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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정혼자 - # 03








“....어, 어....누구?”




한참동안 어어 소리만 내다가 물은 말에 정우는 대답 대신 꼭 맞잡은 손을 들어보였다.




“늦어서 정말 미안. 이야기가 좀 길다. 앉아서 얘기해도 되지? 정말 미안, 효재야.”


“어, 어. 앉아.”




얼떨결에 효재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조금전까지 혼자 앉아 정우를 기다리던 소파에 다시 앉았다. 분명 푹신한 소파인데 엉거주춤 앉은 탓인지 자리가 영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입고있던 코트를 벗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정우의 손이 새빨갛게 얼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얗고 고운, 작고 통통한 여자의 손도.




여자는 그때까지도 코트를 벗고 있었다. 시린 손을 비비며 잠깐 창밖을 내다보던 정우는 코트 단추에 올이 걸린 목도리와 씨름을 하는 여자를 보자마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 걸렸잖아. 뒤로 돌아서봐.”




정우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빙그르르 돌려 세우고는 목도리를 벗겨냈다. 그리고 효재는 멍한 기분으로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강효재.”




정우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돌아와보니 정우가 몸을 앞으로 길게 내밀고 효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눈뜨고 졸아?”


“어어, 미안, 미안.”




분명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생각이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으니 정말 정우 말대로 눈을 뜨고 졸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차 때문인가? 조금 전까지는 안졸렸는데...




졸리지도 않은 눈을 비비며 효재는 다시 여자 쪽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여자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효재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리고는 조그맣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뵈어요.”




얼떨결에 - 오늘은 참 얼떨결과 어리버리의 범벅이기도 하지! - 인사를 하고 효재는 정우를 쳐다봤다. 뭔가 조금 낯선 느낌.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씀. 그러자 정우는 그런 효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싱가포르에서 왔어. 이름은 그레이스 라이. 우리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 배워.”


“싱가포르?”




저도 모르게 되물은 효재의 말에 대답한 것은 그레이스였다. 조금은 어설프지만 또렷한 한국어였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꼭 만나고 싶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    *    *






그레이스가 뜨거운 코코아를 호호 불어 마시는 동안 정우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계속 그레이스만을 쳐다보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어에 서툰 그레이스를 배려해서인지 정우는 영어로 장난을 걸고 있었고 처음엔 효재를 의식한 듯 그의 장난을 밀어내던 그레이스도 이젠 어느 정도 서먹함이 가셨는지 웃으며 정우의 장난을 받아주고 있었다.




입도 대지 않은 커피잔을 들었다 내려놓았다를 반복하며 효재는 그런 그레이스를 몰래 훔쳐보았다. 키는 155cm정도 될까, 약간 통통한 편인 그녀는 한국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효재의 기억에 싱가포르 출신이라고 들은 것 같은 학교 조교는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색인데 그레이스는 오히려 효재보다도 흰 살결을 가지고 있었다. 꼬리가 약간 처진 커다란 눈에 진 쌍커풀이 순한 인상을 만들고 있었다.




정우의 장난을 주고받던 그레이스가 효재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만 하라며 정우를 밀어냈다. 그러자 효재는 마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우가 그레이스를 만난 건 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외국학생들을 도와주기 위한 자원봉사 모임에서였다고 했다. 처음엔 순전히 봉사를 하러 간 것이었지만 그곳에서 그레이스를 처음 본 순간 그대로 한 눈에 반했다니...




그때 그레이스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레이스의 뒷모습이 총총하니 멀어지자 정우는 장난꾸러기같은 웃음을 지으며 효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레이스 어때? 착하지?”


“어어...”




효재는 뜨거운 커피잔을 들었지만 이내 다시 내려놓고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여지껏 말 안했어? 몰랐잖아, 여자친구 생긴 줄.”


“아, 그게 말이야...”




효재의 말에 정우는 약간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처음에 한눈에 반해서 사귀자고 따라다녔는데 단번에 no라고 하더라구. 그래도 굴하지 않고 자원봉사 모임도 계속 나가고 계속 그레이스가 있는 곳마다 나타났거든. 그러다가 그저께에 어학당 유학생들만 용평으로 MT갔었는데 떠나기 직전에 내가 다시 한번 고백했거든. 그래서 터미널 갔다왔어, 조금 전에.”


“터미널?”


“응. 그레이스 오는 거 보려구.”


“왜?”


“아, 그게...”




정우는 약간 쑥쓰러운 듯 머리를 다시 긁적였다.




“MT떠나기 직전에 내가 목도리 세트로 산 거 하나 주면서, yes면 돌아오는 길에 이 목도리 하고 오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다녀와서 대답을 준다고 해서 아까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행복함에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진 정우를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어이가 없기도 해 효재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얼씨구. 영화 찍냐? 그랬다가 버스에서 내리는 그레이스가 까만 목도리하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는데?”




그러자 정우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보시오, 강효재양. 나도 예감이란 게 있다오. 너도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알게 될 거야. 이 사람이다, 하는 그런 거 말이야. 하하.”


“...운명의 상대 좋아하시네.”




효재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정우는 듣지 못한 듯 했다.




“그런데 용평에 눈이 왔대. 그래서 버스가 늦게 도착한 바람에 나도 늦은 거야. 아, 정말 미안. 늦는다고 너한테 전화할 틈이 없었어.”


“됐어, 괜찮아.”




잠시 뚱하니 소파에 몸을 묻고 있다 효재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디가 그렇게 좋디?”




그러자 목도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정우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너도 알잖아, 내 이상형.”




네 이상형이 뭐냐고 물으려던 효재의 머리 속에 갑자기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상형? 설마, 그게 농담이 아니었단 말이야? 하지만 효재가 채 말을 떼기도 전에 정우가 먼저 말했다.




“하하, 생각난거야? 아무리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녔어도 난 내 이상형이 이렇게 완벽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줄 줄은 정말 몰랐어.”




그때 그레이스가 다시 돌아와 소파에 앉았고 정우는 효재에게 눈을 찡긋해보였다. 뭐라 말을 꺼내려다 효재는 다시금 뒷목이 뻣뻣해지는 느낌에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작년 이맘때쯤이던가, 정우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조정우, 네 동생 여자친구가 열 번 바뀔동안 넌 어째 여자친구 하나 없냐?’


‘강효재. 지금 남 말 할 때가 아닌데?’


‘아니야. 내가 봤을 땐 너한테 더 문제가 있어. 이래봬도 난 4년동안은 솔로가 아니었다구. 조정우, 솔직히 말해봐. 너 혹시 성적 취향이...?’


‘야야, 그런 소리 하지마.’


‘왜? 남자 좋아하면 좀 어때서? 친구인 내가 이해해줘야지 안그러면 누가 이해해주겠냐. 솔직히 털어놔봐. 이 누님이 고민상담해줄게.’


‘이게 점점? 야, 나도 엄연히 이상형이 있는 사람이라구. 물론 여자.’


‘정말? 너 그런 이야기 한번도 안했잖아.’


‘그럼 묻지도 않은 사람한테 내가 먼저 내 이상형은 어떤 여자입니다, 하고 떠벌리고 다니리? 쯧쯧.’


‘오호라. 정말 있나보네. 그런데 아직 못만난 거야? 원래 이상형은 만나기 어렵대. 이상형이랑 반대되는 사람이랑 결혼한다던데.’


‘저주를 해라, 아주.’


‘왜 이게 저주야. 그러지말고 좀 괜찮은 사람이다 싶으면 한번 대쉬해보고 그래봐. 이상형이라는 게 외모랑 관련된 거잖아. 그러니까 너 그거 알아야 된다. 외모는 잠깐 뿐이라는 거.’


‘내 이상형은 외모하고 별로 상관없어.’


‘그래? 그럼 뭔데? 착하고 이해심많고 뭐 그런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어라, 이거 수상한데? 야, 왜 얼굴이 붉어지냐? 혹시 너....’


‘강효재!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휴. 내가 차라리 말을 하고 말지.’


‘하하. 그러니까 말해봐. 뭔데?’


‘...듣고 웃지 않기 약속해.’


‘안웃어. 뭔데?’


‘음...반사신경 좋은 여자.’


‘뭐? 반사신경? 푸하하하하...’


‘야, 강효재! 내가 웃지 말랬잖아!’


‘안웃으려고 했는데 너무 웃겨서 말이야...푸하하하... 반사신경 좋은 여자? 푸하하하.’


‘....웃지 마, 강효재! 에이, 역시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냐아냐. 그런데 생각해보니 왠지 조정우다워. 누가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 아니랄까봐서. 반사신경 좋은 여자 만나길 진심으로 바래!’


‘너 지금 놀리는 거지?’


‘아니야, 아니라니까? 야아, 조정우! 쿠션 던지지 마! 스탠드 깨지겠어, 푸하하하...아이고, 배야.’






*     *     *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정우는 그레이스의 긴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뺨에 약간 홍조가 돈 그레이스는 효재나 정우와 동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어려 보였다.




‘정우야, 조금 있으면 한국 나가잖아. 뉴욕 미장원 너무 비싸고 맘에 안드는데 이번에 한국 나가면 머리 자르고 올까? 손질하기도 편하게.’


‘그러던지. 근데 난 긴머리가 좋던데.’


‘칫. 그래. 너도 한국남자다 이거지. 흥.’


‘아니, 꼭 그런게 아니라. 그냥 난 그렇다구.’


‘한국생활 반 년만에 전형적인 한국남자가 되다니. 조정우도 별 수 없네.’


‘하하.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 효재야. 나 나가야겠다.’


‘어디 가는데? 오늘 수업있어?’


‘아니, 오늘 어학당 자원봉사 가는 날이야.’


‘그래, 그럼 잘 다녀오고 또 통화하자.’


‘그래, 너도 잘 자구. 조만간 한국에서 보자! 너 출발하기 전에 내가 전화할게!’




열흘 전 정우와 전화통화로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며 효재는 애꿎은 머리카락만 손가락에 감고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놈의 미장원은 다듬어만 달랬더니 왜이렇게 짧게 쳐버린 거야. 신경질나게.




“야, 조정우.”


“응?”


“그런데 네 이상형인줄 어떻게 알아? 같이 운동해봤어? 어학당에서 만났다면서.”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정우는 잠시 효재를 쳐다봤지만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레이스 처음 봤을 때가 어학당 체육대회날이었거든. 그런데 얘가 배드민턴하고 탁구를 어찌나 잘하던지. 그레이스, 생각나? 너 배드민턴하고 탁구 1등 했잖아.”


“아, 응.”




그레이스가 수줍게 웃자 정우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 못살겠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얘가 키는 작아도 반사신경이 장난이 아니더라구. 알고보니 싱가포르에서 배드민턴 청소년 대표였었대. 싱가포르가 배드민턴 강국 아니냐, 배드민턴 강국.”


“...그건 인도네시아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효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화장실가게?”


“아니.”


“그럼? 어디가?”




코트를 입으며 효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정우와 그레이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으면 첫 데이트인데 방해꾼은 이만 사라져줘야지? 나도 그 정도 눈치코치는 있다구요.”


“어, 효재야. 그런 게 아니고...”


“아니긴. 됐어. 괜찮아. 데이트 재미있게 해. 그리고...”




효재는 웃으며 그레이스에게 눈을 찡긋해보였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다음에 또 만나요.”








*     *    *






카페를 나서니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는지 싸리눈이 흩뿌리고 있었다. 핸드백에서 장갑을 꺼내려다 효재는 핸드폰을 꺼냈다. 꾹꾹 꾹꾹. 긴 번호를 열심히 누르고나자 규칙적인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효재는 그 신호음의 리듬에 보폭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아주 씩씩하게 큰 보폭으로.




하지만 조금은 굵어진 진눈깨비가 어깨 위에 쌓이도록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것은 신호음 뿐이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음성 메시지를 남기라는 목소리가 끝나마자 효재는 핸드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야! 조현우! 대체 전화 안받고 뭐하는 거야! 꿀차 먹고 자는 거야? 자다가라도 내 전화는 받아야지! 이렇게 빅 뉴스가 있는데 어떻게 넌 잠을 자고 있을 수가 있냐? 너네 형이 오늘...오늘 말이야. 너네 형이...”




그렇지만 효재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서, 나머지 말은 웅얼웅얼하며 효재는 핸드폰을 다시 닫아버렸다.




그리고 효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큰 보폭으로, 팔도 크게 휘저으며. 씩씩하게 씩씩하게.





 



댓글 '7'

서지나

2006.12.11 15:38:21

나도 그레이스 처럼 귀엽고 장난걸고 싶고 그런여자 였으면 좋겠어요.
왠지 그런 생각.^^

하늘지기

2006.12.11 16:09:18

오~
효재의 저 맘을 어떤 말로 표현하리오..
나까지 싱숭생숭해지네..
그러고 보믄..
사람들 맘 참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수룡

2006.12.11 17:53:11

남주는 현우로군용; 힘내라, 효재야~*

연향비

2006.12.11 22:58:42

효재의 맘이 싱숭하구나..;

현우가 있잖니 효재야~

아침햇살

2006.12.12 01:21:42

서지나님/ 저도 그런 여자이고 싶어요...;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불끈)

하늘지기님/ 다키운 아들 장가보내는 기분이랄지요;;

수룡님/ 크하하하...이건 모두 박태환 때문???

연향비님/ "현우가 있잖니~"라는 말씀 전할게요 ㅎㅎ 효재야! 잘 들어라!

꼬맹이

2006.12.12 03:16:09

저도 현우에게 한표...현우가 더 귀여울듯합니다. ^^

아침햇살

2006.12.12 15:07:00

꼬맹이님/ 그런가요? ^^; 헤헷....(현우야,네 인기가 정우를 능가하는 것 같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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