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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포르테 - # 5










희는 시계를 보았다. 10시 10분. 다음 렛슨 시간까지는 아직도 50분이나 남아있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던 희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무료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몇 번을 일어났다 앉았다 반복하던 희는 이윽고 피아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학생이 앉아있던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희는 건반 뚜껑을 열고 음 하나를 누르려고 했지만 이내 건반에서 손을 떼고 피아노 의자의 높낮이 조절 나사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한 손 안에 꽉 찰 만큼 커다란 검은 나사. 엉거주춤 앉아 의자 양 쪽의 나사를 천천히 돌리자 의자의 높이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웬만큼 높아졌다고 생각하자 희는 다시 의자 위에 바로 앉았다. 그리고 스케일을 치기 시작했다. 다장조부터 시작해서 임시표가 하나씩 늘어가는 사장조, 라장조...




피아노 건반의 가장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현란하게 훑고 지나가던 희는 문득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가장 오른쪽 페달을 밟아보았다. 아무 건반도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밟는 페달은 그랜드 피아노 내부에서 현을 누르고 있는 댐퍼들이 일시에 들어올려지는, 둔탁하면서도 작게 울리는 소리를 냈다.




몇 번 그렇게 페달을 밟아보다가 희는 다시 피아노 의자의 나사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곧 의자는 다시 원래의 높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희는 다시 스케일을 치기 시작했다. 백 개에서 조금 모자라는 수의 하얗고 검은 건반들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양, 빠르고도 현란한 터치로 희는 모든 조의 여러 가지 스케일을 쳐나가기 시작했다.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가 몸을 풀듯이,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일이십 분 정도 스케일을 치는 것은 손가락도 풀리고 마음도 안정되는 그런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희에게 이건 오랜 습관이었다.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는, 그런 습관.








*    *    *








저만치에 음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숨이 턱에 닿도록 언덕을 뛰어올라오던 현재는 더 이상 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젠 반팔 옷을 입어도 되겠다고 생각할 만큼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아니, 뜨거운 날이었다.




- 아직 4월 중순인데 아침부터 왜 이렇게 찌는 거야?




숨을 고르며 현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목요일 10시 13분. 화성학 수업이 9시이긴 하지만 늘 일찍 끝내는 수업이니 지금 들어간다 해도 한 20분 정도밖에 듣지 못할 것 같아보였다.


아무리 지각을 밥먹듯이 한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 늦는 일은 없었는데, 부모님이 제주도 여행을 가신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사실 오늘 늦게 일어난 것은 알람을 끄고 다시 잠이 든 현재의 탓이었지만, 현재는 동생은 나몰라라 하고 회사에 출근해버린 누나를 탓하고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현재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늦은 거, 연습이나 좀 하다가 렛슨 들어가는게 낫겠어. 어차피 화성학은 1차 중간고사도 망쳐서 재수강할 지도 모르는데 지각을 하나 결석을 하나 학점 나오는 건 비슷하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현재는 음대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수위 아저씨를 보고 꾸벅 인사를 하며 현재는 새 형광등을 달고 밝아진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본격적인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그런지 연습실 복도에 흘러나오는 악기 소리는 몇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현재는 바로 앞에 있는 연습실 문에 달린 작은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좁은 연습실에는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현재는 악보를 꺼냈다. 악보를 올려놓고 몇 장 넘기자 희가 적어놓은 몇 가지 메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몇 장 넘기니 지난 주 렛슨 때 가장 많이 지적받았던 부분이 보였다. f(포르테) 그리고 p(피아노). 몇 마디 단위로 계속 바뀌는 악상 기호는 희가 그려놓은 큰 동그라미 안에 갇혀 있었다.




현재는 물끄러미 그 악상 기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건반 위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연습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소리가 나지 않거나 현이 끊어진 소리가 나는 건반이 몇 개 있었다. 웬만하면 그냥 무시하고 연습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몇 개의 음들은 그 곡에서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음이었던지라 그 음을 누를 때마다 계속 귀에 거슬렸다.




“띵-”




또다시 현 끊어진 소리가 나자 현재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 웬만하면 피아노 좀 고치지.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의 뚜껑을 닫고 현재는 다시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작은 연습실을 나섰다.






*   *   *




복도로 새어나오는 악기 소리는 적었지만, 시험 기간이어서 그런지 피아노 위에 엎드려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공부는 그냥 도서관에 가서 하지, 필요한 사람 피아노도 못쓰게 저게 뭐야.


문에 달린 창문으로 들여다보던 현재는 툴툴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빈 연습실이 또 있을까, 연습실 복도를 기웃거리던 현재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끝에 옆 동, 희의 방이 있는 옆 동으로 옮겨가는 구름다리가 보였다.




잠깐 망설이다 현재는 구름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 그렇겠지만, 만일 자신의 렛슨 시간 앞에 아무도 없으면 먼저 렛슨을 시작할까도 싶었다. 어차피 한 삼십 분 연습을 더 한다고 해서 안되던 곳이 갑자기 될 리도 없었고, 빈 연습실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교수 연구실이 있는 건물은 언제나 조용했다. 1층에야 강의실 몇 개가 있어 가끔 지나다니는 발걸음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2, 3층에는 교수 연구실밖에 없었기에 방문 밖으로 새어나오는 렛슨받는 소리 말고는 그야말로 적막한 곳이었다.




강의실과 연습실이 있는 건물과 연구동 3층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건너자 연습실 복도에 울리던 몇 대의 악기 소리는 어디로갔나 싶을 만큼 조용함이 찾아왔다.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작게 들렸다. 바이올린 교수의 방 앞을 지나자 바이올린 소리도 새어나왔다. 발성 연습을 하는 낮은 바리톤 소리도 들렸다.




걸음을 뗄 떼마다 발소리가 울리는 복도에 울렸다. 저 끝에 있는 희의 방이 가까워져갔다. 아무도 없겠지, 그래도 좀 일찍 간다고 전화라도 드리고 올걸 그랬나, 하면서 현재는 한 쪽 어깨에 맨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면서 걸어갔다. 하지만 이내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302호의 문틈으로 피아노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   *   *






- 누구지? 앞에 누가 있나?




현재는 문틈으로 귀를 가져갔다. 앞 시간에는 학생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 새 누가 렛슨 시간을 잡은 걸까. 하지만 문 틈으로 작게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어떤 곡이 아닌, 스케일이었다.




피아노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래 음부터 높은, 가벼운 음까지 주욱 훑어 올라갔다 내려오는, 거대한 파도의 스케일. 현재는 알 수 있었다. 아무런 곡이 아닌, 그저 스케일 연습에 불과했지만 이 소리는 여느 학생의 것이 아니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이건 희의 소리였다.




*   *   *




- ...아.




피아노 소리가 멈추었다. 연습, 끝난 걸까. 잠시 빼놓았던 정신을 추스르며 현재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선생님...”




두툼한 이중 방음문이 한 뼘 가량 부드럽게 열렸다. 그 틈새로,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희가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응? 일찍 왔네? 들어와.”




희는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서며 느슨해진 머리끈을 다시 조였다. 그리고는 창가로 다가가 활짝 창문을 열며 말했다.




“아, 날씨 좋다...”


“네...”




현재는 혼잣말처럼 대답하면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나사를 돌려 의자를 높였다.




*   *   *




“그래, 여기.”




현재의 왼쪽에 앉아있던 희가 피아노 건반 쪽으로 팔을 뻗자 현재가 몸을 조금 뒤로 뺐다. 희는 현재의 오른손 옆에 있던 검은 건반을 하나 눌렀다.




“여기 임시표 있잖아. 자꾸 안치네.”


“아...”


“다시 쳐봐.”


“네.”




현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건반을 누르려고 하자 희는 악보를 앞으로 넘겼다.




“아, 잠깐. 기왕 멈춘 김에 이 앞부터 보자. 여긴 포르테, 그 다음에 바로 피아노잖아. 보이지?”


“네.”


“근데 강약 조절이 잘 안돼. 여긴 퍼스트 파트랑 주고 받고 해야하는 부분인데 그렇게 그냥 포르테로 밀고 나가면...”




희는 다시 팔을 뻗었다. 퍼스트 파트의 오른손 부분만 가볍게 몇 마디 치고서 건반에서 손을 뗀 희는 현재를 보며 말했다.




“그렇지? 여기 퍼스트 파트가 이런 멜로디니까 여긴 네가 주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소리 좀 더 줄여야지. 저번 시간에도 얘기했는데. 봐, 내가 여기에 크게 표시까지 해놨잖아.”




현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건반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두 마디도 채 치기 전, 희는 팔을 뻗어 현재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 현재의 손가락 하나를 꾹 눌렀다.




“여기는 임시표 아니잖아. 앞마디에는 임시표 있어도, 다음 마디에서는 다시 제자리음이잖니? 제자리표가 없어도 그런 건 알아서 해야지. 자, 보이지?”




현재의 둘째 손가락을 흰 건반 위에 얹어주고 희는 다시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흰 건반 하나를 누르고 있는 상태로, 현재는 가만히 그 건반을 누르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밟고 있는 페달 때문에 그 음의 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자, 페달 떼고. 아까 거기부터 다시 쳐봐.”




현재는 페달을 밟고 있던 발을 뗐다. 그리고 다시 악보를 쳐다보았다. 임시표는 임시표가 그려진 그 마디 안에서만 유효했다. 다음 마디로 넘어가면 제자리표가 따로 그려져 있지 않아도, 알아서 제자리음을 눌러주는 것.




- 이렇게 기초적인 걸 틀리다니.




제자리표가 그려져 있지 않아도 다음 마디에서는 다시 원래 음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복잡한 음들이 이어지다보니 그만 스쳐지나갔고, 그런 잘못된 음으로 연습을 하다보니 한 번에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제자리표를 그려넣지 않은 작곡가에게 속으로 툴툴대며 현재는 다시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 엇.




하지만 현재는 또다시 틀린 건반을 누르고 말았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지난 일주일동안 이 틀린 음을 누른 것이 수 백 번은 될텐데 한 번에 고친다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치기 시작했기에, 스스로도 놀란 현재는 저도 모르게 연주를 멈추고 희를 쳐다보았다.




희와 눈이 마주치자 현재는 왠지 조마조마해졌다. 희에게 싫은 소리를 듣기 전에 다시 치려고 현재는 얼른 다시 건반을 누르려 했지만, 희가 말했다.




“너...”


“네?”




현재는 다시 희를 쳐다보았다. 희가 말했다.




“한 번에 고치기 어려운 거 아닌데, 그래도 거기, 임시표 넣어서 치면 화성이 이상하잖아.”


“아...”


“그 마디 봐봐. 거기 화성, 몇 도지?”




현재는 악보를 쳐다보며 속으로 음들을 읽어보았다. 가만있자, 이게 이렇게 되면 1차 전위인가? 그럼...7도의 56 화음? 현재는 열심히 계산해보았지만 화성학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아서인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때, 희가 말했다.




“왜, 잘 모르겠어?”


“...네.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희가 작은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화성학 시험에 백지 내고 그러니까 이게 몇 도인지도 모르잖아.”


“네?”




현재는 깜짝 놀라 희를 쳐다보았다. 희의 눈이 웃고 있었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뭘 어떻게 알아?”


“저...화성학 시험이요.”




왠지 백지를 냈다는 소리를 하기가 어쩐지 쑥쓰러워 현재는 말을 바꾸어 말했다.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는 거지? 화성학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인가? 그 짧은 순간에 현재의 머리 속에는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느새 희의 얼굴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전교에 소문 다 났더라. 피아노과 1학년 과대가 화성학 시험, 백지 냈다고.”




현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희는 팔을 뻗어 현재의 악보를 몇 장 넘겼다.




“자, 이건 다음 시간까지 다시 잘 연습해오고, 뒷부분 좀 쳐볼까?”






*   *   *








털썩-. 커다란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린 채 잠을 청하고 있던 희가 고개를 돌려보니 샤워를 마친 기영이 샤워로브를 그대로 입은 채로 이불 위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완전히 대자로 뻗었네.”




희의 말에 기영이 그녀 쪽을 돌아보며 쿡쿡 웃었다. 협탁 위에 켜둔, 조도가 낮은 스탠드 때문일까. 희는 기영의 얼굴이 평소보다 얼굴이 많이 까칠해보인다고 생각했다.




“일어나. 옷 갈아입고 자야지. 그러다 잠들겠어.”




희의 말에 기영은 끄응,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 강간범 변론을 준비하느라 며칠 동안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오더니 내일 오전에 다른 재판이 있다며 그래도 오늘은 날은 넘기지 않고 들어온 차였다.




무겁게 몸을 일으킨 기영은 갈아입으라는 옷은 갈아입지 않고 침실 붙박이장 문을 열었다. 장롱 안에 가득 걸린 와이셔츠를 손으로 훑어보던 기영이 하나를 골라냈다.




“뭐해?”


“내일 입을 옷 좀 챙겨놓게.”




희의 물음에 기영은 짧게 대답하고는 팔뚝에 와이셔츠를 걸친 채 붙박이장 문을 활짝 열었다. 기다란 문짝 안쪽에는 긴 거울과 함께 넥타이들을 걸 수 있는 수납고리가 있었다. 기영이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가장 위에 걸려있던 넥타이 하나를 골라내자 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가 작게 출렁이는 소리에 기영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피곤하다며 자지 않고.”


“그 셔츠에 그 넥타이가 참 잘도 어울리겠다.”




기영의 손에서 넥타이를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희는 붙박이장 안쪽에 가득 걸린 셔츠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기영은 약간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그게 그거라니까. 전부 흰색 아니면 옅은 하늘색 셔츠들에 넥타이도 다 비슷비슷한데 뭐가 어울리는 게 있고 안 어울리는 게 있어? 그냥 줘. 나도 얼른 머리말리고 자게. 피곤하다. 내일 일찍 나가봐야돼.”




하지만 그런 기영의 말은 귓전으로 흘려버리며 그의 말대로 다 비슷비슷한 색깔과 무늬들의 셔츠에 넥타이를 대어보던 희는 높이 걸려있던 셔츠의 소매 하나를 잡아당겼다.




“이거 입어. 이게 제일 낫겠다. 다른 날도 아니고 재판 날은 그래도 좀 신경쓰고 가야지.”


“참나...별.”




기영은 피식 웃었지만 희는 셔츠 옷걸이 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무슨 셔츠 옷걸이가 이렇게 높아? 좀 꺼내줘.”


“이거?”




기영은 조금전까지 희가 소매를 잡고 있었던 와이셔츠를 옷걸이에서 빼냈다. 그리고 처음에 자신이 꺼냈던 셔츠를 다시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셔츠와 넥타이를 희의 화장대 의자에 걸쳐놓았다. 서랍에서 잠옷을 꺼내 옷을 갈아입고 샤워로브를 욕실에 걸어놓고 오니 희는 어느새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있었다. 덥지도 않은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희를 잠시 바라보다 기영은 협탁 위 스탠드의 불을 껐다.




“머리도 말리고 온 거야? 그냥 자면 감기걸릴걸.”


“지금이 몇 월인데 감기는 감기야. 이 겨울이불은 이제 좀 치우라구.”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기영은 어둠 속에서 희를 찾았다.




*   *   *






희는 감정표현에 그닥 솔직하지 않았다. 열에 들떠있는 눈이나 기영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몸,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영을 단숨에 오르가즘까지 끌고 올라가는 그 뜨거운 체온은 그녀가 무척 솔직한 여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희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신혼 초, 관계가 끝난 후 쑥쓰러움을 무릅쓰고 물어봤던, 좋았냐던가 하는 물음은 묵살되기 십상이었고 절정을 맞고 난 다음에 희는 몸이 식기도 전에 얼른 샤워실로 뛰어가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고시 공부에만 몰두해왔던 기영에게 희는 첫 여자였고 그래서 다른 여자들이 어떤지는 몰랐다. 가끔씩은 희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와주었으면 하는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부부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점수로 치면 백점은 아니지만 팔십 점쯤은 되는 부부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평균은 될 거라고도 생각했다.




기영은 희보다 조금 늦게 절정을 맞았고 잠시동안 어두운 침실에는 두 사람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침실에 붙은 샤워실에서 새어나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기영은 이 날의 섹스 역시 평균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머리카락은 다 말라 있었다.






댓글 '3'

위니

2006.11.17 09:55:29

희하고 기영이는 뭔가 스파크가 필요한 부부같아요..그게 현재가 될까요??
건필하세요^^

so

2006.11.17 12:09:46

깔깔한 성미는 결혼 생활에 별로 안맞을텐데
그나마 기영이 느긋한 성격인 듯해 맞추고 있군요...
적당히 괜찮은 관계인건가??

아침햇살

2006.11.19 03:40:22

위니님/ 스파크! 갑자기 전기용접 파란불꽃이 생각나버렸어요. ㅋㅋㅋ

so님/ 차라리 기영인 제가 데리고 가버릴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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