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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포르테 - # 4










“듀오, 하기로 했어.”


“응?”




소파에 느긋이 기댄 채 메이저리그 야구 중계를 보던 기영은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럼, 안하려고 했었어?”


“뭐.”




기영이 보건 말건 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듀오 곡 연습할 만한 애가 없으면 안하려고 했지. 듀오를 꼭 해야한다는 건 없으니까.”


“그래?”


“그럼, 누가 할지 정한 거야?”


“어.”




기영은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놓은 딸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잘 됐네.”




잘 된건지, 어떤 건지 희는 알 수가 없었다. 아, 왜 저게 아웃이라는 거야, 세이프지, 라며 혀를 차는 기영을 뒤로 하고 희는 피아노방으로 들어갔다.




그랜드 피아노 위에는 악보가 놓여있었다. 미요(D. Milhaud)의 스카라무슈(Scaramouch),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각 악장마다 분위기가 급격히 변하기에 곡을 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감성과 테크닉을 요구하고 또 듀오 곡이니 만큼 두 연주자간의 호흡이 중요한 그런 곡이었다. 그러니까...한 마디로 말해 짧지만 ‘만만치 않은’ 곡.




- 저, 이 곡이 꼭 하고 싶어요. 미요, 스카라무슈...요. 이 곡 치고 싶어요, 선생님.




그렇게 말하던 그 애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 애답지 않게 진중한, 그런 간곡한 바램의 눈빛. 피아노에 기대선 채 습관적으로 손가락으로 피아노 뚜껑을 두드리며 오전에 있었던 모임을 떠올리던 희는 생각을 멈추었다.




- 그 애답지 않은...?




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랬을까. 네 실력으로는 무리라고, 실기 시험이나 열심히 준비하라고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현재의 눈빛을 보는 순간 희는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꼭 듀오를 하고 싶다고, 꼭 미요를 치고 싶다고 말하던 눈빛. 악보를 가져갔던 날까지만 해도 스카라무슈가 어떤 곡인지도 몰랐을텐데. 이름조차 발음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애가, 그 애답지 않은 얼굴로 말하자 희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 ...그 애다운건 뭘까.




늘 지각하며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는...? 연습도 제대로 안해오고 악보도 안 외워가지고 오면서 늘 웃음으로 무마하려 하는...?




그러고보니 희는 현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예술중학교와 예술고등학교를 거치며 D대학 김성희 교수에게 6년동안 배웠다는 것.




- 그리고...




입학 시험 둘째 날 마지막 번으로 시험을 봤다는 것,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23의 5번을 쳤다는 것 정도...?




희는 피아노 의자에 앉으며 악보를 펼쳤다. 미요, 대학 시절 연주해본 적이 있는 곡이었다. 그러고보니 벌써 오래 전이었다. 아주...오래 전.




왼 손으로 악보를 휙휙 넘기면서 오른손으로 몇몇 패시지를 골라 가볍게 쳐보던 희는 이윽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악보를 덮었다. 현재가 맡을 세컨(Second)파트는 희가 맡을 퍼스트(First)파트보다 덜 테크닉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손가락놀림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없었던 일로 하자고, 듀오를 취소하고 싶었다. 서로서로 각자의 부분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하더라도 둘이 호흡을 맞추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텐데, 현재는 미요를 쳐본 적도 없으니 현재의 파트에 대한 렛슨부터 시작해야하지 않은가.




- 휴우.




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침실로 들어가는 희에게 기영은 내일부터 또 한동안 야근을 할 거라고 말했다. 한약이라도 먹을래, 라고 물어보았지만 기영은 됐어, 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언뜻 보인 그의 흰 티셔츠 앞에는 옅은 딸기물이 들어있었지만 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리 때문인지 피곤하기만 했다.






*   *   *




“...재야, 야, 이현재.”


“아, 응?”




이어폰을 귀에서 빼며 현재는 고개를 돌렸다. 뒷줄에 앉아있던 아름이 현재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 미안, 못들었다.”


“뭐해? 시험 공부 다 했어?”




현재의 어깨 너머를 넘겨다보던 아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거 듀오 곡 아니야? 뭐였지? 미요였나?”


“어, 맞아. 미요...스카라무슈.”




그 낯선 이국적인 단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있게 되자 현재는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름은 현재의 어깨에 걸쳐져있는 이어폰을 가리켰다.




“미요 듣는 거야?”


“응.”




현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폰 한 쪽을 집어 아름에게 내밀었다.




“들어볼래?”


“아니, 됐어.”




아름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근데, 시험 공부는 다 한거야? 시험 5분 전인데 악보 들여다보고 있을 정신이 있어? 혹시...시험공부 다 한 자의 여유?”


“아니....”




현재는 책상 위에 펼쳐놓은 악보로 시선을 떨궜다. 악보 밑에 깔려져있는 화성학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현재를 보자 아름이 다시 물었다.






“공부 다 한거야, 정말로? 너 저번에 쪽지시험도 망쳤다면서.”




대학에 들어와 보는 첫 시험이었다. 다른 과목들의 중간고사는 2, 3주 정도 뒤였지만 전공 필수과목인 화성학은 중간고사를 2번이나 보겠다며 학기 초부터 강사가 공언한 탓에 4월 초인 지금 1차 중간고사를 보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화성학을 조금 배우긴 했었지만 대학에 들어와서 배운 화성학에 비하면 정말 기초적인 수준이었고 무엇보다도 대학의 시험은 고등학교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를지, 모두들 긴장하며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현재는 고개를 저었다.




“나 이따 렛슨이야. 시험 끝나고 곧장.”


“렛슨? 시험이라고 하고 한 주 빠지지 그랬어?”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연습을 안해서 혼날 것 같다, 싶으면 시험이나 레포트같은 거짓말을 하고 렛슨을 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최교수님을 비롯한 몇몇 나이든 교수님들은 렛슨을 못가겠다고 전화하는 걸 은근히 반기는 것 같다고들 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자청해서 하겠다고 한 듀오가 아닌가. 듀오 곡을 처음 렛슨받는 날부터 빠질 순 없었다.




“됐어, 시험은 그냥 포기하련다. 2차 중간고사랑 기말고사 잘 보면 되지 뭐.”




현재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고 악보 위에서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름이 무어라 하는 것 같았지만 현재는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렛슨이었다. 미요, 스카라무슈. 귀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따라 악보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던 현재는 앞 줄에 앉은 누군가가 어깨 뒤로 시험지를 넘겨주자 그제서야 씨디 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백색 A4 용지가 3장이나 스테이플된 시험지에는 문제가 가득 적혀있었지만 듀오 곡을 연습한다고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현재는 당연히 한 문제도 제대로 풀 수가 없었다. 연필을 들고 가장 짧은 문제를 이리저리 풀어보던 현재는 이내 연필을 내려놓았다. 풀어본답시고 이리저리 적어놓은 것들을 깨끗이 지우고서 현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다 했어?”




강의실 한 쪽에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강사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지만 현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의실 가득한 동기생들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현재는 시험지를 교탁 위에 놓고 나와 버렸다. 그런 걸 보고 ‘금메달을 땄다’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렛슨 시간까지는 아직 50분이나 남아있었다. 현재는 수명을 다한 형광등이 깜빡이는 계단을 돌아 올라갔다.




*   *   *




3층의 긴 복도 양쪽에는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가 한 대씩 들어가 있는 좁은 연습실이 주욱 붙어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시험 기간이 아니어서인지 연습실에는 피아노를 치는 학생이며 바이올린이나 플루트 같은 악기를 연습하는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연습실 문에 달린 작은 유리문을 통해, 빈 방이 없나 살펴보며 복도를 걸어가던 현재는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현재?”




연습실 복도 끝, 옆 건물과 이어지는 구름다리로 통하는 유리문 앞에 희가 있었다.






*   *   *




소파에 던져둔 핸드백을 열며 희는 말했다.




“그래, 그럼 지금부터 하면 되겠네.”




듀오 때문에 당분간은 일주일에 한 번 더 렛슨을 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웬만한 시간은 이미 다른 학생들의 렛슨으로 꽉 차 있었고, 그랬기에 현재에게 새로 내어줄 수 있는 시간은 매주 이 시간밖에 없었다. 앞의 학생의 렛슨이 끝나고서 1시간이 비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현재를 기다리는 동안 피아노나 치고 있을까, 하며 잠시 건반을 두드리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생리대가 든 작은 파우치를 핸드백 안쪽에 넣으며 희는 물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수업 있다고 하지 않았니?”


“아, 그게요. 오늘 시험봐서 일찍 끝났어요.”




희의 등 뒤로 현재가 대답했다. 핸드백을 다시 닫고 돌아서니 현재는 앞 학생이 낮춰놓은 피아노 의자를 다시 높이고 있었다.




“너...키가 몇이니?”


“178이요.”




그럼 그렇게까지 큰 키도 아닌데 피아노 의자를 굉장히 높게 쓴다고 생각하며 희는 전화기 옆의 시계를 보았다. 목요일 11시에 있는 현재의 두 번째 렛슨은 한 주의 마지막 렛슨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원 렛슨 시간은 월요일 9시, 희의 한 주를 시작하는 렛슨이었다.




현재가 일찍 온 탓에 지금 시계는 10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매주 이 시간에 렛슨하면 좋을텐데. 집에도 일찍 가고 말이야. 집에 가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간에 어정쩡하게 시간이 비는 것보다는 일찍 끝내고 학교를 나서는 것이 좋았다.




-그래도 두 시간 짜리 수업이 9시라는데 어쩔 수 없지, 뭐.




어느 새 현재는 의자 양쪽에 달린 커다란 나사를 다 풀었는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악보를 펴고 있었다. 피아노 쪽으로 다가가며 희는 말했다.




“그럼, 시작할까?”




*   *   *




현재의 왼쪽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있던 희는 팔짱을 낀 채 그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현재는 연습을 꽤 해왔는지 지금 치고 있는 복잡한 패시지를 의외로 매끄럽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현재의 시선이 악보의 오른쪽 페이지 하단을 향해 가자 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악보를 한 장 넘겨주고 희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카로운 핸드폰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현재는 피아노를 치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당황한 얼굴로 피아노 옆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허겁지겁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낸 현재는 희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배터리를 빼버렸다. 그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꺼둔 줄 알았는데...”


“됐어, 괜찮아. 거기서부터 다시 칠래? 첫째 단, 세 번 째 마디 쉼표 다음부터.”


“네.”




현재는 고개를 들고 희가 말한 부분을 쳐다보더니 다시 건반 위로 손을 가져갔다.


조금 전과 다름없는 손놀림으로 현재는 건반을 눌러가고 있었지만 희는 그의 연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의 그 작은 사건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졌기 때문일까. 아까의 연주나 지금의 연주나 미스 터치의 갯수라던가 음악적인 처리는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한 페이지가 넘어가기도 전에 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잠깐, 그만.”




희의 말에 현재는 얼른 건반에서 손을 뗐다. 페달에서도 발을 뗐지만 아직 작은 울림이 그랜드 피아노의 열린 뚜껑 안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다.




현재와 시선이 마주치자 희는 그의 어깨 너머로 팔을 뻗어 피아노 위의 악보를 넘겼다. 다음 페이지는 2악장이었다. 2악장 모데레(Modere), 온화하게.




“1악장은 그만하고 2악장 쳐볼래?”




무슨 지적을 받을까, 여느 학생들처럼 약간은 움츠러든 얼굴로 희의 말을 기다리던 현재는 이내 악보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건반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    *    *




이건 좀 아닌데, 라고 생각했다.


통통 튀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의 1악장과는 달리 2악장은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모데레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멜로디는 퍼스트 파트에게 주어진 것이었고, 현재가 맡을 세컨 파트는 퍼스트 파트에 대한 반주처럼 작곡되어 있었다.




대학 시절 희의 지도교수가 열었던 제자 음악회에서 희가 이 곡을 쳤을 때, 퍼스트 파트를 친 건 희였고, 세컨 파트는 이젠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한 학년 위 선배가 맡았었다. 꽤 오랜 기간동안 그 선배와 함께 연습을 하고 렛슨을 받았었지만, 퍼스트 파트가 없는 세컨 파트만 이렇게 오랫동안 들어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희는 가끔씩 현재의 악보를 넘겨줄 때를 제외하고는 의자에 기대 앉아 그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치고 있는 파트가 퍼스트에 딸린 반주처럼 작곡된 탓이어서, 그래서 멜로디가 아닌 부분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세컨 파트만 따로 들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단순히 그의 연주 실력이 부족한 탓인지 희는 지금 자신의 귀에 들리는 피아노 소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희가 기억하고 있는 미요가 아니었다. 희의 마음 속에 있는 미요가 아니었다.




2악장이 끝나자마자 ‘2악장, 한 번 다시 쳐볼래?’라는 희의 말에 현재는 다시 악보를 앞으로 넘겼고, 두 번째 치는 2악장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음을 누른 현재의 손가락이 건반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페달을 밟고 있던 그의 발이 들려지자 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현재에게 말했다.




“잠깐 비켜볼래?”






*   *   *






현재는 넋을 잃은 듯한 얼굴로 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년 전, 희가 치는 그리그 협주곡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 대학 입시까지는 몇 년이나 남았던 시기였지만 그래도 음악을 하는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음악대학, 그 학교에 최연소 교수로 부임했다는 피아니스트가 협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버지로부터였다.




아침 식탁에서 신문을 보던 아버지가 현재에게 보여준 것은 매년 봄 열리는 교향악 축제에 대한 한 면짜리 특집 기사였고, 그 기사의 하단에는 손바닥만한 박스 기사가 따로 있었다. ‘교수 부임 후의 첫 연주는 그리그 협주곡’. 현재는 아직도 그 기사의 제목을 기억했다. 기자가 애써 줄이고 줄였음이 분명할텐데도 박스 지면을 가득 채우던 그녀의 화려한 프로필. 그 날 저녁, 현재는 연주회 표를 예매했다. 꼭 보고 싶었다. 어떤 연주인지. 어떤 그리그인지, 어떤 사람인지. 




입소문이 난 탓인지 이미 1,2 층 좌석은 모두 매진이었다. 객석이 어두워지고, 이윽고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연주자가 무대로 걸어나왔다. 3층 구석의 자리였던지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쨍쨍한 첫 음, 그 A음이 거대한 음악홀 안에 울려퍼지던 순간, 현재는 그대로 음악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 현재는 희가 상당히 자주 연주회를 가진다는 것을 신문이나 혹은 잡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의 연주회는 시험기간과 겹치거나 아니면 기껏 가려고 해도 이미 매진이어서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연주했던 그리그 협주곡은 현재가 본 희의 유일한 연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에는 정말로 쉽게 잊을 수 없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랬기에 이 대학에 합격한 후 희망 지도 교수의 1지망에 희의 이름을 써 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워낙 높은 김 희 교수의 명성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희에게 피아노를 배우길 원했지만, 그녀의 문하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률이 워낙 세다는 말을 들어서 사실 현재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현재는 희에게 배정이 되었다.




처음엔 열심히 해서 희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대학 신입생 생활은 현재를 피아노에만 몰두할 수 있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처음의 마음가짐은 어디로 가고, 피아노 뚜껑도 열어보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렛슨이 있는 월요일이 다가오면 초조해졌지만, 희는 그닥 큰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처음에 긴장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이젠 렛슨 시간이 되어도 긴장할 것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에게와는 달리 현재에게는 좋은 표정을 짓지 않는 희에게는 미안하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현재는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 신록의 계절, 이 드넓은 캠퍼스에서.




하지만 우연히 가져갔던 미요의 스카라무슈. 대체 어떤 곡일까 싶어 현재는 한밤중에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윗층에서 인터폰으로 항의가 오는 바람에 곧 피아노 뚜껑을 닫아야만 했지만 그 짧은 시간, 처음으로 쳐본 미요의 곡은 그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도, 희가 말했다.




- 1학년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 제자 음악회의 마지막 순서는 듀오야. 나랑 누구 한 명이 칠 거고.




현재는 말했다. 저, 꼭 그 곡을 치고 싶어요. 정말, 하고 싶어요, 선생님.




한 학기동안 그렇게 불성실한 모습을 보았는데도 어째서 희가 현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김 희라는 대단한 연주자와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기회, 평생 이런 기회가 다시 올까. 그것도 이렇게 매혹적인 곡을.




그랬기에 현재는 시험을 제쳐두고 지난 며칠 동안 죽어라고 연습을 했던 것이다. 이제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연주를 잘 해내고 싶었다.




그런 현재는 지금 희를 넋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어깨가 조금 넘는 길이의 생머리를 하나로 대충 동여매었던 분홍빛 머리끈이 어느 새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모른 채, 희는 피아노에 몰입하고 있었다.




모데레, 온화하게. 그게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 조금 전까지 현재가 치고 있었던, 2악장의 세컨 파트를 치고 있는 희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온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현재는 희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다. 평소에 그녀가 보였던 얼굴. 무심한 듯, 지루하다는 듯. 그런, 생기가 없는 표정. 지금 희의 얼굴에 떠오른 저 충만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그런 얼굴.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얼굴은...




진보라빛 드레스를 입고 그리그를 치던 그녀의 얼굴도 이랬을까. 음악에 흠뻑 빠진, 이런 빛나는 얼굴.




희의 옆에 선 채로, 정신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녀의 피아노 소리를 듣던 현재는 ‘이건 세컨 파트고, 이제 퍼스트 파트 쳐줄게, 들어봐.’라는 희의 말도 듣지 못했다. 희의 손 끝에서 나오는 선율이 자신의 손가락이 누르던 건반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희가 악보를 넘기기 위해 잠깐 손놀림을 멈추었을 때였다.




“이현재.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악보 좀 넘겨줄래?”


“...아, 네, 네.”




희의 말에 현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고, 악보 넘기는 곳을 놓치지 않기 위해 희가 읽어내려가는 악보를 눈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현재가 악보를 정확한 타이밍에 넘기자 희는 눈짓으로 잘했다는 표시를 해보였다. 희와 눈이 마주치자 현재도 엉겁결에 싱긋 웃어보였지만, 희는 어느 새 다시 피아노에 집중하고 있었다.


팔을 뻗어 악보를 넘기며 중간중간 현재는 희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정말이지....다른 사람같았다.




*    *    *




“그래, 그럼 오늘은 이만 하자.”




희는 시계를 흘끗 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벌써 1시간이 지나 있었다.




“월요일은 바흐 해올거지?”


“네.”


“그럼 월요일에 보자.”




희는 소파로 다가가 핸드백을 열었다. 작은 파우치가 보였다. 집에 가기 전에 화장실에 다시 한 번 갔다가 갈까. 벌써 일주일째인데 아직 생리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걸. 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백을 다시 닫았다.




현재가 악보를 주섬주섬 챙기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계세요.”




희는 옷걸이에 걸어놓은 얇은 자켓을 내리면서 대답했다.




“그래, 잘가라. 다음 주에 보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옷깃을 정돈하면서 거울을 보던 희는 그제서야 연습할 때만 묶는 머리가 다시 풀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머리끈이 어디로 갔지? 뒤를 돌아보니 집에서 가지고 왔던 분홍색 머리끈은 뚜껑이 닫힌 그랜드 피아노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    *    *






“이현재!”


“...아, 깜짝이야.”




누군가가 어깨를 치는 바람에 깜짝 놀란 현재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름이었다.




“뭐해? 렛슨 안 갔어? 11시라면서. 지금 11시 반 다 되었는데?”


“아, 지금 끝났어. 일찍 시작했거든.”


“그래? 잘 했어? 시험지는 거의 백지로 내는 것 같던데.”


“하하. 시험에 대해서는 묻지 마. 2차 때 잘 봐야지.”




현재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불끈, 하며 주먹을 쥐어보이자 아름이 크게 웃었다. 그 때, 저 쪽에서 걸어오던 피아노과 조교가 현재를 보고 아는 체 했다.




“아, 현재야. 안녕.”


“안녕하세요, 누나.”


“오늘 화성학 중간고사 보지 않았어?”


“어, 어떻게 아셨어요? 화성학은 작곡과 조교형이 시험지 나눠주고 갔는데. 그거 작곡과 담당 아니예요?”


“아침에 음대 도서관 가니까 너네 학년 전부 화성학 공부하고 있던걸, 뭐. 정남희 선생님 학점 되게 짜니까 공부 열심히 해. 재수강 하지 말고. 오죽했으면 선생님 별명이 정나미겠냐. 그 짜디짠 학점에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고.”




“으앗, 큰일이다! 나 백지 내고 나왔는데...!”


“어머, 정말? 큰일이네. 그거 회복하기 힘들텐데...”


“아윽, 어떡하죠, 누나?”


“과대가 화성학 재수강이나 하고 그러면 어떡해. 피아노과 망신이다, 망신. 과대 바꿀까?”




조교가 웃으며 현관 밖으로 나가자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던 아름이 현재에게 물었다.




“너 조교언니랑 친해?”


“뭐, 친하다기 보다...”


“되게 친해보이는데.”


“과대라 그렇지 뭐. 자주 보니까.”




“흠, 저 언니 좀 깍쟁이에 내숭 같아 보여.”


“아냐. 성격 좋은데 뭐.”


“남자애들한테만 잘해주는 것 같은데?”


“야, 그거야 내가 워낙 잘생겼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뭐? 야, 이현재!”




아름은 장난스레 현재를 때리려는 행동을 취했고 현재는 크게 웃으면서 현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계단을 내려오던 희는 현재와 아름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현관을 나섰다. 과대까지 한다 이 말이지... 바쁘게 사는군, 바쁘게 살아. 그러니 연습할 시간이 없지.




- 그래도 오늘 미요 해온 건 의외였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여지껏 한 달 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달랐다. 맘먹고 연습해온 티가 나는, 그런 연주였다.




- 그나마 다행이야.




듀오를 하는데 있어서 두 연주자의 실력 차이가 너무 난다면 정말 그것처럼 곤란한 일도 없었다. 현재에게서 다른 프로페셔널한 연주자만큼의, 아니 적어도 은혜만큼의 실력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해줘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 듀오 연주에 대해 오케이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데 오늘 하는 모양을 보니 조금은 안심해도 될 것 같아 희는 기분이 좋아졌다.




연주를 망치는 것만큼 싫은 건 없었다. 그것도 나 때문이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생각하기에도 싫은 일이었다.




- 과대라...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과대라. 다음 번에 한 번 놀려볼까.




희는 혼자 웃으면서 음대 현관 앞에 주차된 자신의 자동차 문을 열었다. 생리는 거의 끝난 것 같았다.






*   *   *




“어, 김 희 선생님이다.”


“응?”


“저기. 저거 선생님 차인데.”




음대 앞에 있는 학생 식당으로 가던 아름이 한 쪽을 가리켰다. 현재가 시선을 옮기자 흰 자동차가 음대 앞 좁은 포장도로를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너 렛슨 끝나고 선생님 집에 가시나보다.”


“그런가보네.”




식당문을 들어서던 아름이 불쑥 말했다.




“아...나중에 유학갔다 와서 저렇게 교수 되면, 얼마나 좋아? 일주일에 한 열 시간만 렛슨하면 되고...교수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 같아. 그치?”


“뭐...좋겠지.”


“논문 대신 일 년에 한 두 번 연주회 하고...그럼 그게 끝이잖아. 세상에 음대 교수만큼 좋은 게 없다니까.”




현재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아름은 계속 말했다.




“최교수님 좀 봐. 은영이 최교수님한테 갔잖아. 3지망에 괜히 써봤다가 망했어. 렛슨 때 가끔 옆에서 쳐준다는데 완전 장난 아니래. 은혜언니가 그러는데, 작년에 최교수님 독주회 해서 갔었는데, 하도 웃겨서 다들 웃음 참느라 혼났대. 진짜 장난 아니래. 중학생보다 더 못친다더라.”


“그런데 그럼 연주회를 왜 해?”


“논문처럼 연주회 하는 게 의무라니까? 실적같이. 의무야, 의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뭐.”




카페테리아에 길게 늘어선 줄 쪽으로 다가가며 아름이 덧붙였다.




“렛슨만 몇 시간 하고, 연습도 안하고. 연주는 그냥 대충대충 횟수만 채우면 되고. 피아노 못친다고 학생들이 비웃어도 무슨 상관이야. 한 번 교수되면 웬만해서는 평생 가는데. 아, 얼마나 편해. 진짜 좋겠지.”


“...아니야.”


“응?”




현재의 말에 아름이 돌아보았다.




“응?”


“잘 치는 교수님도 있다구. 그런 교수님들도 있지만 다 그런 건 아니잖아.”


“하긴.”




아름이 수긍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선생님 진짜 잘친대. 근데 난 아직 한번도 못봤어. 렛슨 때는 잘 안쳐주시더라구. 한 한두 마디 정도만 잠깐잠깐 쳐주시는데, 잘 치시긴 하는 것 같더라. 경력도 장난 아니잖아. 하긴 그러니까 그 나이에 우리 학교 교수가 되었겠지만. 올 여름에 독주회 하신다던데 그 때 봐야지.”


“......”




쟁반에 반찬접시를 하나 올려놓으며 아름이 물었다.




“넌 본 적 있어? 선생님 피아노 치는 거?”




하지만 현재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름이 다시 말했다.




“아, 옛날에 협연하는 거 본 적 있댔지?”


“으응.”




현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름은 밥공기를 들어 쟁반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어땠어?”


“좋았어. 정말 좋았어.”




그리고...예뻤어. 넋을 잃을 만큼.




*   *   *






“왜 그래?”




넥타이를 풀어 옷장에 걸어놓던 기영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응?”




침대에 누워있던 희가 기영을 쳐다보자 기영이 다시 물었다.




“뭐 재미난 일 있었어? 혼자 웃게.”


“나?”




내가 웃고 있었나?




“아, 아니야. 별 일 없어.”




희는 얼른 이불을 끌어올리며 돌아누웠다.




“안 더워? 벌써 4월 된지도 한참인데.”


“안 더워. 아침엔 추워.”


“하여튼.”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나더니 기영은 불을 껐다.




“먼저 자. 나 씻고 잘게.”


“어.”






침실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희는 다시 바로 누웠다. 두 팔을 이불 위로 빼고, 희는 자신의 배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요의 스카라무슈가 이불 위에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 언제부터 함께 맞춰볼까.











댓글 '4'

위니

2006.11.15 13:42:50

오..이런 역시 현재는 그런거엿군요...교수님도??? 갑자기 생각나는 애기가잇어 잠깐 적습니다..전에 들엇던 애기인데 사교춤을 혼자배우는 여자가 거의바람이 나는 이유가 춤을추다보면 자기랑 딱맞는 파트너가잇다고합니다..그런 파트너가 나타나면 여자는 겉잡을수없이 빠져들게 된다고 그래서 사교춤은 혼자배우는게 아니라고...남편이잇는 여자는 꼭 남편과 같이 배워야한다는 말을 들은적이잇답니다..여기다 비교하는건 좀 우스꽝스럽지만...역시 교수님과 현재는 피아노를 치면서 가까워질꺼같군요...작가님 성실연재 감사합니다..^^

so

2006.11.15 15:53:10

위험해위험해...
무려 유부아닙니까!!;ㅅ;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저 뭐랍니까;;;

푸르르

2006.11.15 19:04:26

왠지 기대감에 설레이는 느낌으로 글을 보네요. 잔잔하지만 다음 전개가 어찌될까 기다려져요.

아침햇살

2006.11.17 06:22:09

위니님/ 춤바람.....ㅎㅎㅎㅎㅎ 그럼 이 두사람이 바람이 나면(...) 피아노바람? 건반바람? ㅋㅋㅋ 아, 저도 모르겠습니당~~ 어찌 될랑가요 ^^;;;

so님/ 갑자기 유부초밥이 먹고싶어졌어요...라고 하면 혼내실 건가요 ^^;;; 헤헤...

푸르르님/ 설레임...보답해드려야할텐데 걱정걱정...걱정이 태산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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