정우는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하지만 손 안의 핸드폰에서는 계속 현우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잠시 먹먹해졌던 귀를 문지르고 나서 정우는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댔다.




“야, 조현우, 너 때문에 귀청 떨어질 뻔 했잖아! 왜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는 거야?”




그러나 현우는 계속 흥분한 상태로 소리치고 있었다.




“효재누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니까! 빨리 대답해!”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아무 짓도 안했어.”




혹시라도 밖에 들리지 않을까 정우는 목소리를 낮춰 대꾸했지만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었다. 아니, 효재한테 무슨 짓을 했냐니?




“거짓말 하지마! 형이 아무 짓도 안했는데 효재누나가 왜 울어!”


“뭐? 효재가 울어? 너야말로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건데? 거기 지금 새벽 아니야? 너 자다가 꿈꾸고 깨서 전화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효재누나가 울면서 전화했단 말이야!”




효재가 울면서 전화했다는 말은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소리이긴 했지만 현우가 말하는 폼을 보아하니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효재가 왜 울고 있는지, 울면서 현우에게 전화는 왜 했는지,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는 것임에는 분명했다. 효재가 자신과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고 집에다 거짓말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정말,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정우는 최대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려 애쓰며 물었다.




“소리부터 지르지 말고 천천히 말해봐. 효재가 전화를 했어? 근데 울고 있다고? 그 얘기야? 그런데 내 이야기를 했어, 효재가?”




정우는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지만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현우는 계속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그래! 효재누나가 전화해서 형 이야기 했단 말이야! 울면서!”


“내 이야기를? 내가 뭘 어쨌다고 했는데?”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정우는 재차 물었다. 효재가 일찍 자리를 뜬 게 이상하면 이상했지 자신은 정말 아무리 생각해봐도 효재를 울릴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었다. 효재와 같이 있었던 시간도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우는 다짜고짜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그건 몰라! 형 이름만 꺼내고 누나가 전화 끊었단 말이야! 대체 무슨 짓을 한거냐고! 빨리 대답해, 조정우!”


“뭐, 조정우? 야, 너 형 소리 못붙여?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진짜!”




현우의 마지막 말에 발끈한 정우가 버럭 소리를 치자 현우도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이 받아쳤다.




“나 지금 한국 갈거니까 나 도착하면 죽을 줄 알아, 조정우!”


“이게 진짜? 너 진짜 계속 내 이름 부를래?”




정우는 다시 발끈해 소리쳤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현우에게는 보이지도 않겠지만 정우는 핸드폰을 향해 주먹을 쥐어보였다. 이게 어디서 감히 형보고 이름을 막 불러?

그런데...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현우가 뭔가 중요한 말을 한 것 같았다. 정우는 현우가 한 말을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 초도 지나기 전에 정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대로 방을 뛰어나갔다.




“엄마, 엄마! 현우 한국 온대요!”




*    *   *




되는 대로 옷가지를 쑤셔넣은 짐가방을 들고 현우는 택시를 잡아탔다. 아침 출근길이라 길에는 차들이 가득했지만 시계를 보니 비행기시간에는 넉넉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우에게 전화를 했을 때만 해도 정말로 한국에 가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형이 하는 답답한 말들을 듣고 있으려니 성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화를 끊자마자 항공사에 전화해 몇 시간 후에 떠나는 비행기 표를 산 것이었다. 성수기인지라 비행기표값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비쌌지만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한국에 간다고 이미 말해버린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 갔다와서 다음 학기에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면 되지, 뭐. 비행기표값이 결제된 통장 잔액을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렸지만 현우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감기기가 있는지 컨디션이 영 엉망이라 꿀차를 타먹고 잔 게 바로 어제였다. 그랬다. 어젯밤에 효재에게 국제전화를 했을 때만 해도 효재에게서는 이상한 기색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정우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며 기다리는 중이라던 효재는 우울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척 들떠있는 듯 했다. 그런데 아침 일찍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일어나 확인한 음성메세지 속에서 효재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효재는 통화가 되지 않고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효재에게 전화를 걸어보던 현우는 결국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른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신호음이 몇 번 떨어지자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 굿모닝 현우...벌써 일어났어?”




만난지 한달 쯤 된 여자친구인 제니는 아버지가 한국인, 어머니가 미국인인 혼혈이지만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 카페에서 서빙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현우를 보고 한 눈에 반했다며 데이트 신청을 했던 그녀가 처음 했던 말은, 한국남자에게 반할 줄은 몰랐어, 였다. 어렸을 때는 혼혈인 자신이 싫어서 아버지가 보내고 싶어했던 한글학교도 절대 가지 않았다던가. 그런데 그런 내가 한국인 남자에게 반할 줄은 몰랐다며 제니는 웃었다.




“자고 있는 거 깨웠구나, 미안.”


“댓츠 오케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저기...”




며칠 전부터 제니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로 들떠 있었다. 현우는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별 느낌이 없었지만 제니는 콜로라도로 스키 여행을 가자며 현우를 졸라대고 있었다. 현우도 콜로라도로 스키를 타러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이런 성수기에 콜로라도 행 비행기표값과 숙소값은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이번학기에 매일같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이 통장에 들어있었지만 그래도 이 돈이 있으면 다음 학기에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용돈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며 스키여행도 거절했건만, 그 돈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한국행 비행기표를 사는데 써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




스키여행을 거절한 이후로 제니가 며칠간 의기소침해있었기에 크리스마스에는 제니가 평소에 가고 싶어하던 레스토랑에 가자는 이야기를 해놓아 달래놓고 있었는데, 레스토랑은커녕 아예 뉴욕을 떠나 지구 반대편에 가있게 되다니, 현우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말았다. 뒷골이 땡겨 오기 시작했다. 아이고, 두야. 내가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잠시 현우는 이런저런 변명거리를 생각해봤지만 다른 변변한 변명거리도 떠오르지 않았고,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역시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일을 저지른 것도 자신이고, 그렇다면 책임을 지는 것도 자신이어야만 했다. 현우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 너랑 크리스마스 못 보낼 것 같아. 미안해.”


“뭐?”


“...나 한국에 좀 다녀와야할 것 같아. 지금 공항가는 길이야.”


“뭐라고? 한국? 공항에? 갑자기 왜? 어제까지 아무 이야기 없었잖아?”


“그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할지 생각하며 현우가 말을 마악 떼는데 화가 난 제니의 목소리가 순간 누그러졌다.




“앗...혹시 집에 무슨 일 있는 거야? 안 좋은 일이니? 응?”


“어...그게...”




이걸 집안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 현우는 대답했다. 효재 누나와 형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이게 집안 일이지 다른 게 집안 일이겠는가.




“응. 집에 좀 일이 생겨서...미안해.”


“저런. 무슨 일인데?”




제니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지만 현우는 다녀와서 이야기하겠다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대충 둘러대며 전화통화를 끝냈다.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지만 번호를 보아하니 한국에서 온 전화같았다. 분명 부모님이나 정우형이겠거니 싶어 현우는 핸드폰을 꺼버렸다.





과정이야 어쨌든 한국에 가는 것도 오랫만이고 부모님도 오랜만에 뵐 생각을 하니 분명 기분이 들떠야하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아있는지 현우는 알 수가 없었다. 제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제니에게 속시원히 이야기를 하지 못해서일까.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비행기 트랩에 오르면서도 현우는 계속 생각해보았지만 속시원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이 우울함의 원인을 텅 비어버린 은행계좌로 돌렸다.




에잇, 다음 학기에는 아르바이트 안하고 공부만 하려고 했는데 다 틀어져버렸잖아. 이 모든 게 다...어, 잠깐만...그런데...누구 탓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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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인사드려요...^^;;
한국에 다녀온 이후로 정말 너무 바빴답니다..ㅠ.ㅠ 올 봄에는 계속 이런 바쁨모드로 가겠지만, 그래도 저, 이 글을 잊지 않았어요. 흑흑.

불량스런 연재글이지만 그래도 내치지는 말아주세요. 훌쩍.



댓글 '6'

하늘지기

2007.02.07 15:17:05

바쁨모드..
이거이거 별로 안 좋은데..
그나마 잊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현우의 고함에 정우의 귀청이 어디만큼 떨어졌는지 무지하게 궁금하던 차였는데..ㅎㅎ

그나저나 수업엘 가셨는지 기네스를 보셨는지..
국제소포로 온 밥숟가락으로 식사는 잘 하고 계신지..
고장난 체중계는 어디로 내다 버리셨는지..(아님 몸을 내버리셨는지..^^;;;;;)

so

2007.02.07 16:47:35

잊은 줄 알았삼.;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ㅎㅎ

아침햇살

2007.02.08 11:45:14

하늘지기님/ 기네스는 내일인데..전 수업을 선택했고요 ㅠ.ㅠ 밥은 지나치게 잘 먹고 있어서 체중계는..점점더 중력에 강하게 반응하고 있답니다 ㅠ.ㅠ

so님/ 어떻게 잊겠어요~ 매일매일 시달리고 있는데요 ㅋㅋ 반겨주셔서 감사해요 *^^*

Junk

2007.02.09 17:53:08

인물들이 다 너무 귀엽슴다~(헤벌쭉)

판당고

2007.02.11 01:41:49

순간의 결정 무서운건데 ㅎㅎ 떠나간 버스 다시 돌아오지 않고 이미 하늘과 만난 비행기 내려오려면 시간 꽤걸리는데 ㅎㅎ

아침햇살

2007.02.12 11:25:50

Junk님/ 실제로도..귀엽습니다;; (앗, 이 무슨 위험한 발언?? ㅋㅋ)

판당고님/ 판당고님 댓글에 저 지금...완전 배꼽잡고 웃고 있어요 푸하하하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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