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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포르테 - # 3
“아, 선생님!”
문이 벌컥 열리며 현재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던 희는 고개를 들었다.
“진짜 죄송해요. 진짜로, 오늘은 안 늦으려고 했는데 버스가 너무 안와서요,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죽어라고 뛰어왔어요. 죄송해요.”
숨을 헐떡이는 그의 콧등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것이 보였다. 그래도 그렇지, 현재는 한 두 번도 아니고 매 시간 렛슨마다 지각을 하고 있었다. 희는 시계를 힐끔 보았다. 그래도 오늘은 10분 늦었으니 양호하네.
“자. 변명 그만하고 얼른 시작하자.”
“네.”
금요일은 학교에 나오지 않으려고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의 나흘에 열 다섯 명의 학생을 배정하다보니 많은 아이들이 수업이 없는 월요일 오전과 수요일 오전은 렛슨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월요일 9시가 바로 현재 렛슨 시간이었다.
“쇼팽 먼저 칠게요.”
“그러렴. 오늘은 쇼팽하고, 또...?”
“바흐 평균율이요.”
“그래.”
현재가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 피아노 위에 올려놓자 희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현재의 왼쪽에 놓여있는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피아노 의자의 높낮이를 조절한 현재는 악보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는 희가 빨랐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희가 악보를 집어들자 현재는 당황한 듯 했다. 악보를 넘기면서 희는 물었다.
“왜 안치고 그러고 있어. 바흐까지 보려면 시간 별로 없어.”
“저...악보 아직 다 못외웠는데요.”
현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희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희의 시선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심했다. 이 곡을 친지 벌써 3주 째였다. 아직도 악보 하나 못외우고 있다니. 연습을 하긴 한 건지. 고개를 푹 숙인 현재에게 잔소리를 하려다 희는 한숨을 길게 내쉬는 것으로 대신했다.
희는 악보를 던지듯이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다리를 포개 앉았다.
“자. 다음 시간까지는 외워 와.”
희가 악보를 주자마자 현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고맙습니다. 다음 시간까지는 꼭 외워 올게요!”
혹시라도 희의 마음이 변할세라 휙, 휙, 악보를 넘긴 그는 피아노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희의 손도 여자의 손 치고는 꽤 큰 편이었지만 현재의 손은 희의 손보다 더 컸다. 첫 음을 누르려던 현재는 희가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닫자 쑥쓰러운 웃음을 지으며 희를 쳐다보았다.
“악보는 못 외워도 손톱깎는 건 안 잊어버리는구나.”
희의 말에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짧고 단정하게 손질된 손톱.
“헤헤. 네.”
희의 화가 완전히 다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말하면서 현재는 활짝 웃었다. 손만 컸지, 역시 어린애였다.
“그럼, 칠게요.”
* * *
역시 쇼팽은 거의 연습을 해오지 않았다. 연습도 안한 것을 왜 먼저 치겠다고 했는지 희는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결국 시간이 부족해 바흐는 듣지도 못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하며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는 현재의 뒷모습을 보며 희는 ‘어쩌면 바흐는 더 엉망이라 쇼팽만 치려고 일부러 늦은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나가자마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다음 학생이 들어오는 바람에 희는 더 이상 현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 * *
“전화 왔어.”
“응?”
등 뒤에서 들린 기영의 목소리에 희는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밟고 있는 페달 때문에 화음은 아직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전화 받아.”
기영이 무선 전화기를 들고 다가오자 희는 페달에서 발을 뗐다. 기영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는 희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누군데?”
“너 학교 학생. 이름이 뭐래더라...하여튼 남학생.”
“아...”
남학생이면...현재? 전화기를 받으며 희는 시계를 보았다. 9시 뉴스가 끝날 시간이었다. 오늘 아침에 렛슨했는데, 무슨 일일까. 그것도 이 시간에.
“여보세요.”
“선생님, 저 이현재인데요. 밤늦게 죄송해요. 핸드폰 안받으시길래...”
“무슨 일이니?”
“제가 오늘 악보 챙기다가 모르고 선생님 악보를 하나 가져와버렸어요. 어떡하죠? 지금 발견해서...”
오전 레슨끝나고서부터 지금까지 피아노에는 손도 안댔단 얘기군.
“무슨 악보인데?”
“아...미요의 스, 스카라....”
“아...스카라무슈.”
발음하기조차 힘든 낯선 단어가 희의 입에서 유창하게 흘러나오자 현재는 쑥쓰러운 듯 웃었다.
“아, 네. 그거요. 죄송해요. 악보 급하게 넣다가 같이 넣었나봐요. 내일 몇 시에 학교 오세요? 아침에 가져다 드릴게요.”
“내일?”
당장 필요한 악보는 아니었다. 잠시 생각해보던 희는 말했다.
“목요일 11시, 알지? 다들 모이기로 한 거.”
“아...네, 네.”
“내일 올 것 없고 그 때 가지고 와. 그 날은 안 가져오면 안돼.”
“네.”
“그럼 목요일날 보자. 안녕.”
“네, 안녕히 계세요.”
“너, 남학생도 가르쳐?”
희가 전화를 끊자 그랜드 피아노에 팔꿈치를 기댄 채 희가 이리저리 흩어놓은 악보들을 뒤적이고 있던 기영이 물었다.
“어. 신입생 한 명.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어.”
“몰랐네. 너 남자애 가르치는 거 처음 아냐?”
“처음이야.”
희는 피아노 건반 뚜껑을 닫으며 기영에게 말했다.
“거기 악보 좀 줘. 내일 학교 가져가게.”
“어떤거?”
널찍하고 반질반질한 그랜드 피아노 뚜껑 위에 널려진 악보들을 뒤적여보던 기영이 고개를 들었다.
“아렌스키.”
“아렌...스키...?”
기영은 악보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건가? 투 피아노?”
“어, 맞아.”
희에게 악보를 건네고 기영은 다른 악보들을 한데 모아 쌓기 시작했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그런 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희는 건네받은 악보를 넘겨보았다. 그런 희에게 기영이 물었다.
“투 피아노? 이번 제자 음악회 때 치게?”
“응.”
희는 싱긋 웃었다.
“기억하고 있었네.”
“작년에 갔었잖아.”
무대 경험도 쌓을 겸, 애들 연습도 시킬 겸 해서 희는 매년 6월 종강 직후에 제자 음악회를 열었다. 시내의 작은 음악홀이나 학교의 콘서트홀을 빌려 여는 이 제자 음악회에서는 그녀의 제자들이 짧은 곡들을 하나씩 연주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는 희가 제자 한 명과 함께 피아노 2대를 놓고 듀오 곡을 쳤다.
“아렌스키라...얘도 러시아 애냐? 스키스키 거리게.”
악보를 다 쌓아놓은 기영이 피아노에 비스듬히 기댄 채 킥킥 웃었다. 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영이 물었다.
“올해는 이 곡?”
“아마도. 새로 들어온 애들이 윗학년 애들하고는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인사도 시킬 겸해서 목요일날 애들 다 모여. 그 때 제자 음악회 이야기도 하려구.”
희는 덧붙였다.
“벌써 4월이잖아.”
“누구랑 칠지는 정했어?”
“듀오 곡? 목요일에 정하려구.”
악보를 안고, 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해 가을에 큰 콩쿨이 있어서 듀오 곡 따로 연습할 만한 애가 있을까 모르겠어. 다들 그 콩쿨 준비하느라 바빠서.”
D신문사가 주최하는 음악 콩쿨은 우리나라에서는 최고 권위였다. 그 콩쿨의 피아노 부문은 격년제로, 올해의 지정곡은 마침 2년 전 다른 신문사 콩쿨에 지정곡으로 나왔던 곡인지라 그 당시에 이 곡을 연습했던 많은 학생들이 올해 D콩쿨에 도전하려 하고 있었다.
“듀오야 뭐,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칠 애 없으면 안하는 거고.”
어차피 나도 7월 독주회 준비하려면 바쁘잖아, 하고 희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방문을 나서는 희의 등 뒤로 기영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만 할거야, 연습?”
“어, 불 끄고 나와.”
* * *
“톡, 톡.”
초승달 모양으로 잘라진 손톱이 신문지 위에서 튀고 있었다. 높이 세운 베개에 기대 앉아 희가 손톱 깎는 것을 바라보던 기영이 불쑥 물었다.
“너, 손톱 길러본 적 없지?”
“어.”
“한 번쯤은, 길러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
“아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오는 희의 대답에 기영은 침대 발치 쪽으로 기어와서는 다시 물었다.
“그래도 대학다닐 때 여자애들 보면 매니큐어도 바르고 손톱도 길게 기르고 그러잖아. 우리 사무실 이정이 있잖아, 김비서. 지난 주에 보니까 손톱에 그림 그리고 왔던데 물어보니까 그런 거 전문으로 하는 데가 있대, 요새는.”
“그렇다더라.”
희는 대답하며 손톱깎기를 눌렀다. 톡. 흰 초승달이 신문지 위로 떨어졌다. 희는 고개를 들었다.
“뭐해? 안자? 피곤하다면서.”
어제 있었던 재판을 준비하느라 기영은 3주 정도 밤늦게까지 야근을 했었다. 막판에 사흘 정도는 밤을 샌 기영은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며 여섯 시가 되자마자 퇴근해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잘거야.”
침대 발치 쪽을 향해 엎드려 있던 그는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고 잘거야? 거꾸로?”
“아니, 그냥. 잠깐만 이러고 있게.”
신문지 양쪽을 들어올려 손톱을 모으며 희는 기영 쪽을 쳐다보았다. 불빛이 흐려서 그런지 얼굴이 좀 안되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요새 살빠졌지?”
“몰라.”
“얼굴 살 빠진 것 같은데.”
“몰라. 바지는 안 헐렁하던데. 나이 드니까 얼굴 살만 빠지나...”
“그러게. 너도 이젠 사십 대잖아.”
“하하...”
희의 말에 기영은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만 사십 대냐, 너도 사십 대잖아.”
“난 1월 생이잖아.”
희는 일곱 살에 국민학교를 들어갔다. 그랬기에 생년은 기영보다 일 년 늦었지만, 대학 학번은 같았다. 물론 대학 시절에는 서로를 몰랐지만.
“그래도 똑같아. 언제는 동갑이라고 우기더니 이젠 한 살이라도 어려지고 싶은 거야? 너나 나나 이젠 사십 대라고...”
아, 졸리다, 라고 중얼거리며 기영은 몸을 일으켰다. 팔꿈치로 이불 위를 기어가 다시 베개를 베고 기영은 눈을 감았다.
“불 끄자.”
“잠깐만.”
희는 화장대 밑에 있는 휴지통에 신문지를 털어넣었다. 신문지를 접어 휴지통 옆에 내려놓고 희는 침대로 올라왔다. 스탠드 줄을 잡아당기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은 어둠에 잠겼다.
두꺼운 겨울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던 희는 다시 이불을 가슴께까지 내렸다. 다음 주 쯤에는 봄이불로 바꾸어도 될 것 같았다.
아까 피아노 연습을 할 때부터 조금 이상했는데 한 쪽 어깨가 조금 아픈 것 같았다. 유학 시절 지긋지긋하게도 아팠던 어깨는 나름대로의 직업병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괜찮았는데 왜 또 아픈 거지. 내일 저녁에 지압 마사지라도 받으러 가볼까. 한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희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을 청하는 희의 귓가에 기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응?”
“......”
희의 되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기영은 끄응, 하며 희 쪽으로 돌아누웠다. 어깨를 주무르던 희도 몸을 돌려 기영 쪽을 바라보았다. 눈은 어느 새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
기영은 잠시 망설이는 듯 했지만 희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마흔이잖아.”
“......”
“너도 알겠지만, 여자가 마흔 넘어서 처음 임신을 하면 아무래도 힘들대. 산모도 힘들고, 아이도 힘들고. 삼십 대 중반만 넘어서면 한 살 먹을 때마다 점점 더 힘들어진다더라.”
가만히 기영의 말을 듣고 있던 희가 입술을 뗐다.
“.....어머니 전화 왔었어?”
“아니.”
“근데 갑자기 또 왜 그래.”
“너...정말 싫어? 아기 갖는 거?”
“싫다니까. 매일같이 애들 가르치고 연습하고, 꼬박꼬박 연주도 하고 그러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낳기만 하면 되는 줄 아니? 난 애들 잘 키울 자신도 없고, 지금 이 상태가 좋아. 너도 알잖아. 난 내 애들한테 신경써 줄 여력이 없다구.”
한참 동안 말이 끊겼다. 희는 다시 어깨를 주무르며 바로 누웠다. 그 때 기영이 말했다.
“너한텐...”
“......”
“아니다, 됐다.”
기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희는 가만히 기영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기영은 이불을 덮고 있지 않았기에 희는 기영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희는 다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희는 곧 잠이 들었다.
* * *
“아, 이런...”
어젯 밤부터 허리가 아파 예상을 하긴 했지만, 피가 비친 속옷을 보니 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생리대가 있던가. 화장실을 나와 희는 복도 끝에 있는 자신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302호 김 희 교수. 작은 팻말이 달린 방문을 열자 방음문 안 쪽에서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선생님-”
“다들 왔구나.”
낮은 소파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고 있던 학생들 몇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희를 보고 일어나며 인사했다.
“저희 방금 왔어요. 방 문이 열려있길래....”
“그래, 다 왔니?”
그 시간에 수업이 있다며 오지 못할 것 같다던 몇 명을 빼고는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속으로 숫자를 가늠하며 둘러보던 희는 현재가 없음을 알아챘다. 어디 제 버릇 남 줄까. 또 늦는군.
“아직 한 명 덜 왔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네.”
희는 피아노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생리대가 있을 터였다. 방을 나오는 희의 등 위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안왔지?”
“아, 현재가 안왔네요.”
“현재?”
“저희 학년에 남자애 있거든요.”
“남자애? 우리 선생님한테 들어왔어?”
“네. 제가 전화해볼게요, 언니. 얘 수업시간에도 맨날 늦거든요.”
화장실에 다녀와보니 이젠 모두 다 와 있었다. 가장 바깥 쪽 자리에 앉아있던 현재는 희를 보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현재의 무릎 위에는 그가 실수로 가져갔다던 악보가 놓여져있었다.
핸드백을 내려놓으며 희는 소파에 깊게 앉았다. 핸드백 안에 들어있던 생리대는 하나 뿐이었다. 그래도 이 모임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니 집에 갈 때까지는 괜찮겠지.
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다 모였네. 아직 서로들 잘 모르지?”
* * *
“그럼 세라 너는 드뷔시 치고.”
“네.”
“미진이랑 은혜는 어떡한다...?”
제자 음악회 때 각자가 칠 곡들을 정하다보니, 아이들이 지금 연습하고 있는 곡들이 정말 많이 중복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을 초입에 있는 D콩쿨에 많이 나가는 것은 물론, 여름 방학 중에 있는 E콩쿨의 지정곡은 삼 년 전의 이 대학 입시곡이었던지라 그 학번의 아이들은 전부 E콩쿨을 준비중이었다. 그래도 한 콩쿨마다 각각 여러 곡들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희는 제자 음악회 때 연주할 곡들을 겹치지 않게 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순서대로 배정하다보니 미진이랑 은혜에게 남는 곡이 없었다.
“그냥 앞에서 친 거 똑같은 거 칠까? 뭐, 어때. 어차피 너네 무대에 서긴 서야 돼.”
큰 연주나 콩쿨을 앞두고 무대에서 연주를 해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했다. 연주나 콩쿨 당일의 긴장을 미리 체험해봄으로써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바짝 긴장이 되기 때문에 연습의 효과도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희도 중요한 콩쿨을 앞두고는 꼭 무대에 섰었다. 개인적으로 작은 홀을 빌려 독주회를 하기도 했고, 지금은 정년퇴직을 한 희의 지도교수 제자 음악회에도 빠지지 않고 섰다. 그러한 연주 경험들은 희가 D콩쿨을 비롯한 각종 콩쿨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콩쿨에 입상함으로써 희는 입상자 연주회라던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등 또다른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그렇게 희는 그 세대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였기에 많은 무대에 자주 서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콩쿨에 입상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콩쿨들은 예산 부족을 핑계로 연주 기회를 마련해주지 않고 있었다. 또, 피아노 전공생의 급증으로 인해 오케스트라의 정기 연주회 오디션을 통과해 협연 무대를 갖는 것도 점차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연주 기회는 몇몇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다. 예전에 희가 그랬듯이.
“그럼 저는 안할게요. 미진이가 리스트 치면 되죠.”
4학년생인 은혜가 불쑥 말했다. 희는 은혜를 쳐다보았다. 은혜와 미진은 둘 다 D콩쿨을 준비중이었고, 이미 2년 전 D콩쿨에서 3위에 입상한 적이 있는 은혜는 그 덕에 올 해 콩쿨의 1차 예선은 면제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시 말해 다른 경쟁자들보다 준비해야할 곡이 하나가 적고 2차 예선부터 경쟁에 끼어들게 되니 그만큼 본선 입상의 확률이 높은 것이다.
“왜, 은혜 너도 무대 서 봐야지. 콩쿨 곡 쳐봐야 하잖아?”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사람도 많은데, 저까지 치면 음악회가 너무 길어질 것도 같구요.”
“그런 게 어디있어요, 언니. 저랑 곡이 겹쳐서 좀 그러시면 그냥 제가 하지 않을게요.”
신입생인 미진이 미안한 듯이 말했다. 희는 고개를 저으며 은혜에게 말했다.
“좀 길어지면 어때. 다들 무대에 한 번씩 서려고 하는 음악회인데. 둘이 똑같은 것 좀 치면 어때서.”
“아니예요, 저는 어차피 7월에 독주회도 하잖아요. S홀이요.”
“아...”
S기업은 기업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그 기업 소유의 음악홀에서 매년 몇 명의 유망주들을 데뷔시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은혜는 지난 봄에 있었던 오디션에 합격하여 7월에 독주회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럼...그럴래?”
“네. 그럴게요. 괜찮아요, 저는.”
“그럼 리스트는 미진이가 치는 걸로 하자.”
미진과 은혜의 문제가 풀리자 모든 아이들의 연주 곡목이 정해졌다. 희는 맞은 편에 앉아있던 현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보 가져왔지?”
“아, 네.”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갑작스런 희의 질문에 현재는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얼른 악보를 내밀었다.
“선생님, 그건 뭐예요?”
세라가 물었다.
“이거 미요인데. 스카라무슈.”
“네?”
희는 전화기 옆에 두었던 아렌스키의 듀오 악보를 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1학년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 제자 음악회의 마지막 순서는 듀오야.”
“듀오요?”
“나랑 누구 한 명이 칠 거야. 작년에는 은혜랑 나랑 루토슬랍스키의 파가니니 변주곡 쳤고.”
“아...”
“올 해는...미요나 아렌스키 중에 하나를 했으면 좋겠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악보를 바라보는 1학년 학생들의 눈들이 반짝였다. 맞은 편에 앉은 현재도 호기심어린 눈으로 악보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올해는 콩쿨이 많아서 지금 2, 3, 4학년들은 전부 콩쿨에 나가거든. 그래서 따로 듀오 곡을 연습할 여유가 없을 것 같아. 그래서 내 생각에는 1학년 중에 누가 좀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희는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 교육의 단점이, 맨날 솔로 곡들만 친다는 거야. 외국 애들은 대학에 들어가면 솔로 연습도 하지만, 듀오나 트리오 같은 실내악 연습도 얼마나 많이 하는데. 반주도 많이 하고. 앙상블 감각을 익히는 것도 중요해. 솔로 곡만 백날 쳐봐야 앙상블 감각은 못 익혀. 그러다가 갑자기 피아노 트리오라도 하게 되어봐, 계속 헤맬걸.”
희는 아름을 쳐다보았다. 1학년인 아름은 준비하고 있는 콩쿨이 없었다.
“아름이 콩쿨 안나가지? 아름이 해볼래?”
“저는 정말 하고 싶은데요...”
희가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자 아름은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요, 저 이번 실기시험 곡 치는 것도 좀 벅차서요...”
고등학교 때 쳤던 곡을 또 치면서, 무슨 연습 시간이 부족해.
희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래, 그렇게 맨날 했던 곡만 또 하고 그러면 당장 눈 앞에 닥친 시험이나 콩쿨은 잘 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곡들이 워낙 많은 피아노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자 무기라구. 애들이 왜 이렇게 생각이 짧을까.
대학 시절, 이 주일에 곡 하나씩을 떼고 넘어가며 레퍼토리를 늘렸던 희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놀다가는 대학 졸업하고 시집가서 애들 낳고 솥뚜껑 운전수나 하고 그렇게 살겠지. 그렇게 살려고 중고등학교 내내 죽어라고 연습하고 렛슨비 쏟아부었니? 그러기엔 너무 아깝잖아. 그런데 왜 대학만 들어오면 연습을 안 하는 거야. 좋은 대학만 들어오면 끝이야?
희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쭈뼛거리며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을 뿐, 제가 먼저 나서서 치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희는 악보 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럼 듀오는 하지 말자. 어차피 연주회 시간도 길고, 마땅히 할 만한 사람이 없어보이네. 다들 콩쿨 준비하느라 벅찰텐데.”
나도 듀오곡 렛슨하고 연습할 시간 아껴서 내 개인 독주회 연습이나 하지, 뭐. 차라리 잘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희는 악보를 다시 내려놓으려 했다.
그 때였다.
“제가 할게요, 선생님.”
“응?”
현재였다. 현재의 갑작스런 말에 모두들 눈이 동그래져 그를 쳐다보았다.
“듀오, 하겠습니다.”
“현재 너...”
희는 말을 멈추었다. 지금 현재의 연습 상태로는 학기 말에 있는 실기 시험을 무사히 치르는 것도 힘들어보였다. 그런데 듀오까지? 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리였다. 듀오라면 혼자 연습하고 렛슨받는 것은 물론 희와 함께 연습하는 시간까지 필요했다. 은혜나 은정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애면 몰라도, 실기시험 곡과 듀오를 병행하는 것은 현재에게는 무리였다.
희는 이해심많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듀오는 빼자. 현재 넌 바흐 치기로 했지? 바흐, 쉬운 곡 아니야. 만만히 보고 연습 안하면 안돼.”
웃는 얼굴이었지만 짐짓 엄하게 타이르며 희는 모임을 마치려고 했다. 아무래도 생리대가 불안했다.
“점심이라도 다같이 하면 좋은데, 내가 갑자기 점심 약속이 생겨서 학교를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다음에 내가 맛있는 것 살게. 그럼 오늘은...”
“그래도...”
하지만 잠자코 있는 듯 했던 현재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전 하고 싶어요. 열심히 할게요, 선생님. 정말 하고 싶어요.”
남편씨와 잘 되면 좋겠는데
현재가 윤활유가 되는지 휘발유가 되는지
엄청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