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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 좋아하시나 봐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입술을, 눈꼬리를 힘없이 터트리며 싱겁게 웃었다.
분명 똑같이 쓰여진 책 표지의 하얀 작가의 이름 때문일 것이다.




무슨 대답이 내 상황을 전할 수 있을까?



지독하게 까만 밤하늘을 오직 자신의 빛으로 밝히는 달. 반달처럼 굽어진 그의 눈을 제외하고 주위는 온통 까매졌다.



모두가 출근이다, 등교다, 어색할 정도로 한산한 것을 빼면 평범한 서점이다. 그것도 처음 오는 평범한 서점. 주먹을 조금 넘는 크기의 둥근 원이 움푹 패인 곳에 눈부신 할로겐 등이 반짝이는 대리석을 비춘다. 대리석이라 봤자 거의 대부분은 녹색빛을 띄는 푸른 카펫에 가렸지만. 특유의 기분 좋은 새 책 냄새가 가득한, 바로 위층에 위치한 커피 전문점에서 나오는 향긋한 커피 향이 끊이질 않는 그냥 그런 서점이다.




글쎄요.




특별히 이래서 이 작가를 좋아한다. 라는 매우 사생활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한 난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한다.



유명해서 그런가? 이 작가 작품이라면 다 싹쓸이 해가는 손님들 계세요. 무슨 명품 브랜드 구두처럼.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바코드를 따라가면서 눈으론 틈틈이 내 눈을 맞췄다.




제 쪽에선 이해하기 힘들어요. 정서차이랄까, 문화차이랄까, 한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아요. 거기다 대부분 반일감정이 있어서 아, 역시 일본. 이라는 감정도 여기저기서 들고. 미성년자한텐 특히 더 권하지 않는 책이에요.



한마디 대꾸도 없는 사람 앞에서 말하는 걸 그리 즐기지 않는다. 무시당한다는 느낌도 싫고, 억지로 맞장구 치는 어색한 분위기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몇 권씩 쌓인 책들 때문일까 몇 번씩 대답 없는 내 앞에서 말을 술술 이어갔다. 투철한 직업정신이다.




문장이 화려하면서 예뻐요. 아기자기한 느낌도 있고, 머릿속을 어지러울 만큼 엉킨 생각들을 찬찬히 풀어나갈 수 있는 작가로서의 재능도 보여요. 그게 가장 부러워요. 내가 너무 슬퍼서 그 기분을 캔버스에 그려낼 수 있는 사람, 원고지에 써낼 수 있는 사람. 여자들이 좋아하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냥 있어 보이는 문장도 그렇고요.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사가는 걸 거에요.




사람을 대하는 에티켓이라 생각한다.


어깨에 걸린 핸드백을 뒤적이며 지갑을 꺼내려던 난 결국 대답했다. 책을 좋아하는지라 다신 안 올 서점도 아니고, 괜히 매정한 여자란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걸 원하지도 않는다.


그냥 터지는 대로 술술 뱉었건만 놀란 듯 빤히 날 쳐다보는 그에게 비스듬히 입 꼬리를 올리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읽으셨어요?



소장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하얀, 까만 줄무늬가 그어진 목도리를 다시 고쳐 매고 롱 셔츠를 고쳐 입었다. 한참을 오랫동안 거울 앞에 서서 고민했던 스키니 팬츠도 생각했던 것보다 답답하지 않았다. 그냥 조금 불편한 청색 하이힐구두로 애꿎은 바닥을 긁었다.

아는 척한 거 창피해죽겠네.


조금 이를 들어내자 보조개가 쑥 들어갔다. 깊다, 남자치곤.

얼마에요?

집을 나설 때 행복해질 만큼 조용한 골목을 비추던 햇빛이 서서히 머리 위에 다다랐고, 그의 머리 위에 걸린 시계의 바늘이 어느새 12에 다다랐다. 평소에 마음에 뒀던 책들을 다 사버리자 하는 욕심에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렸다. 조금 조급해져 서둘러 대화를 끝냈다.



, 8만 3천원 입니다. 회원카드 있으신가요?



아뇨, 저 여기.



대충 대답해버렸다.




책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 하나 만드시면 굉장한 혜택들이 많아요. 할인도 되고……”




어제 이사 왔습니다. 하루를 꼴딱 새서 오늘 새벽에 겨우 짐 정리를 끝내고 드디어 집 같은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전 대구출신입니다. 아, 촌구석이라고 웃지 마세요. 경상도 사람들 엄청 억센 거 아시죠? 어쨌든 서울은 많이 어색한 곳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이 서점을 비롯해 편의점, 대형 할인마트 등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가게들을 지리적으로 다 알아볼까 합니다. 상경할 때 책이나 잡지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었던 터라 차라리 장만하자 싶어 1시간을 으레 짐작하고 온 서점입니다. 하지만 오늘 2시간이란 시간을 이 곳에서 써버렸네요. 덕분에 전 지금 해가 질 때까지 달려야 이 동네를 다 읽힐 듯싶습니다. 특별히 차라던가 오토바이가 없거든요.



긴 손가락을 보며 예쁘다. 라는 감탄을 끝으로 머릿속에 가득한 짜증을 정리했다.




카운터 위에 놓인 볼펜과 이름이나 전화번호 따위의 형식이 일정한 간격에 맞춰 적힌 종이가 내 쪽을 향해있었다. 종이의 맨 위엔 조금 더 굵은 글씨로
신규 회원 카드라는 제목이 달려있었다.




죄송하지만, 이런 건 관심 없어요. 특별히 할인이나 그런 혜택 받고 싶지도 않고요. 또 더 가까운 서점이 있다면 웬만큼 이 서점엔 올 일도 없을 것 같고요. 더욱이 이럴 시간이 없거든요.




선천적이라 하기엔 너무 예쁜 곱슬머리를 왁스 따위의 헤어 제품으로 깔끔하게 세워 하얀 이마가 드러나있다. 유난히 예쁜 쌍꺼풀이 지거나 눈이 큰 것도 아닌데 옅은 속 쌍꺼풀이 진 눈은 굉장히 눈을 끈다. 그저 건조하지 않은 건만으로 완벽을 이루는 입술, 가끔씩 웃을 때마다 보이는 보조개는 여자인 나로선 부러워하지 않을래야 안 부러워할 수가 없는 옵션이다. 혹시 눈썹 정리하세요?
여자친구 있어 보이는 눈썹 위를 긁적이며 그는 당황한 듯 웃어 보였다.




이 근처에 서점은 이 곳밖에 없어요. 대여점은 많지만 까다로운 신규등록 웃으면서 지켜보실 성격도 아닌 것 같고요. 그리고 여기 적힌 칸에 다 적으실 필요 없어요, 앞에 별표 된 문항에만 적어주시면 되요. 이건 몇 시간씩 걸리는 것도 아니고 몇 십분 걸리는 것도 아니고요. 무엇보다도 제 생각에 제가 이렇게 집요하게 말을 걸고 신규 회원등록을 권하는 이유는 앞에 서계신 여자분께 관심이 많아서 인 것 같은데요.




댓글 '4'

Jewel

2006.05.15 00:38:11

뭔가 제목처럼 아기자기한 느낌이 드네요^^

노리코

2006.05.15 07:49:05

으하하하.. 남주 귀엽삼~ ㅋㅋㅋ

위니

2006.05.15 11:14:49

기대됩니다.
읽는 재미가 솔솔한 글인대여..
정말 아기자기 해서...작가님 담편도 얼릉..^^

Rain

2006.05.15 22:31:32

얼마만에 읽는 새글인지....넘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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