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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포르테 - # 6
‘나, 너 좋아해.’
‘뭐? 야, 박아름. 지금 무슨 소리 하는...’
‘이현재. 나 너 좋아한다구.’
정확히 다섯 시간 전의 상황은 다섯 시간째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좋아한다구? 언제부터?’
멍해진 기분에, 저도 모르게 물은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왠지 바보같은 말이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냐니? 그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여자애한테 처음 할 말인가?
‘고등학교때부터.’
그런 바보같은 질문에 아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런 걸 보면 적어도 그런 질문을 받은 당사자에겐 바보같이 들리진 않은 모양이다.
‘꼭 지금 대답해주진 않아도 돼.’
뭘 대답해준단 말인가?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말 속에 ‘나랑 사귈래?’라는 뜻이 숨어있는 걸까?
고등학교 시절, 삼 년 내내 같은 반. 게다가 몇 번인가는 짝을 하기도 했던 아름이 쭉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니, 아름의 고백을 듣는 순간 정말 머리 속이 멍해졌다. 새침하기 이를 데 없는 박아름, 이렇게 뒷통수를 칠 줄이야.
“으아, 머리아파.”
베개에 파묻은 머리카락을 쥐어뜯다 현재는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냉수라도 마시고 속을 차려야할 것 같았다. 좁은 방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피아노를 비켜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문득 피아노 위에 있는 악보가 눈에 들어왔다. 미요의 스카라무슈.
그 순간 차가운 물 한잔을 들이켜야지만 좀 가라앉을 것 같던 복잡한 머리가 일순간 정리되었다. 온갖 상상이 휘젓던 머리 속에 남은 것은 오로지 피아노 선율, 희의 손가락 끝에서 만들어지던 그 선율 뿐이었다.
* * *
꽝!!!
분명 귓가에는 주먹으로 내리친 피아노 건반이 만들어낸 듣기싫은 불협화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피아노 건반 바로 위에서 멈춘, 꽉 쥔 주먹이었다. 왜 이 손 끝에서는 머리 속에 떠다니는 그 소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건지. 건반을 내리치려던 주먹이 몇 번이나 들려졌지만 희고 검은 피아노 건반 바로 위에서 멈췄다.
두 주먹을 꽉 쥔 채 고르게 배열된 피아노 건반들을 노려보다 현재는 벌떡 일어섰다. 피아노 위에 펼쳐놨던 악보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현재는 방을 나갔다.
“연습 끝났니? 토마토 갈아줄까?”
“괜찮아요!”
마루에서 퀼트를 하고 있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등 뒤로 넘겨버리고 현재는 욕실문을 닫았다. 차가운 물을 무작정 끼얹기에는 아직 이른 계절이었지만 현재는 무작정 차가운 물을 틀었다. 이렇게 머리가 아픈 것은, 오로지 박아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 *
“내일이 벌써 목요일이라... 한 주의 반이 지나갔군.”
잠옷으로 갈아입던 기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희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좋아?”
“직장인치고 주말 안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냐.”
잠옷 단추를 잠그던 기영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넌 싫어, 주말? 넌 금요일에는 학교도 안가잖아. 남들보다 주말도 길면서. 목요일날 마지막 레슨이 몇 시야?”
기영의 물음에 희는 잠깐 생각했다. 목요일 11시. 현재의 듀오 레슨.
“11시.”
“그럼 몇 시에 끝나는데? 12시?”
“어.”
“팔자 참 좋구먼, 김 희 교수님. 목요일 정오부터 주말이라니.”
기영은 작게 웃더니 희 쪽으로 다가왔다.
“이거.”
그가 희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은 작은 상자였다.
“이게 뭐야?”
“오늘 결혼기념일이잖아.”
기영의 대답에 희는 고개를 돌려 침대 옆 협탁에 있는 탁상 달력을 보았다. 아, 맞다. 그랬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검은 비로드천 위에서 진주 목걸이가 얌전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난 아무 것도 준비 못했는데. 미안.”
“우리 사이에 무슨 기브 앤 테이크도 아니고.”
기영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일 입을 셔츠와 넥타이를 고르기 위해 붙박이장 문을 열자 잠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희는 목걸이 상자를 닫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침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조도 낮은 불빛에 책을 읽어서 그런지 눈이 피곤했다.
“안 덥냐? 벌써 4월 말이다.”
“난 좋아.”
늘 반복되는 질문과 대답. 내일 출근 준비를 마쳤는지 기영이 침대 속으로 들어왔다.
“자는 거야? 그래도 명색이,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그럼?”
희의 대답에 기영은 어이구, 하고 과장되게 웃으며 희의 가슴께까지 올라와있던 이불을 들췄다.
“결혼기념일 기분 좀 내자구. 우리 이제 겨우 햇수로 오 년째 접어드는데 아직은 이런 기분 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그런 소리 하니까 갑자기 늙어버린 것 같잖아.”
“그래서, 기분 내기 싫어?”
기영은 웃음이 반쯤 섞인 짖궂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희는 대답대신 자신의 속옷 속으로 들어오는 기영의 손목을 잡았다. 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희는 대꾸했다.
“기분은 기분이고, 일단 피임하고 와.”
* * *
보통 때와는 달리 기영은 꽤 긴 애무로 희의 몸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탐하고 있었다. 평소 기영의 섹스 패턴은 늘 같았다. 키스, 희의 가슴을 위주로 한 짧은 애무, 삽입, 그리고 절정.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직 그는 희의 몸 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자 희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애써 웃으며 말은 했지만 기영이 온몸의 신경을 한껏 자극하고 있는 바람에 자칫하다가는 벌써부터 오르가즘에 올라버릴 것만 같았다.
“첫날 밤 기분내자더니, 정말 첫날 밤 재연하는 거야?”
“야, 그런 건 좀 잊어버려라. 그리고 그건 순전히 내 탓만은 아니라구.”
말을 마침과 동시에 기영이 희의 몸을 가르며 들어왔다. 희도 그를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지나칠 만큼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희의 등이 뒤로 휘었다. 지나치게 예민해져있었던 탓일까, 평소보다 강하게 순간적으로 온몸을 관통하는 찌릿한 느낌에 아주 잠깐 정신을 놓았던 희의 귓가에 기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날은, 나도 서툴렀지만,”
기영이 참았던 숨을 훅, 하고 몰아쉬며 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후...너도 비협조적이었잖아. 제대로 열어주지도 않고서.”
“하하.”
잠깐 아득해졌던 정신을 다시 잡고서 희는 몸을 밀어올렸다. 기영이 짧은 신음을 흘렸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긴, 우리 둘 다 뭘 알았겠냐, 그땐.”
먼저 숨이 가빠진 건 기영이었다.
“너나, 나나, 처음이었잖아, 안 그래?”
하지만 먼저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한 건 희였다.
“네가 하도 자신, 자신있게 시작하는 바람에, 난, 난 너도 처음인 줄은 몰랐어.”
그 말에 기영이 풋, 하고 웃었다. 뜨거운 숨이 귓가에 불어오자 희는 온 몸을 떨었다.
“그래서, 기분, 나빴....어? 넌, 처음인데, 난, 아닌 것 같아서?”
“아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조금의 거짓도 없이 대답하고 희는 눈을 감았다. 희의 대답에 기영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역시 잠시 정신을 추스르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던 기영이 다시 말했다.
“어쨌든, 고맙다. 나랑 결혼해줘서.”
“천만에.”
대화는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기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희의 몸은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절정에 오를 때까지 두 사람이 내뱉은 말이라고는 아무 의미없는 신음소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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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정팅이었습니다 *^^*
정팅에서 주신 여러의견, 소중히 간직...하겠스므니다 ㅎㅎㅎ
갈팡질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