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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예나는 땀을 흘렸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잘 수 있다는 말은 정확했지만, 이렇게 호화로운 침대에서 이렇게 불편하게 자는 것은 처음이었다. 불편하다기보다는 괴롭다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고 눈을 감고 자고 있다는 감각과, 꿈 한가운데 있는 감각이 공존하면서 예나를 양쪽에서 붙들고 놔 주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덕분에 예나가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은 매우 기괴했다.
침대까지는 영주님의 침대였다. 멋진 사주에 커튼이 달린 호화로운 침상. 그런데 그 밖은 동굴 안과 같은 자연석 바닥에 자연석 천장이었다. 방의 형태는 무너지고 벽도 없이 뻥 뚫린 동굴 안이었다. 멀리, 하지만 충분히 눈에 보일 정도 거리에 그 붉은 꽃이 있었다. 하지만 화분이 아니라 바닥으로부터 피어 오른 모습이었다. 바위 틈을 뚫고 올라온 붉은 줄기는 예나가 최근에 본 모습보다 훨씬 생기 있었고 그래서인지 훨씬 인상에 깊이 박혔다.
다시 한 번 예나는 기묘한 공존의 감각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과 침대 밖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감각. 예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는데, 침대 밖에서만 시간이 흘러 갔다. 그것도 무척 빨리.
처음에 나타난 것은 역시 영주님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긴 머리에, 망토를 길게 두르지도 않고 홑겹의 옷만 입고 있었는데, 예나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옷이었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검고 반짝거리는 부츠를 신었고, 헐렁한 윗옷을 반짝거리는 검은 끈으로 허리춤에서 고정시켰다. 영주님은 처음에는 붉은 꽃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예나가 볼 수 없는 저쪽 끝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붉은 꽃을 조심스럽게 바위에서 들어내서 화단으로 옮겨 심었고, 바닥을 다듬고 쪼아서 평평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그림자처럼 겹쳐서 또 사람들이 지나가고, 그리고 방이 점점 예나가 알고 있던 모습과 비슷해졌다. 지금 배치를 바꾼 모습이 아니라 원래의 방처럼, 양탄자가 깔리고, 벽에 책장이 붙고, 탁자가 놓였다.
그러는 동안 영주님의 모습은 서너 번 더 보였다. 가구를 놓는 걸 감독하기도 하고, 붉은 꽃 앞에 서 있기도 했다. 세 번째쯤 보인 모습부터 영주님의 머리가 갑자기 짧아졌다. 그리고 그 뒤부터 영주님이 망토와 긴 옷으로 겹겹이 몸을 두르기 시작했다.
영주님은 붉은 꽃을 떠나지 않았다. 그 앞에 앉았고, 서 있고, 눕기도 했다. 증오하면서 줄기를 비틀어버릴 듯, 사람 목을 비틀듯이 두 손으로 잡고 흔들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쓰다듬듯이 꽃잎을 쓰다듬기도 했고, 그 앞에 누워서 줄기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영주님 위로 창살 그림자 같은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곤 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방이었는데도 그 빛은 규칙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그래서 마치 그 빛이 나타나면 하루가, 한 해가, 한 생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최초로 꽃 앞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여자였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으로 보였고, 눈을 감고 꽃 앞에 누워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눈을 감은 모습이 누군가를 연상시켰는데,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 앞에는 영주님이 무릎을 꿇고 여자의 한 손을 잡고 있었다. 예나가 보는 각도에서는 영주님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도 꽤 먼 거리였지만 예나는 알 수 있었다. 영주님은 울고 있었다. 아주 작게, 그러나 오랫동안 울면서 그 여자에게 기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자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죽거나 아픈 모양이었다.
장면이 바뀌었을 때 꽃 앞에 있는 것은 성인 여자가 아니라 갓난아기였다. 영주님은 그 아이를 수건으로 둘둘 말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돌아 어딘가로 걸어갔다, 예나의 시야 밖으로.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꽃 앞에 다른 여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고, 이번에도 영주님이 앞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다시 갓난아이가 나타나고, 영주님이 아이를 안고 나가고, 다시 다른 여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고……. 그리고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로 여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을 때부터 영주님은 울지 않았다. 손은 꼭 잡고 놓지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울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때부터 운 것은 예나였다.
“예나…….”
“흑…….”
“울지 마, 예나, 예나아.”
그리고 예나는 눈을 떴다. 카일라가 침대 옆에 앉아서 예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고 있었다.
“괜찮아, 예나? 울지 마, 울지 마아, 누가 못 살게 구는 거야?”
“아냐,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예나는 그 상태로 한참을 진이 빠지도록 울었다. 카일라는 계속 옆에 있으면서 수건을 갖다 주기도 하고 물을 담아 오기도 하면서 중환자 간호하듯이 굴었다. 예나는 다 울고 나서도 기운이 빠지고 머리가 아파서 그대로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렇게 괴롭게 자야 하다니, 호화로운 침대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 잠을 잔 것은 이틀 밤이었지만 두 번 다 꿈을 꾸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예사롭지 않았다. 예나는 카일라가 이마에 찬 물수건까지 얹어 주자 번뜩 정신이 들어 일어섰다.
“아니, 잠깐만. 나 열은 없어.”
“응? 하지만 아프면 다 이렇게 하는 거 아냐?”
“나쁜 꿈을 꾼 것뿐이지 아프지도 않다고. 그나저나 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다니?”
“그동안 내가 성을 얼마나 돌아다녔는데, 한 번도 안 보였잖아!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모르는 얼굴이고! 너 유령 같은 거 아냐?”
“무슨 소리야, 유령이 어떻게 물수건을 얹어 줘!”
카일라가 화를 내면서 예나 머리에 얹은 수건을 꼭 쥐는 바람에 물이 튀었다. 예나는 잠시 눈이 간지러워서 아무 말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있자 또 카일라가 발등에 불이 붙은 듯 매달려 왔다.
“예나, 괜찮아? 괜찮아? 미안해, 물 튀겨서어.”
“괜찮아. 금방 나아질 거야.”
“미안해, 미안해.”
“괜찮다니까. 그것보단 정말 너 뭐하는 애야? 유령이 아니라고 해도 이 성에 있는 이상 인간은 아닐 거고.”
예나가 간신히 눈을 뜨고 똑바로 쳐다보자 카일라는 예나의 눈을 피했다.
“그, 그게 중요해? 유령이 아닌 거 확인했으면 됐잖아. 그리고 나, 지금 중요한 일 있어서 너 보러 온 거란 말이야.”
“중요한 일?”
“응, 뭐냐면…….”
“안 들어.”
“에에?”
예나가 불쑥 말을 끊자 놀란 카일라가 드디어 예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예나는 화난 표정으로 팔짱을 끼어 보였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난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은 안 믿기로 결심했단 말이야.”
물론 사람 따라 다르지만. 그리고 이런 결심도 한 바가 없었다. 하지만 저번에 루치안 앞에서 바보 같이 파닥파닥대게 만든 것도 있고,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던 것도 의심스럽고 해서 한 번은 꼭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나는 카일라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을 것처럼 얼굴을 굳히고 카일라를 직시했다. 카일라는 처음에는 예나의 팔을 잡고 아양을 부리면서 예나의 기분을 풀려고 했지만, 그게 통하지 않을 것 같자 곧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
“안 돼, 나도 비밀이란 말이야!”
“누가 뭐래?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대신 나도 네 말 안 들을 거야. 들으나 마나 화장실 같이 가 달라는 거 아냐?”
“아냐! 거기 할아버지 때문이긴 하지만 내가 가려고 그러는 건 아니란 말이야!”
“그래? 그래도 화장실 가야 되는 건 마찬가지네, 뭐.”
“어, 어떻게 알았어?! 예나 신기하다!”
“네가 지금 말했잖아…….”
예나는 결국 끝까지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가 곤란한 애였다, 카일라는. 말해 주는 것도 없고, 수상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냥 앞에 두고 있으면 웃음이 나와서 혼내거나 무시할 수가 없었다.
“거기 할아버지 때문이라니 무슨 소리야?”
“으응, 그러니까,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모르면 어떻게 해. 정말 듣지 말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아, 할아버지가 정확히 말을 안 해 줘서 그래! 너무 위급하고 중요하고, 또오, 뭐더라? 아, 맞아. 꼭 예나만 들어야 하는 일이라고 했어. 부안이 걸린 일이라나?”
“보안이겠지.”
“그러니까 그거 말이야.”
“그래, 곧 죽어도 예나라고 했고 보안이라고 했단 말이지?”
“응!”
“내가 너한테 무슨 기대를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난 못 가. 이 방을 나가면 안 된단 말이야.”
“하지만 예나가 안 오면 안 돼!”
“못 나가는데 어떻게 하라고? 영주님이 꼭 이 안에만 있어야 한다고 했단 말이야. 안 그래도 사고를 많이 쳐서 찔려 죽겠는데, 또 말 안 듣고 나갈 순 없어. 게다가…….”
“하지만 그 영주님이 위험하단 말이야!”
예나가 고개를 휘저으면서 완강하게 거절하기도 전에 카일라가 먼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하도 커서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게 될 정도였다. 예나는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영주님의 침실이므로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곧 들었지만, 카일라의 벼락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 바로 그때에는 그런 생각이고 뭐고 할 정신이 없었다.
“후아, 정말 놀랐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건?”
“할아버지가 그랬어, 예나가 정 안 오려고 하거든, 이것만 알려 주라고. 주인님이 위험해! 그것 때문에 날 보낸 거야.”
“카일라, 도대체…….”
예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카일라가 쥐어짜면서 가져갔던 물수건을 도로 가져다가 이마에 척 얹었다. 머리를 식히고 생각 좀 해 보자는 뜻에서 한 행동이었는데 실제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나는 이마에서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턱을 지나 속옷까지 적시기 전에 얼른 물수건을 떼었다. 카일라가 제대로 꼭 짠 물수건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그런 카일라를 믿어도 좋을까?
“카일라, 그 할아버지가 이리로는 못 오는 거야?”
“응. 할아버지는 그 자리를 못 떠나.”
게다가 타협의 여지조차 없다.
예나는 잠시 생각했다. 카일라의 눈을 보고, 다시 깊이 생각했다.
“역시 안 되겠어. 지금 너란 존재도 확실하지 않은데, 내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러 가기는……. 미안해, 카일라.”
“정말? 그냥 같이 가자아, 응?”
“안 돼.”
“칫, 예나 미워!”
“하지만 정말 어쩔 수가…… 아앗!”
어린애 달래듯 카일라를 달래려던 예나는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온 조그만 주먹에 놀라 엎드렸다. 밉다고 외치면서 정말 주먹을 휘두를 줄이야! 카일라가 너댓 살짜리 꼬마도 아니고, 평소에도 활기찬데 주먹을 휘두르니 지나치게 활달했다. 붕 공기를 가르는 소리까지도.
“카일라! 무슨 짓이야!”
“같이 가! 안 가면 미워! 자꾸 그러면 주머니에 넣어 갈 거야!”
그리고 갑자기 주위가 빛에 싸였다. 예나는 눈이 부셔서 팔로 얼굴을 가렸다. 빛 때문인지 온몸이 뜨겁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화끈거리면서 잠시 아주 뜨겁다가 다음 순간 괜찮아져서 눈을 떴더니, 문득 앞에 몹시 널따란 천이 펼쳐져 있었다. 예나는 카일라가 이불이라도 덮어 씌웠나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카일라 얼굴이 보였다. 눈 한쪽이 얼굴만 하고, 이마에서 턱까지 길이가 예나의 키와 맞먹었다.
“뭐, 뭐야! 카일라, 이게 뭐야!”
“내가 주머니에 넣어 간댔잖아!”
“농담하지 마! 도대체 무슨…… 와아앗!”
커다란 손이 예나의 몸을 답삭 말아 쥐었다. 정확하 두 번째 손가락이 예나의 어깨 부위를, 새끼 손가락이 무릎 부위를 쥐고 있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예나는 온몸이 잡혀서 꼼짝도 못하고 허공으로 들렸다. 카일라는 예나를 조심스럽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 넣더니, 주둥이를 꼭 채우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간다, 예나! 높으니까 밖으로 나올 생각하지 마! 떨어져!”
“야! 너 도대체 무슨 짓이야!”
“뭐라고? 잘 안 들려어. 어쨌든 할아버지한테 갈 거니까 얌전히 있어어.”
곧 마차를 탈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흔들림이 시작되었다. 예나는 카일라 말에는 아랑곳 없이 주머니 주둥이를 통해 밖으로 나오려고 주름을 잡다가 균형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주머니 안쪽에는 푹신한 천 조각이 겹쳐 있어서 다치거나 아픈 일은 없었다. 마치 인형 침대처럼 느껴져서 카일라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왔거나, 보통 때에도 이런 짓을 예사로 하거나, 또는 이 주머니가 원래 인형이나 잡동사니를 넣어 다니던 주머니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조금 지나자 예나는 처음과 반대인 걱정을 해야만 했다. 카일라는 주머니 주둥이를 풀어 놓은 주제에 뭘 그렇게 격렬하게 뛰는지,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이리 구르고 저리 튀다 보니 주머니 밖으로 튕겨 나갈 것만 같았다. 주머니 주름을 꼭 잡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버티고 있노라니 이 상황이 두 배로 기가 막혔다.
도대체 카일라 얘는 뭐 하는 애일까? 만질 수 있는 유령인 건 아닐까? 유령이 아니면 최소한 뭔가 이상한 능력이 있는, 인간이 아닌……. 여기 성 사람들은 다 인간이 아니잖아. 그러면 소유물이란 게 되면 다들 저런 능력이 생기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나저나 말을 안 듣는다고 이런 짓을 하다니, 카일라, 정말 배신당한 기분이야.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만 해 봐!
돌아온다고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넌 평범한 인간일 뿐이잖아. 카일라가 알아서 잘못했다고 빌지 않는 한 넌 손도 못 댈걸?
잘못한 건 카일라야! 카일라가 모른다면 알게 만들면 돼! 잘못한 사람은 사과를 해야 하고, 그건 누구든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냉소적인 아가씨 쪽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한참, 그러니까 예나가 느끼기엔 한참을 뛰다가 멈춘 카일라는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주머니를 휘저어, 예나를 꺼내 버렸기 때문이다.
“쉬잇, 조용히 해야 돼! 할아버지가 여기서 기다리면 된댔어!”
그러니까 누가 조용히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예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주머니 주둥이의 주름을 모아서 최대한 기둥처럼 만들어 잡아 보았다. 그래도 조금 불안했지만, 카일라가 얼른 주머니 입구에 손을 대서 지지해 주었다.
“그러니까 도대체 뭘?”
투덜거렸지만, 지금 예나는 작아서 웬만큼 크게 말해도 카일라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면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증폭되어 들렸다. 비율이 맞지 않아서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주위 사물보다, 소리로 더 이곳의 위치를 잘 알 수 있었다. 도르레가 삐걱대는 소리, 규칙적으로 돌 위를 오가는 징 박은 장화 소리, 쇠사슬이 말리면서 내는 기괴한 잡음. 잠시 심한 바람에 날려갈 뻔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곳은 문루에서 옆으로 뻗은 성벽 위인 것 같았다. 카일라는 무릎을 안고 쪼그리더니, 밤새도록이라도 기다릴 것 같은 자세로 어딘가에 기댔다. 아마도 상자일 것이었다.
예나는 기겁했다. 이제 겨우 하늘이 붉고 노란 빛에서 남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는데, 카일라의 자세는 너무 느긋하고 각오를 다한 듯했다.
“카일라? 정말 여기 맞아? 뭐하려는 건데, 응?”
“쉬잇. 가만히 기다리라니까.”
“하지만……!”
“앗, 왔다. 진짜로 쉬잇. 조용히 해야 돼!”
말하면서 카일라는 무릎을 좀 더 오므렸다. 조금이라도 더 숨어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예나에게는 카일라의 몸밖에 보이지 않았다. 예나는 주머니를 나가 보려고 팔짝팔짝 뛰었다.
그때 멀리에서부터, 또는 예나의 감각을 믿을 수 없으니 어쩌면 가까이에서 거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아님 중반을 넘어선건가요? 도통 궁금해서리..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