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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 날이다. 출근이라고 명하기에는 조금 쑥스러운 감이 있지만, 윤주는 과감하게 그냥 출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부지런을 떨며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씻고, 젖은 머리카락도 사뿐하게 말렸다. 어쩌면 계속 서 있어야 할지도 몰라서, 옷은 편한 차림으로 골랐고 운동화를 신었다.



“엄마. 저 나가요.”



현관에서 소리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어젯밤 조금 반항적으로 군 것 때문인지 엄마는 서운한 표정으로 내내 말씀이 없으셨다. 확실히 어제의 사소한 말다툼과 동반되는 큰 소리는 언제나 말 잘 듣는 착한 막내딸이라는 역할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속없이 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가족들마저 윤주를 아무것도 못하는 만만한 백수로 취급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늘 벗어나고 싶었지만,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갑자기 용감해 진 것은 윤주에게도 놀랄 일이었다.



아직 간호사들도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윤주는 원장실 문을 빼꼼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저 나가요.”



진료 준비를 하시던 아버지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다가가니 지갑을 뒤져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셨다.



“아직 용돈 남아 있어요.”



불쑥 받기도 뭐해서 예의상 거절을 했더니, 다행히 한 번 더 권해주신다.



“힘들고 못 하겠으면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그만둬. 알았지?”



언제나 말이 없으시고 무뚝뚝한 아버지가 가족 중 윤주를 가장 어린애 취급을 하신다. 여태 놀고먹어도 아무 말씀 없이 봐주시는 것만 봐도 그랬다. 오빠나 언니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일. 대학원까지 지원해주시며 대학원을 마칠 때 즈음에 곱게 시집보낼 계획을 갖고 계신 아버지는 윤주가 생활전선에서 버티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계시는 듯했다.



오기가 끓어오른다. 절대 가족들의 예상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오기는 출근시간대 지하철의 혼잡함도 이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늦을 것 같아서 지하철에서 내려서는 숨이 턱까지 찰 정도로 달리다가 바람 때문에 앞뒤로 흔들리는 카페의 그림 간판이 보이자 발걸음이 느려졌다. 타박타박 한 걸음씩 신중하게 내딛으며 시계를 보니 늦지 않았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 찰나에 풍경소리가 들리지 덜컥 겁이 났다. 발걸음이 느려진 것도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 가게에서의 앞으로 일어날 일을 버텨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아서 순간 뒤돌아 다시 나가 버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혹에 약한지라 문고리를 잡고 열었던 문을 다시 닫으려는데 강한 힘이 방해를 했다. 눈에 보이는 커다란 낯선 이의 손이 문을 주욱 밀고 있었다. 윤주의 시선이 손을 따라서, 팔과 어깨, 목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야구모자 아래의 귀 옆으로 짧은 머리카락이 금방 칼질이라도 한 듯이 서늘해 보였다.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는데, 남자가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붙잡고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이유는 남자의 매너 때문이 아니라, 남자의 뒤로 보이던 가게의 모습 때문이었다. 테이블 위로 의자가 거꾸로 올라가 있고, 나무 바닥은 반질반질했으며, 창가자리에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먼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이곳은 다른 세계다.



윤주는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이공간으로 연결되는 뒤틀림이라든지, 프리즘같은 것이 있나 싶어 등 뒤를 힐끔거렸다.



“와~ 첫날부터 지각!”



깜짝 놀라 고개를 획 돌리고 앞을 보니 면접을 봤던 파마머리 남자아이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죄송ㅎ…….”



“아니야. 정각. 나보다 먼저 왔더라고.”



입 밖으로 사과의 말이 나오는데 야구 모자를 쓴 남자의 말에 도로 쏙 들어가 버렸다. 통화를 했던 그 남자라고 생각하기에는 목소리가 전혀 다르다.



“가방은 주방이나 창고나 아무데나 편한데 두면 되요. 사실 아침에 특별히 준비할 건 없어요. 전날 밤에 청소 다 하거든요.”



파마머리 남자아이가 재잘거리며 주방과 창고를 보여주었다. 어릴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역시나 22살이라고 하며, 금세 윤주를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은 오영빈이예요.”



“영식이.”



야구모자의 남자가 영식이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며 정정했다.



“사실은 영식이입니다. 이 형은 이준확. 아, 두 사람 동갑이겠다.”



“응. 그러네. 잘 부탁한다.”



준확의 엄해 보이는 눈동자에 윤주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준확이 형이 제대한 지 얼마 안돼서 아직 군인 티가 막 나요. 아직도 군인말투를 쓰지 말입니다.”



역시 전화를 받았던 그 남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조금 정신이 없었다. 준확은 주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고 윤주는 청소를 하고,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테이블을 정리를 했다. 거래처에서 조각케익이 종류별로 들어와서 쇼케이스에 조심스럽게 넣어두었다. 영식이 힐끔 힐끔 윤주를 살피며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이제 좀 앉아 있어요. 할 일 다 했어. 손님만 오면 돼요.”



영식이가 바 안에서 유리잔을 정리하며 손짓했고, 윤주는 마주 앉으며 메뉴판을 뒤적였다.



“메뉴가 별로 없네. 커피 종류도 많이 없고. 커피는 누가 만들어? 바리스타가 따로 있어?”



“아니. 우린 별로 전문적인 걸 안 좋아해서……. 커피는 기계가 만들고, 케이크는 납품받고, 식사는 안 해요. 전에 다른 커피숍에서 일해 봤는데 식사하면 일이 진짜 많아요.”



“그래도 식사 찾는 손님도 있을 것 같은데. 손님들이 항의 안 해?”



“대신 우린 빵 종류가 많아서 괜찮아요. 단골장사라서 식사 없는 건 대충들 알고 오는 것 같고요.”



윤주가 다리를 짤랑짤랑 흔들며 메뉴판을 뒤적이다가 다시 정리해 놓는 사이에 풍경소리가 먼저 들리고, 가게 문이 열렸다.



“첫손님이다. 주문은 누나가 받아요.”



영식이가 재빨리 속삭였다.



책을 옆구리에 낀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명의 여자가 창가 구석자리에 앉았다. 윤주는 잔뜩 얼어붙어서 영식이가 챙겨주는 물 잔과 메뉴판을 챙겨들고 조용히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다시 바로 돌아와 서서 창가를 바라보다가 손님들이 고개를 들고 윤주를 바라보자 주문을 받으러 다가갔다.



“주문하시겠어요?”



“예. 음……. 치즈케이크랑 딸기와플이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레몬홍차 하나요.”



윤주가 열심히 메모를 하고 나서, 주문을 확인해 주었다. 손님 중 한명이 윤주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물어왔다.



“근데, 원이 오빠 아직 안 나왔어요?”



“예?”



“하긴. 너무 이르다……. 오빠한테는 아직 새벽일 거 아니야.”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사이에 손님들은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윤주가 바로 돌아와서 주문을 전달하자 영식이가 주방의 준확에게 다시 전달했다.



“원이 오빠가 누구야? 손님들이 묻는데, 누군지 모르겠어.”



영식이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윤주가 찻잔을 준비하며 물었다. 영식이가 고개를 숙이며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속삭였다.



“우리 가게 이름이 왜 [wish]인지 알아요?”



“아니. 왜?”



“치즈케익 꺼내 와요. 갔다 오면 얘기해 줄게.”



영식이가 거만하게 요구했다. 윤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치즈케익에 상처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꺼내 접시에 담았다.



“형 이름이 [소원]이거든요.”



별것도 아닌 걸로 뻐기고 있다. 정말.



“성이 [소]고, 이름은 외자로 [원]. 그래서 [소원]. 그래서 가게 이름도 wish잖아요.”



“유치해. 자기 이름 따서 짓고.”



윤주가 그게 뭐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영식이가 웃었다.



“그럼 저 손님들이랑 아는 사이야? 오빠라고 부르던데.”



영식이가 대답을 하려는 사이에 주방에서 와플이 나왔다. 와. 와플이 너무 맛있게 보인다. 네모난 두장의 와플 위로 생크림이 올려지고 다시 그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새빨간 딸기가 넉넉하게 올려져 있었다. 영식이가 쟁반을 챙겨주며 갔다 오라는 고갯짓을 했다. 쟁반이 제법 묵직해서 넘어질까 봐 조심해서 걸어야했다. 음식을 내놓고 돌아온 윤주에게 영식이가 귓속말을 했다.



“원이형, 가수거든요.”



가수라는 말에 놀라서 윤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식이를 올려다보았다. 이름이 소원이라는데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안 유명해요. 안 팔려. 오늘 누나 온다고 일찍 나온다고 그랬는데 아마 점심때 지나야 올 거예요. 아침에 잘 못 일어나니까.”



윤주는 영식이의 말에 아무도 없는 문을 바라보고 말았다.



아……. 가수. 자동적으로 전화 목소리를 떠올렸다.




+

'소원'이라는 이름의 유례-
소지섭과 결혼하여, 원이라는 외자 이름의 아들을 갖고 싶어라 했던 한때의 로망 때문에...;;;;

아직도 등장하지 않는 남주. -_-;;


댓글 '3'

노리코

2006.08.22 23:19:51

으하하~
소지섭과 결혼하여 원이라는 아이~ (근데 동감가는 로망..크흑..-ㅁ-)

Cindy

2006.08.22 23:28:40

그 로망 참으로 남일 같지 않네요.. 저도 한때는~ (먼산..) ('' )a

하늘지기

2006.08.24 15:15:19

오호~
그런 식으로 이름을?
사실 나두 그런 적 있는데..ㅋㅋ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의 로망이었다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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