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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날갯짓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잠시 후 그쳤다. 예나는 그 사이에 팔짝팔짝 뛰어서 드디어 주둥이 끈을 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너무나 크게 목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떨어질 뻔했다.
“구했습니까?”
간신히 끈을 놓치지 않고 허리까지 밖으로 빼는 그 사이에, 낮은 목소리로 대화가 오가는 게 생생히 들렸다. 소리가 워낙 이상하게 들리는데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들도 주의한 것인지 억양과 말투에 고저가 없어 누군지 알아듣기는 요원했다. 그러면서도 뭔가 익숙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딱 꼬집어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지 않았다.
“구했지.”
“이제 어쩌지요?”
“미리 그곳에 갖다 놓기만 하면 된다고 하네. 그러면 알아서 반응할 거라고.”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유인하느냐인가……. 일단 누가 보기 전에 들어가지요. 그쪽이 나갔다 온 걸 누가 눈치 채면 곤란하니.”
“봐도 눈치 챌 리 없으니 걱정 말아.”
그리고 잠시 짧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나갔다 왔다는 사람이 무시무시한 변장을 했고, 상대에게 그걸 보여 준 모양이었다. 예나는 그거라도 보기 위해서,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라도 보기 위해서 열심히 카일라의 주머니를 나와 옷으로 옮겨 ‘탔다’. 어려서 숲에서 자라면서 예나는 숙녀로서의 교육도 받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무 타기, 땅 파기, 덫 만들기 같은 궂은 일도 많이 했다. 평소에는 구김살 하나 없는 숙녀 노릇을 시키다가, 필요할 때만 집안에 하나뿐인 날랜 어린아이로 둔갑시키는 엄마의 태도에는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마을에서 살면서는 장소도 그렇고 나이도 그런 일을 하기는 민망할 만큼 먹어서 그때 일은 다 잊은 줄 알았다. 하지만 카일라의 조끼 단추에 답삭 매달리면서 예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몸이 기억하고 있잖아! 아직 쓸 만한걸?’
“헉, 뭐 하는 거야, 에나!”
망했다.
카일라가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고 지른 소리에 이렇게 생각한 건 예나만은 아닌 듯했다.
“잡아요!”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다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카일라는 얼른 일어나더니 단추를 잡고 매달린 예나를 손으로 꼭 쥐었다.
“꽉 잡아!”
“뭐, 뭐야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앗!”
카일라가 다다닥 뛰었다. 카일라의 가슴에 매달려, 그 조끼에 달린 단추 몇 개에 매달려서 지탱하기에 버거울 정도로 빨리 뛰었다. 희미하게 먼 풍경처럼 문루와 문루에 달린 거대한 쇠사슬이 보였고, 다음 순간 성의 안마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예나는 그 풍경이 언젠가 꿈에 보았던 눈밭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다가 퍼뜩 자기의 상태를 깨달았다.
허공에 떠 있다!
그리고 뒤로부터 다시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이 들렸다. 카일라가 흘끗 고개를 돌리기에 따라서 그쪽을 보았더니 거의 카일라 키보다 더 길 것 같은 날개를 펴고 커다란 매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고 있었다. 아니, 바로 뒤까지 쇄도했다.
예나는 어찔한 느낌에 단추를 놓칠 뻔했다. 카일라가 왼쪽으로 휙 한 바퀴 돌면서 무언가를 힘껏 박찼다. 그리고 안마당이 갑자기 쭈욱 확대되면서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예나는 속이 울렁대다 못해 뒤집히는 느낌에 우는 건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몸 안의 것들과 피부가 분리되어서 각각 위아래로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압력이 전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카일라가 더욱 예나를 꼭 쥐고, 어지러워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에 예나 또한 꽉 매달렸기에, 정신을 차렸을 때에 예나는 아직 카일라의 품에 있었다.
“으악!”
그러나 다음 순간 다시 또 온몸을 쩌르르 울리는 진동에 예나는 토할 뻔했다. 바닥에 내려앉으면서 카일라와 온 땅의 압력이 모두 전해져 오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그 느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카일라가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돌아보지 마!”
카일라가 예나를 더욱 꾸욱 누르면서 말했다. 예나는 도대체 뭘 돌아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카일라의 품에 안겨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무엇을?
하지만 뭔가 어두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고 있는 카일라의 뒤편으로 무언가 커다랗고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 덮여 오고 있었다. 그때 카일라가 다시 오른쪽으로 튀었다.
“세상에! 세상에! 말도 안 돼!”
예나는 자기 감각을 믿을 수가 없어서 비명을 질렀다. 분명히 자신이 땅과 직각을 이루어서 머리카락이 옆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믿을 수는 없었다.
도대체 카일라 이 아이는 어디로 다니고 있는 거야! 그것도 한두 발짝이 아니라 그대로 뛰어가고 있잖아! 말도 안 돼! 얘 뭐야!
그러다가 자신이 이렇게 작아져서 매달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말고 그저 카일라에게 붙어 있는 데나 신경 쓰자고 마음을 먹었다. 마음 먹는 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말이다.
다시 머리카락이 곧게 늘어졌다. 땅에 내려섰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옆으로 검고 서늘하고 탁한 바람이 소리도 없이 쭉 뻗어나가는 게 보였다. 다음 순간 예나는 그 바람을 다시 또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머리카락이 풀썩 내려앉고. 카일라가 땅을 박차고 한 바퀴 돌아 완전히 방향을 달리 해서 뛰기 시작했다.
카일라의 숨이 가쁘다. 얼굴이 발갛고 땀을 많이 흘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나를 잡은 손에 들어간 힘은 빠지지 않는다. 상대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날아오고 있으니, 거기에서 몸을 피하려면 힘든 건 당연할 텐데. 예나는 있는 힘껏 단추를 잡고 카일라에게 달라붙어서 카일라의 짐을 덜어 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점점 힘에 부쳤다. 손이 아프고 땀이 차서 점점 미끄러질 것 같을 때 카일라가 지르는 비명이 귀에 울렸다.
“안 돼!! 엄마! 비켜요! 비켜!!!”
엄마라니, 그로자 부인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예나는 흘끗 고개를 돌렸다. 커다랗고 희미하게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손에서 짐을 떨어뜨리는 풍경이 보였다.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그로자 부인! 피하세요!!! 빨리요!!!”
하지만 그 누구의 목소리보다도 부인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당신 뭐야! 아이들에게 손대지 마!”
그리고 부인이 카일라를 한쪽으로 밀면서 앞으로 나섰다. 부인의 힘이 어찌나 센지, 카일라가 균형을 잃었고, 그 바람에 예나를 잡고 있던 손마저 놓쳤다.
예나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언젠가 영주님을 건드렸다가 날아갈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아주아주 오랫동안 허공에서 머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한 바퀴 돌고, 또 한 바퀴 돌면서 세상이 뒤집혔다 제자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뒤집혔다.
뒤집힌 세상 사이로 검은 구름 같은 것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쏟아져 오는 것이 보였고, 바로 본 세상에서 그 구름이 꽃잎처럼 퍼지면서 발톱 모양으로 다시 바뀌는 것이 보였고, 다시 뒤집힌 세상에서 그 발톱이 그로자 부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욱 내리긋는 것이 보였다. 예나는 비명을 질렀다.
“안 돼에에에에에!!”
“안 돼! 엄마아아아아악!!”
단지 엄마라는 말만이 예나와 카일라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지표였다. 두 소녀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로자 부인의 몸이 무너졌고, 발톱은 다시 흩어져 구름이 되더니 지상으로 내려앉아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실체가 없는 구름 위에 로브만 입은 것처럼 얼굴과 손이 있어야 할 자리가 시커멨다. 오른쪽 소매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 다시 발톱과 같은 모양으로 몽글몽글 커지더니, 무너져 땅바닥에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그로자 부인을 다시 한 번 찔러 내렸다. 그로자 부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크게 한 번 떨더니 곧 조용해지는 모습을 보다가 예나는 등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쁜 자식!!”
카일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등에 받은 충격 때문에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말려야 하는데. 카일라까지 그로자 부인처럼 당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는데 생각과 몸이 따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같이 움직이는 걸지도 몰랐다. 생각이 한 점에 고정되어 있고, 몸 또한 움직일 수가 없었으니까. 거꾸로 처박혀 있던 몸을 간신히 가누고 엎드리기까지, 엎드린 자세에서 다시 고개를 들 때까지 세상이 다시 한 바퀴 도는 것 같은 역겨움을 느껴야 했고,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오는 만큼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본 광경이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서, 두 배로 메스껍고 울렁거렸다.
검은 유령과 같은 그자 앞을 익숙한 인영이 가로막고 있었다. 가로막은 채로 두 인영이 함께 빠르게 움직였다. 앞으로 찌르고 들어갔다가, 뒤로 춤추듯 물러났다가. 누가 발만 보면 경쾌하고 빠른 춤곡에 맞춰 산보라도 하는 듯 두 사람의 스텝은 경쾌했다. 그러나 속도로만 치면 네 배, 아니 다섯 배 속도로 연주하는 미친 연주에 맞춘 듯했다. 검은 구름과 시퍼런 칼날이 불꽃을 뿜었고, 로브의 소매와 상대가 두른 망토가 회오리치듯 말렸다가 다시 펴졌다. 시야의 왼쪽 끝에 있는가 했더니, 어느 새 기둥을 뚫고 위로 솟았다. 다시 내려앉았다가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으로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로브가 잘려 나가고, 망토와 함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아는 얼굴, 알아보지 못하려야 못할 수 없는 얼굴이 잠깐 보였다가, 급속히 몸을 틀며 말려 올라온 망토에 다시 가렸다.
“영주님!!!”
소리를 질렀지만, 역시 몸이 작아서인지 가 닿지는 못한 것 같았다. 게다가 영주님은 그 괴물 같은 자와, 눈을 잠시도 뗄 수 없는 검과 팔의 대결을 펼치는 중이었다. 잠시라도 눈을 뗐다간 그 순간 한쪽의 팔이나 다리가 날아갈 것만 같아서, 그것이 둘 중에 좀 더 인간적이고 형체가 단단한 영주님 쪽이 될 것 같아서 예나는 가슴을 졸이며 고개를 들고 계속 그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조금 보고 있으니, 영주님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표정도 나타날 리 없었지만 로브 속 어두운 구름은 영주님을 막아 내는 데에 급급했고, 자꾸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영주님은 금방이라도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매번 찔러 들어갔지만, 상대는 매번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해냈다. 몇 번 그렇게 되자 영주님이 잠깐 혀를 차는데, 예나에게는 그것이 이제 봐주지 않겠다는 짜증 어린 말처럼 길게 들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영주님이 검으로 찔러 들어가고 상대가 피한 순간, 영주님이 맨손으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목께를 잡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웬만한 여자애 몸 길이만큼 긴 검과 영주님의 팔길이까지 합쳐서 둘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는데, 지금 영주님과 로브는 마치 껴안을 것처럼 가까이 있었다. 머리가 있을 법한 자리에서 귓속을 긁을 듯이 기분 나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영주님이 한 손으로 막자 소리가 말 그대로 손아귀에 잡혀 버렸다. 대신 흐늘흐늘하게 겨우 형태만 유지하던 로브가 팽팽하게 부풀기 시작했다. 예나는 불길한 예감에 귀를 막았다. 예상대로, 그렇게 부풀고 부풀고 또 부풀어 풍선처럼 동그래진 로브가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터져 버렸다.
예나는 후회했다. 얼굴도 돌렸어야 했는데. 잠시 모습을 바꾸어 가스처럼 구름처럼 보였기에 잊고 있었지만, 상대도 사람이었다. 사람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람 같은 모양의 뼈와 근육과 피를 가진 존재였다. 그런 걸 뻥 터진 다음에 눈과 코로 확인하게 되자, 이에 질세라 위장과 입이 합세해서 오늘 먹은 걸 확인하려고 들었다. 예나는 자신이 지금 작아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게, 그리고 자기가 바닥을 더럽히는 면적이 적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까지 별 쓸데없는 걸 다 걱정한다고 자신을 비웃으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영주님이 어떻게 했는지, 시체의 잔해는 깨끗이 없어져 있었다. 쓰러진 그로자 부인을 카일라가 안고 울고 있었고, 영주님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참이었다. 짧은 한숨에서 긴 말을 느꼈듯이, 그쪽으로 가는 영주님의 걸음 한 발짝 한 발짝이 너무 무겁고 무서워 예나는 떨었다.
“그러니까 네가 아직 남아 있었단 말이지.”
낮게 짓눌러서 목구멍을 빠져나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눌린 목소리. 카일라는 무서워서 움찔거리면서 뒤로 물러나면서도 그로자 부인을 놓지 않았다. 영주님은 한 발짝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누가 또 아나.”
“몰라!”
“나만 빼고 모두 공모한 건가?”
“모른다구! 저리 가!”
“왜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거냐.”
“몰라! 너 같은 거한텐 아무 말도 안 해 줄 거야! 미워!”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빛을 뿜어 냈다. 예나가 눈을 제대로 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빛이 안마당을 온통 메웠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카일라도 같이 사라졌다. 예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도대체 카일라는 뭐 하는 애인 걸까? 처음에 주인님이라고 칭했던 것하고는 달리 영주님에게 반말로 맞먹잖아? ‘너 같은 거’라니, 참 담도 큰…….
큰 걸 넘어서 괘씸하네! 감히 우리 영주님한테 너 같은 거라니! 너 같은 거라니! ‘같은 거’ 소리는 세르자크나 네체르나 그런 자식들한테나 붙여야 할 호칭이잖아!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오늘 카일라가 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맘에 드는 게 전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이렇게 큰 사고를 쳐 버렸다.
사고에 생각이 미친 예나는 그제야 다시 그로자 부인을 떠올렸다. 괴물에게 찔리고 다시 한 번 더 찔려서 쓰러지던 모습을. 예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나무 기둥을 지나 키보다 더 큰 건초들을 지나 그로자 부인 옆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영주님이 눈을 감겨 주는 듯한 동작으로 한 손은 그로자 부인의 얼굴에 대고 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너무 커서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영주님은 울지도 웃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조용히 그러고 있다가, 잠시 후 다른 손으로 그로자 부인의 손을 잡아 들더니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동작이 너무 경건했기 때문에, 영주님의 표정이 아무리 단단하고 굳더라도 속으로는 우는 것처럼도 보였다.
예나는 그로자 부인 옆에 털썩 앉아 버렸다. 차갑고 생명이 없고 뻣뻣하게 늘어진 물체. 이제는 그로자 부인의 형태를 지니고 있어도 부인이 아닌 다른 것. 시체를 처음 본 것도 아니지만 가까운 사람도 죽으면 이렇게 변한다는 것은 처음 실감하는 예나였다.
“골치 아픈 걸 당했군.”
영주님이 말했다. 예나는 그 말투가 너무 사무적이어서 고개를 들었다가 영주님이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자 놀라서 뒤로 조금 물러나 버렸다.
“앗…… 이런 모습 보이기 싫었는데.”
“안 보이면? 평생 그대로 살 테냐?”
그러고 보니 카일라도 없고, 영주님이 발견한 게 다행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뇨! 원래대로 돌려 주세요!”
예나가 말하면서 매달리기도 전에 영주님의 큰 손이 예나의 몸 전체를 덮을 듯 다가왔다. 다음 순간 예나는 영주님과 마주 앉아서 눈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팔을 휘저었다. 좋아하는데, 영주님의 눈은 너무 예쁘고 좋은데, 그래도 마주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져서 어린애가 되는 것 같다. 뭔가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을 때랑 다르면서도 묘하게 비슷한 상태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주님은 예나가 그렇게 당황하든, 팔을 붕붕 휘두르다가 날아가 버리든 상관하지 않을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로자 부인 쪽에 다시 손을 대더니 이상한 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로자 부인의 시체에서 빛이 나더니, 마치 그곳이 호수에 던져진 파문의 중심점인 것처럼 빛의 동심원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빛은 흐르고 흐르고 흐르더니 온 성 안을 가득 물들여 갔다. 거꾸로 그로자 부인이 있는 데까지 빛이 다시 도달했을 때 예나는 영주님이 읊조리던 이상한 말을 갑자기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에우제네 그로자. 이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잊는다. 이 성에는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잊는다. 이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령어로 끝나지 않았지만 명령이었다. 낮고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것은 명령이었다. 예나는 계속 주위를 채워 가는 그 명령을 바라보다가 더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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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말 바쁘고 신경 쓸 게 많은 새해네요.
이 글 읽어 주시는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월에는 완결하기를 스스로 기원 -db-
자하님도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