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20




흘러나오는 음악 첫 소절만 듣고 예나는 생각했다.


‘망했다.’


분명히 문을 들어서면서 들렸던 음악은 예나가 처음 들어보는 음악이긴 했지만 박자와 멜로디를 곧 따라할 수 있는 익숙한 패턴의 음악이었다. 그런데 영주님이 첫 춤을 안주인과 추기 위해 연회장 한가운데로 가고 나서 흘러나온 음악은 아주 느리고 장중한데 도저히 그 박자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익숙해지면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너무 낯설어서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예나는 엄마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만약 모르는 음악이 나오거나, 알더라도 아주 어려운 음악일 때에는 리드하는 남자와 눈을 맞추고 호흡을 맞추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예나는 얼굴을 들고 가면 뒤의 눈에 집중했다. 수장이며 오랜 세월 동안 이 춤을 췄을 영주님을 믿고.


영주님도 걱정이 되는지 계속 예나 쪽을 살피는 것 같았다. 양손바닥을 편 후 예나의 왼손과 오른손을 그 위에 올려놓으라고 눈짓했다. 그리고 박자를 재 주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춤 또한 본 적이 없는 춤이었다. 서로 연회복을 입고 임하고 있지만, 이것은 신관의 옷이라든가 아주 단순한 옷을 입는 게 어울릴 것처럼, 느리고 단순하면서도 다음 동작을 예측하기 어려운 춤이었다. 손과 손을 마주 댔다가 서로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을 뻗었다가, 천천히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손과 손을 마주 대고……. 보통은 네 마디 정도면 다시 춤이 돌아올 텐데, 열두 마디는 되어 보였다.


예나는 열심히 영주님을 따라했다. 초반에 몇 번 발을 밟기는 했지만, 같은 마디가 세 바퀴 돌 때쯤에는 익숙해져서 그럭저럭 출 수 있었다.


그때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예나는 즐겁게 춤을 추었다. 무척 즐겁게. 처음 춰 보는 춤인데도 낯설지가 않았다. 그토록 느리고 단조로운 춤이 즐거우리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 게다가 춤에 익숙해지는 속도 또한, 처음 추는 춤이 아니라 예전에 배웠다가 잊어버린 춤을 기억해 내는 것이나 같았다. 아니, 정말로 그랬다. 예나는 이 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단조롭게 열두 마디를 되풀이하던 춤이 갑자기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 빨라졌을 때, 영주님을 보지 않고도 예나는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또한 세 번째 국면으로 넘어가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가 서로에게 팔짱을 끼고 파트너를 바꾸어 가면서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원래의 파트너로 돌아오는 타이밍도 완벽하게 잡았다. 파트너로 나왔던 밤들은 제각기 가면 밑으로 웃으면서 잘한다고 칭찬했다. 잘한다고 칭찬하기 싫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턱 모양이 영락없이 세르자크였다.


춤을 추면서 예나는 안주인이 중요한 이유 하나를 깨달았다. 이 춤은 본질적으로 남녀가 일대일로 추는 춤이 아니었다. 여자 한 명이 여러 남자들 사이를 오가면서 상대해 주어야 하는 춤이었다. 아주 오래된 춤인 듯 밤들은 여유롭게 딴 짓을 해 가면서 춤에 참가했는데, 그걸 보면 오래전부터 여자가 적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여자를 위한 춤이었고, 예나가 안주인으로서 춤을 마치면 다섯 명의 여자 중 한 명이 그 역할을 이어받을 것이었다. 가장 왼쪽에 앉아 있었고 박쥐 모양 가면에 은테를 두르고 은으로 만든 꽈배기 모양이 특징적인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일어서서 준비하고 있었다.


예나는 한 바퀴 돌아서 영주님 앞에 섰다. 영주님이 먼저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인사할 때라는 걸 알았다. 약간 늦었지만 이상하지는 않을 정도로 맞춰서 인사를 나누고 나자, 딱딱하게 굳은 영주님과 마주하게 되었다.


“영주님?”


다음 차례인 여자 밤이 뒤에 와서 부채를 펴 들 때까지, 밤들이 조금씩 술렁일 때까지, 악단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계속 들려오던 음악이 계속 같은 마디를 반복하면서 사실상 나아가지 않고 멈출 때까지 영주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이 몹시 일렁거려서, 예나는 한순간 달이 온 하늘을 채우던 그 밤의 일이 떠올랐다.


“영주님? 왜 그러세요?”


예나가 뒤로 물러서도 영주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신이 돌아온 것 같지도 않고 눈빛도 변하지 않은 채 영주님이 입을 열었다.


“아니. 조금 있다 이야기하자.”


물기가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가슴 깊은 곳에 빠져서 메말랐던 목소리를 억지로 입까지 끌어 올린 것 같았다. 그 기묘한 목소리와 가면이 합쳐지자 갑자기 예나는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그 영주님이, 자기가 알던 그 영주님이 아니라 다른 존재 같았다.


예나가 조금 더 물러난 틈으로 뒤에 대기하고 있던 여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음악이 다시 흘러갔다. 예나는 어중간한 곳에서 걸리적거릴까 봐 더욱더 뒤로 물러났다. 영주님의 눈빛이 가면을 뚫고 쫓아왔다. 예나는 그 눈길만이 아니라 영주님이 쫓아올 게 두려운 듯 뒤로 돌아섰다.


하지만 더 두려운 상대가 앞에 있었다. 얼굴을 반만 가린 네체르가 앞에 서서 웃으며 팔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세가 영락없이 춤을 청하는 것이어서 예나는 잠시 망설였다. 평소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거절할 수 있지만, 지금은 연회 중이었다. 게다가 기다리고 있던 듯 손을 내미는 것을 보면, 네체르는 다음 춤 상대로 모두에게 공인받은 게 분명했다.


예나는 할 수 없이 손을 내밀어 네체르에게 응했다. 네체르는 특유의 매끈하고 흠 없는 웃음을 지으며 예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읍.”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예나는 비명을 삼키느라 바빴다. 네체르는 빙긋 웃음을 띄운 채로 태연히 춤을 리드하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님과 춤을 출 때에는 그렇게 딱딱 맞았던 박자가 네체르와는 엇박자로 엇갈리면서, 예나가 네체르 발을 밟든지 네체르가 예나 치마를 밟든지 둘 중 하나가 계속 일어났다. 네체르는 미안하다는 듯이, 난처하다는 듯이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예나는 분명히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랜 세월 똑같이 추어 왔을 춤을 갑자기, 그것도 수장 다음의 지명도를 가진 자가 계속 실수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정말 미안하군요. 누구처럼 참아 가면서 춤을 추는 성격이 못 되어서. 이만 들어가서 앉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전히 드레스 자락을 살짝 밟으면서 네체르가 말했다. 예나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전에 살기로 예나의 목을 조였을 때처럼 눈빛을 풀고 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예나를 손아귀에 틀어 쥐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예나는 마음속에서 다시 한 번 한 바퀴 돌아 보았다.


‘나는 연회의 안주인이야.’


옷이, 안주인이라는 역할이 나의 가면이다.


“들어가서 앉는 이유가 그대의 무례를 사과하려는 뜻이라면 받아들이지요.”


“무례라고?”


처음으로 네체르의 미소가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 예나는 그처럼 대처할 바를 몰라서 허둥대며 간신히 가면을 유지하고 있는 네체르의 모습이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이제까지 어떤 사람에게서도 무례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는 건 아닐까? 이자의 강력한 힘과 여유를 보았을 때 그런 가능성도 충분했다. 예나는 짐짓 더욱 순진하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자신이 저지른 무례를 가리려 해도 모자랄 텐데, 제게 설명까지 받으려 하시다니요. 그대는 그렇게까지 무례한 사람이 아닌 줄로 알고 있습니다.”


네체르의 얼굴에서 어이없다는 표정과 당황한 표정이 교차했다. 가면을 쓰지 않고도, 그가 미소를 지으면 저절로 얼굴에 떠오르던 흠 없는 가면이 깨어지고 있었다. 예나는 놀라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네체르가 손을 뻗어 자신의 가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평정을 유지하려고 몹시 애쓰면서 예나에게서 물러났다.


“미안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 말에 예나는 몹시 안심했다. 네체르를 그렇게나 밉살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네체르가 가면이 깨져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몹시 불편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직전에 영주님도 심상치 않게 굳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두 현상이 왜 연결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대라면 또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세르자크, 내 대신 이분을 모셔 드리게.”


예나는 잠시 눈 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지만 다시 한 번 나는 연회의 안주인이라고 되뇌며 뒤로 돌아섰다. 여전히 뻣뻣하게 입을 닫은 세르자크가 손을 내민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싫어하는 티를 줄줄 내고 있음에도 세르자크의 태도는 너무나 정중해서, 오히려 아무리 정중하게 행동을 해도 상대를 비웃고 있는 듯한 네체르보다 어떤 면에서 나았다. 세르자크는 거만할 땐 거만하게, 정중할 땐 정중하게, 알기 쉬운 사람인 것 같았다.


“계속 춤을 추시겠습니까?”


그리고 처음 듣는 세르자크의 존대말. 예나는 참으려 했지만 입 끝으로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뇨, 앉아서 쉬었으면 좋겠네요.”


“그대의 뜻대로.”


고개를 숙여 보이며 세르자크는 예나의 손을 팔 위에 얹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들어오자마자 춤을 추라는 닦달부터 당해서 뭐가 있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터라, 비록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세르자크일지라도 조금 기뻤다.


과연 조금 옆으로 가자 소네틴과 파울이 만들고 미오리타가 장식했을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예나는 그 냄새와 양에 압도당해서 하마터면 안주인의 탈을 벗어 던지고 음식으로 달려들 뻔했다. 새끼양 갈비, 소시지와 감자 통구이, 샐러드, 과일, 얇은 흑빵과 폭신한 하얀 빵과 바삭한 튀김들이 한껏 맛있어 보이도록 흐드러지게 차려져 있어 세르자크 몰래 침을 삼켜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거기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누구든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포크와 꼬챙이를 꽂은 채, 음식들은 그대로 식어 가고 있었다. 밤들은 손에 저마다 입맛에 맞는 술을 들고 있을 뿐, 음식을 든 사람들은 없었다.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진 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밤, 서로 얼굴을 맞댄 시간이 너무나 길었던 밤들은 이제 음식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없는 모양이었다. 대신 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갈구만 남아서 그나마 입을 축이는 모양이었다.


예나는 새삼스럽게 연회장을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활기차고 귀여워 보이는 이 ‘밤’의 연회 뒤편에 있는 음울하고 복잡한 관계도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제 영주님의 파트너였던 여자가 다른 밤들 사이를 팔짱 끼고 돌고 있었다. 밤들의 분위기는 참으로 묘하고 나른해 보였고, 이 춤은 춤이 아니라 마치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깊게 팬 상처를 두고 절룩거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끼리 함께 같은 방향으로 절룩거리는 의식 같았다. 갑자기 눈 밑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흐려져서 예나는 뒤로 돌아섰다. 참 이상하다. 요 며칠 사이에 별것도 아닌 일에, 별로 감정을 이입할 필요가 없는 일에 자꾸 기분이 왔다 갔다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한다.


“천한 것?”


이런 때에는 세르자크가 도발하는 것이 고마울 정도다!


예나는 붉어진 눈으로 확 고개를 돌려서 세르자크를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잠깐만. 그대를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세르자크가 장갑 낀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가면 속에서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최근에 천한 것이라고 부르던 인간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가 맞는지 헷갈려서 혼잣말한 거요.”


예나는 다시 기운이 빠져 버렸다. 오늘 세 사람의 남자가 연속으로, 이제까지 안 보여 주던 모습을 보여 주니 놀라다 기운이 다 빠져 버린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메마른 영주님, 가면이 깨진 네체르, 정중한 세르자크. 아무리 가면의 연회, 가면의 밤이라지만 이런 건 좋지 않다. 만약 오늘이 끝나고 내일이 와서 지금까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세 사람을 다시 보게 된다 해도, 이전까지와 같은 눈으로 볼 수는 없을 테니까. 평소의 모습을 진실이라고 알고 있다가 언제고 이런 모습이 떠오르면 눈앞에 있는 사람의 진심을 의심하게 될 테니까. 예나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부르던 천한 것이 제가 맞습니다.”


“흠.”


세르자크는 한숨처럼 한마디하고서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아무리 가면을 썼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까 싶을 정도로 이상했다. 세르자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길게 길게 말하는 게 특기가 아니었던가?


“왜들 그러는 거죠?”


“내가 또 무언가 실례를 저질렀습니까?”


“그런 거 말이에요, 그런 거! 왜 그렇게 정중한 거죠?”


“연회의 안주인에게 정중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세르자크는 천한 것을 상대로 할 때에나, 천한 것이 자기의 심기를 건드렸을 때에나 그렇게 말이 많은 작자란 말인가? 네체르를 만났을 때 돌변하던 태도를 보아하건대 그저 상대 따라 마구 태도를 바꾸는 작자일지도 모른다. 지금 기분이 이상하고 찝찝한 것은 그저 오늘 여러 사람이 이상한 태도를 보여서일 것이다. 연회 직전에 일어났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뭔가를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해요.”


“뭐가 말입니까?”


“아무리 안주인이라서라고는 해도, 그쪽 태도가 너무 바뀐 것도 그렇고, 영주님도, 네체르란 사람도 오늘 따라 다른 때와 다른 반응을 보여서 이상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하필 세르자크에게 이런 식으로 투정부리는 말투로 말하고 있는 나도 이상하고.


예나는 계속 불안정한 기분으로 치마를 만지작거렸다. 연회장에 있는 밤들이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곳을 맘대로 떠날 수도 없었다. 빨리 영주님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당당하게 무례한 자를 물리치던 가면은 어디다 벗어 놓고 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일 뿐인지도 모르지만.”


세르자크의 말에 예나는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눈물까지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예나는 세르자크에게 고개를 돌려서 세르자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까지 약간 의심했던 것이긴 하지만 오늘의 그대는 확실히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영주님이 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누굴 닮은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면 그리 닮지 않은 것도 같고 해서.’


“누구죠?”


“오즈리크.”


예나는 갑자기 심장이 자리를 이탈하는 듯한 기분에 가슴께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꾸 맴도는 그 사람의 이름이 독처럼 온몸에 퍼져나가는 듯한 이름이었다. 왜 그 이름이 계속 들리고, 맴돌고, 이렇듯 괴롭히는 걸까? 왜?


예나는 제대로 숨을 내쉬지도 못하면서 작게 말했다.


“낮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들었어요.”


“낮?”


“그냥, 비유적으로 말한 거예요. 영주님이나 당신 같은 사람들을 밤이라고 할 때, 그 반대 종족 말이에요.”


“아아. 맞습니다. 별로 잘나거나 용감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낮과 같은 여자였다고 기억합니다. 모욕을 받으면 금방 화를 냈고,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할 줄 아는 여자였지만, 보통 때에는 어이 없을 정도로 실수 투성이에 놀리는 보람이 있는 여자이기도 했죠. 무엇보다도 생명력이 넘쳐 나서 눈에 잘 띄었죠.”


“그 사람이 영주님과 관계가 있었나요?”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을 가장 답해 주지 않을 것 같던 사람에게 하다니, 정말 이상한 밤이었다.


세르자크는 약간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네.”


“어떤?”


“그녀는 아드리아누트의 연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지요. 결국 아드리아누트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귓가에 높고 찢어질 듯한 이명이 들리더니,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예나는 혹시 정말로 음악이 멈춘 건 아닐까 둘러보려고 했지만, 고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세르자크의 목소리만이 계속, 자장가처럼, 시 낭송처럼 나지막이 들려왔다.


“결국 네체르도 오즈리크를 구하지는 못했었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하면 낮의 수장이면서 순전히 아드리아누트 때문에 밤으로 귀화했는데, 오즈리크를 죽이는 순간 아드리아누트와 원수가 되었지요. 그래서 결국 지금도…… 왜 그러십니까? 괜찮아요?”


세르자크가 예나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예나는 누군가가 흔들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거기에 저항할 수도, 답할 수도 없었다. 계속 찢어질 듯 귓속을 파고드는 고음 때문에 정신이 없고, 몸이 뜨거워지면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도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뜨거운 것만이 아니라 온몸이 불에 휩싸인 것 같았다. 예나는 노랗게 빛나는 자기의 손을 보았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연회장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데, 왠지 예나 눈에는 그 금 사이로 빛이 퍼져 나올 것만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밤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즈리크다!”


“오즈리크야! 저 여자가 오즈리크야!”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움직여 주위를 보려고 하는데, 온통 세상은 까맸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형형하게 빛을 발하는 밤들의 눈들뿐이었다. 예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너무나 절실하게,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갈망만이 온몸을 휩쌀 뿐,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을 가르는 금이 점점 넓어지면서 그나마 서 있을 수 있던 균형마저 깨졌다. 오즈리크라는 단어가 계속 귓속을 울리는 가운데 밤들을 가르고 영주님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누군가가 영주님 앞을 가로막았다. 영주님 앞을 가로막은 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네체르가 웃고 있었다. 영주님이 허공에서 빛을 불러냈다. 그 순간 예나의 발 밑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예나는 불타는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

 안녕하세요!
 드디어 내용상의 절반입니다.
 이제 펑펑펑만 남았네요오~~
 연재 주기 지킬 수 있도록 격려 좀 부탁해요 ㅠ_ㅠ
 집에 자정 전에 들어가기가 너무 힘듭니다.


댓글 '6'

미르냥

2006.01.12 05:37:14

오오..드디어 자각인가요?
화이팅입니다~
너무 기다려져요.
감기 조심하시고, 건필하셔요~

ps. 진산님 홈피에서 본 trpg 의 제목 중에서 끝없는 밤이라는
뱀파이어물이 있던데요, 그것과 관련있는 것인가요?;

둥글레

2006.01.12 10:34:05

자하님! 힘내세요. 월,목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잖습니까?
우리의 기를 모아서 드릴께요. 이이--앗

자하

2006.01.12 11:32:12

미르냥/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
둥글레/ 이얏! ㅠ_ㅠ/

Junk

2006.01.12 12:15:12

헉, 예나의 운명은...?

애플

2006.01.12 14:45:46

네체르 도대체 무슨짓을?

hyoso

2006.01.12 20:24:15

호오 네체르는 연적이었던가요?^^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95 [끝없는 밤] #24. 기원 [4] 자하 2006-01-31
94 야만유희(野蠻遊戱) <1> [20] Junk 2006-01-28
93 [끝없는 밤] #23. 반역자 [4] 자하 2006-01-23
92 [끝없는 밤] #22. 어둠의 조각 (2) [3] 자하 2006-01-19
91 [끝없는 밤] #21. 어둠의 조각 (1) [3] 자하 2006-01-16
» [끝없는 밤] #20. 가면 뒤의 진실 [6] 자하 2006-01-12
89 [끝없는 밤] #19. 가면의 연회, 연회의 가면 [2] 자하 2006-01-08
88 [끝없는 밤] #18. 예나의 자리 [4] 자하 2006-01-05
87 [끝없는 밤] #17. 희생자 [2] 자하 2006-01-02
86 얼음에 마비되다 : Chapter 17 - 048 [28] Junk 2006-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