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피아노포르테 - # 2








"저...이것 좀 드세요."




방으로 들어온 현재가 꾸벅 인사를 하며 내민 것은 작은 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였다.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죄송해요."




한 학기가 지나면 다른 선생에게 쫓겨가리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인지, 넙죽 인사를 하며 음료수부터 내미는 그를 보니 희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잠깐 들어와서 앉지 그래?”




그가 내민 오렌지 주스는 금방 냉장고에서 꺼낸 것처럼 차가웠다.






*   *   *




그랜드 피아노 의자에 앉아 얌전히 두 손을 모은 채 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무척 앳되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몇 살이니?”


“네?”


“현역이야? 아니면 재수?”


“아, 현역이요.”


“그럼 스무 살이겠네. 좋을...때다.”




스무 살. 좋을 때다, 정말로.


그는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쪼갠다는 말이 정확할 정도로 웃고 있었다.




“너, 왜 그렇게 웃니? 뭐 좋은 일 있었어?”


“음, 그게요.”


“응? 왜 그래?”


“좋아서요.”




“응? 뭐가 그렇게 좋아?”


“교수님을 실제로 뵙다니... 그것도 모자라 교수님께 배울 수 있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줄줄이 읊어대는 그의 말에 희가 잠시 할 말을 잊은 동안,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교수님 연주회에 갔었거든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교향악 축제에서... 그 때 교수님, 그리그 협주곡 치셨는데, 정말....”


“그만, 그만.”




희는 그의 말을 잘랐다.


교향악 축제라니, 아마 이 대학 교수로 부임하던 첫 해 봄에 했던 연주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음악대학 역사상 최연소 교수라는 화려한 타이틀로 인해 많은 음악 애호가들과 평론가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었고 그로 인한 부담 또한 만만치 않았던 연주였다.




하지만 희는 보란 듯 그녀의 실력을 백 프로 발휘했었고, 그로 인해 희는 한 국내 음반사와 함께 쇼팽의 에튀드 전곡 녹음을 하는 기회를 잡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는 다른 사람들이 그 연주를 기억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그나 차이코프스키같은 화려한 협주곡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연주하는 베토벤 소나타를 기억해주기를 바랬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귀에 쉽게 들리는 그런 음악들을 더 선호했고, 두 시간 동안 집중하고 있어야하는 독주회보다 30분짜리 화려한 협연 무대를 더 기억했다.




협연이든 독주회든 희는 모두 다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화려한 테크닉을 뽐낼 수 있는 협연 무대보다 음악적 깊이와 해석을 보일 수 있는 독주회를 더 좋아했고 더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로서는 남들이 자신의 독주회를 기억해주는 것이 더 반가웠던 것이다. 그리그 협주곡을 연주했던 그 날의 음악회는 특히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녀에게는 오히려 그닥 반갑지 않은 기억이었다.




역시 이 애도 별 수 없군. 그렇게 생각하며 희는 물었다.




“고등학교 때는 어느 선생님께 배웠어?”


“중고등학교 내내 김성희 선생님께 배웠구요.”




D대학 김성희 교수. 예순 쯤 된 그녀는 자신의 연주 실력보다는 많은 어린 제자들이 국내 음악 콩쿨에서 많이 입상하기로 유명한,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훌륭한 음악대학 교수란, 제자들이 각종 콩쿨과 대학 입시에서 얼마만큼 해주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아주 우스운 것이었다. 희가 몸담고 있는 대학은 소속 교수들로 하여금 예술중학교와 예술고등학교로의 출강을 포함한 일체의 개인 렛슨을 금하고 있었다. 오로지 대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 그것이 김성희 교수가 있는 D대학으로부터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이 대학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희는 그가 내밀었던 오렌지 주스 병을 땄다. 딸깍,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잘 마실게, 라는 눈짓을 보내며 희는 다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좋은 교수님한테 배웠네. 그래, 그럼 요즘 치고 있는 것 한 번 쳐볼래?”


“아...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그랜드 피아노 쪽으로 돌아앉았다. 피아노의 뚜껑을 열고, 의자의 높낮이를 조정하던 그는 이내 두 손을 모으고 호흡을 고르는 듯 했다.




무슨 곡을 치려나. 남학생이니 파워는 좋겠어, 라고 생각하며 희는 현재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보통 키에 보통 체격. 피아노 소리가 피아니스트의 몸무게나 체격에 정확히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왜소한 체격보다는 어느 정도 몸집이 있는 것이 유리했다. 피아노는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악기였다.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온 힘을 건반에 쏟아부으며 한 번 연주를 하고 나면 온 몸이 파김치가 되곤 했다.




그 때, 첫 화음이 울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희는 피아노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 입시 끝나고는 사실 연습을 별로 하지 않아서요.”




그리고 그는 다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   *   *




희는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입시란 중고등학교 시절에 받은 모든 교육의 종착점이기에, 그 지긋지긋한 입시가 끝나고 합격 증서를 받은 순간부터 학생들은 놀기 시작했다.




매일 연습을 해야하는 음악 전공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연습을 쉬면 내가 알고, 사흘을 쉬면 매니저가 알며 일주일을 쉬면 관객이 안다던가. 하지만 하루에 열 두 시간씩 악기 연습을 하던 지난 날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대학 합격 발표로부터 입학 때까지의 두 달 가량은 악기와 담을 쌓고 지내는 기간이었다.




극소수의 예외가 있긴 했다. 정말 세계 최고의 연주자를 목표로 하는 그런 아이들은 늘 변함없이 연습을 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은 일 년에 한 두명 볼까말까였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첫 교수회의 때 교수들이 하는 이야기는 늘 그런 불만들이었다. 요새 애들은 어떻게 된 게 연습들을 안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그래 가지고 무슨 음악을 하겠다고...




그럴 때마다 희는 속으로 웃었다. 당신들은 어땠는데. 부모 잘 만나고 시대 잘 만나 지금 그 자리에서 교수랍시고 떵떵거리는 당신들보다는, 그래도 한 두달 놀긴 했지만 지금 애들이 훨씬 더 잘하고 더 열심히 해. 당신들, 그 애들 비웃고 혼내킬 자격 없어.




희는 대학 입시와 입학까지의 시기에도 입시 수험생처럼 피아노를 끼고 살았던, 몇 안되는 ‘괴짜’ 중 하나였다.




“뭐, 그 동안 힘들게 고생했는데 좀 놀아야지.”




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희의 주변에도 그런 아이들은 많았다. 아니, 대다수였다. 입시가 끝났다며 두어 달 동안은 피아노를 하루에 1시간도 안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실기시험이 닥쳐서야 부랴부랴 벼락치기 연습을 하고, 심지어는 악보도 다 외우지 못한 상태에서 실기시험을 보러 들어가기도 하는 그런 모습.




그런 친구들 속에서 늘 피아노를 끼고 살던 희는 늘 튀는 아이였다. 친구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희는 한 번도 외롭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때 희를 비웃던 아이들은 지금 희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아주 잘해야 대학 시간 강사, 예술고등학교 강사. 혹은 피아노 학원 원장. 그게 희를 비웃던 그들의 현재 모습이었다.




희의 말에 그의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희는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아무거나 한 번 쳐봐. 끝까지 못 쳐도 좋으니까. 얼마나 치는지 보고 싶어서 그래.”




그 때 머리 속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그래! 입시 때 쳤던 거 한 번 쳐볼래? 그래도 몇 달 동안 죽어라고 쳤을 텐데, 아무리 한참 놀았어도 기억은 하고 있을테니- 한 번 다시 쳐볼래? 물론 그 때보다야 못하겠지만...”




그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는 현재의 오른쪽에 서서, 희는 다시 말했다.




“뭘로 할까. 베토벤 소나타? 아니다,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한 번 쳐볼까? 작품 23의 5번.”




어느 새 피아노 건반에서 무릎 위로 내려와 있는 현재의 손은 역시 남자의 손답게 컸다. 짧게 깎은 손톱을 가진, 길고 섬세한 손가락.




“손도 커서 그 곡, 쉽게 쳤을 것 같은데. 한 번 쳐볼래? 앞부분 조금만.”


“...네.”




잠시 망설이는 듯 했지만 그는 이내 두 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첫 화음을 만들 희고 검은 건반들 위에 그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놓여졌다. 하지만 건반을 누르기 직전, 현재는 자신의 곁에 서 있는 희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제가 실기 시험 때 마지막 번을 뽑았거든요. 61번이요. 그래서 떨어질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마지막 번이 칠 때쯤 되면 선생님들이 너무 피곤하셔서 웬만큼 잘치지 않으면 점수 잘 안 주신다길래...”




아, 그래. 61번.


2점을 더 받을 수도 있었던 그 마지막 번호. 그게 너였구나.




- 내 나이가 조금만 더 어렸어도, 넌 떨어졌을 수도 있었어.




속으로 말하면서, 희는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그런 게 어디있어. 1번이든 끝번이든, 다 똑같아. 유리하고 불리한 것 없어. 잘 치면 점수 잘 받는 거고, 못 치면 못 받는거지.”




희의 웃음에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현재는 다시 피아노 건반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경쾌하면서도 가벼운 리듬의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꼭 두 달만에 듣는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이었다.






*   *   *






“있잖아.”


“응?”




수저를 내려놓고 식탁 한 쪽에 놓인 영양제 통을 열던 기영이 희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있지, 나 이번 학기에 좀 바쁠 것 같아.”


“왜?”


“신입생이 일곱 명이야.”




“일곱 명? 뭐가 그렇게 많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어.”


“원래 가르치던 애들이 몇 명인데?”


“여덟 명.”


“어휴.”




기영은 영양제 한 알을 삼켰다. 그리고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희의 앞으로 팔을 뻗어 영양제 한 알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축나지 않게 잘 챙겨먹어. 잊어먹지 말고.”






*   *   *






피아노 뚜껑을 닫고 일어서니 어느 새 들어온 기영이 팔짱을 낀 채 두툼한 방음문에 기대 서 있었다.




“깜짝이야.”


“내가 무슨 귀신이라도 되냐. 그렇게 놀라게.”




기영은 방 한 쪽에 있는 책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 찾을 거 있어?”


“내일 사무실에 책 좀 가져갈 게 있어서.”


“이 방 책꽂이에는 내 책들 밖에 없을 텐데. 악보랑. 저번에 책꽂이 정리하면서 내가 다 봤어.”


“그래?”




책꽂이 유리문을 열고 꽂힌 책들를 훑어보던 기영은 희의 말에 다시 유리문을 닫았다. 희는 그랜드 피아노 뚜껑 위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악보를 한데 모아 쌓기 시작했다. 베토벤과 리스트.




“잘 거지?”




희의 등 뒤로 기영이 물었다.




“응, 샤워 좀 하고.”


“나 먼저 잔다.”




기영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데 모은 악보를 피아노 의자 위에 올려놓고 희는 허리를 두드렸다. 주먹으로 가볍게 허리를 두드리며 희는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전등 스위치를 끄려던 희는 다시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기영이 꽉 닫지 않았는지, 책장 유리문이 열려 있었다.




유리문을 닫으려던 희의 눈에, 유리문 너머에 꽂혀있는 악보가 한 권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숙한 색깔의 표지.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내년에 낼 음반은 라흐마니노프로 해볼까. 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유리문의 나무 손잡이를 잡고 문을 꼭 밀어넣었다.




“탁.”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두 개의 책장문은 틈새 하나 없이 꼭 맞았다.




*   *   *






“자?”


“아니.”


“불 끈다.”


“그래.”




이불을 들추고 침대로 들어가던 희는 팔을 뻗어 침대 옆 협탁의 스탠드를 껐다. 순식간에 주위가 깜깜해졌다. 희가 이불 속을 파고들자 가벼운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가만히 누워있던 기영이 말했다.




“안 더워?”




추위를 안타는 것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위를 더 타는 기영은 한겨울에도 솜이불을 버거워했다.




“난 추운데. 아직 3월이잖아.”


“너 그렇게 추위 많이 타면서 보스턴에서는 어떻게 살았냐?”


“껴입고 살았지, 뭐. 목도리 칭칭 감고, 털모자 쓰고.”


“보스턴에서도 맨날 연습실에만 콕 박혀 있었던 건 아니고?”


“....”




잠시 말이 끊겼다. 가슴께까지 덮었던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면 안되나?”




또다시 적막이 흘렀다. 창 밖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집인지 손님을 치루고 배웅을 나온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갑자기 커졌다가 자동차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기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화났어?”


“....아니.”


“화난 것 같은데.”




희는 창문 쪽으로 돌아누우며 대답했다.




“아냐, 내가 뭘.”


“......”




또 말이 끊겼다. 창문에 친 커튼 너머로 아파트 맞은 편 동의 불빛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희는 눈을 감았다. 등 뒤로 기영이 말했다.




“내일부터 당분간 야근할 것 같아.”


“......”


“변론 맡게 되었어. 재판이 얼마 안 남아서 바쁠 것 같아.”


“무슨 사건인데. 얼마 안 남은 거면 그냥 하지 말지.”


“원래 김상식 선배 사무실로 갔던 사건인데, 선배가 너무 바빠서 우리 사무실로 넘어왔어.”


“...이길 것 같아 보여?”


“글쎄. 그건 해봐야 알겠지.”




옆으로 돌아 누워있으려니 어깨가 아파 희는 다시 바로 누웠다. 잠을 청하려는데, 기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강간범 변론이야.”


“......몇 살인데.”


“누가?”


“둘 다.”


“...셋이야.”




무어라 물으려다 희는 입을 다물었다. 기영이 말했다.




“가해자가 둘이야. 나이는 둘다 쉰 넷인가... 고등학교 동창이래.”


“......당한 애는.”


“열 둘.”


“......”




또 말이 끊겼다. 희가 말했다.




“어쨌는데.”


“뭐, 특별난 건 없어. 강간 사건이야 뭐 다 비슷비슷하잖아. 피해자랑 같은 동네에 살아서 원래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 애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그랬대.”


“......여태껏 어떻게 안 걸린 거야? 왜 이제야 잡혔어?”


“애가, 임신했어.”




희는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리고 빠르게 물었다.




“열 두 살이라면서.”


“요새 애들, 빠르잖아.”




희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애는.”


“애? 정신과 치료 받아.”




어두워 보이지도 않겠지만 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애 말고.”


“....아.”




기영이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지웠지. 그럼 어떡해. 열 두 살 짜리가 애를 낳을 수도 없고. 애가 애를 낳냐.”




또 말이 끊겼다. 기영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희가 말했다.




“그런 놈, 변론하고 싶니.”




희는 다시 창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누가 무죄랬나. 내 직업이 이건데 그럼 어떡하라고.”




들으라 하는 건지, 희의 등 뒤로 기영이 중얼거렸다. 희는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 9시에 이번 학기 첫 렛슨이 있었다. 늦지 말아야지.


그러나 기영의 손 끝이 어깨에 닿자 희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눈을 떴다. 기영의 손이 희의 어깨를 만지고 있었다.




“.......”




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옷 위로 기영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희의 잠옷 어깨끈이 밀려 내려갔다. 희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얇은 커튼 밖으로 비치는 하늘에 빨간 불빛이 지나가는 것이 비쳤다. 헬기인가.




기영의 숨이 드러난 맨 어깨에 느껴졌다. 그의 손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어제 사무실로 어머니가 전화했었어.




아침에 주차장으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에서 기영이 불쑥 말을 꺼냈었다.




- 왜?


- 정현이 돌잔치, 다음주 일요일에 형네 집에서 한 대.




결혼한 지 벌써 사 년째인데 좋은 소식은 언제쯤 들리겠느냐고,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기영의 어머니는 은근히 물었었다. 이미 중학생인 두 아이를 둔 기영의 형이 작년 늦둥이를 얻자 그 아기의 소식을 가장한 그녀의 물음은 더욱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기영은 둘 다 너무 바빠서요, 좀 더 여유가 생기면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기영은 아기를 원했다. 아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희였다.




난 아기 낳을 생각 없어, 연주하고 학생 가르치기도 바빠. 맞선을 보고 한 달 후 양가 상견례를 했던 날, 희는 말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기영은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덧붙였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생각해보길 바래.




그리고 몇 년 동안 기영은 아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모친의 은근한 압력의 횟수가 잦아지면서 기영도 조금씩 내색을 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올해, 기영이 마흔이 되자 기영 모친은 눈에 띄게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희는 기영과 동갑이었다.




아까 희가 주먹을 쥐고 가볍게 두드리던 허리를 기영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잠옷 밑으로 들어오자 희는 가만히 말했다.




“넌 지금 나보고, 그런 얘기를 듣고서 너랑 그 짓을 하라는 거니.”









댓글 '4'

so

2006.11.13 14:54:08

허허,,,
유부였군요.
게다가 나이가...현재의 딱 두배!
흐음... 망상이 마구 날뛰어서 걱정되요.^^;;;
그나저나 타이밍이 안 좋잖아! 남자란...
근데 '그 짓'이라니 상처받겠어요. 사이가 좋질 않군요..

위니

2006.11.13 21:28:32

남편과 사이가 별로인거같군요....so님 말씀처럼 저도 잠깐 요새 트랜드인 연상 커플 상상을 햇더랫습니다..나이가 두배이면 상당히 위험스럽..ㅎㅎ;;;
다음편도 기대됩니다 ^^잘보고갑니다...건필하세요

Junk

2006.11.13 22:01:08

음악계 쪽을 많이 아시는 분 같슴다. 대사들이...
참, 등업해드렸습니다^0^

아침햇살

2006.11.14 14:03:45

so님/ 마, 망상....ㅋㅋㅋ so님 댓글에 쓰러집니당 (근데 왜 제 가슴이 두근두근;;;;)

위니/ 2배인 커플..위험한가요? ㅋㅋㅋ ^^;;; 헤헤

Junk님/ 우왓, 등업까지. 감사해용~ *^^*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125 피아노포르테 (5) [3] 아침햇살 2006-11-17
124 묵람(墨藍) - (13) - secret [4] Miney 2006-11-16
123 피아노포르테 (4) [4] 아침햇살 2006-11-15
122 묵람(墨藍) - (12) - secret [4] Miney 2006-11-15
121 피아노포르테 (3) [4] 아침햇살 2006-11-14
120 묵람(墨藍) - (11) - secret [4] Miney 2006-11-14
119 천국과 지옥 (1) [3] 2006-11-13
118 천국과 지옥 (0) 2006-11-13
» 피아노포르테 (2) [4] 아침햇살 2006-11-13
116 묵람(墨藍) - (10) - secret [3] Miney 2006-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