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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누군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쪽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말의 뜻은 전달되었다. 소리라기보다는 빛 같았고, 마음에 직접 와 닿았다. 또 한쪽은 분명히 아는 목소리였는데, 어딘가가 달라서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희가 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너희에게 자비심이 한 톨이라도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것은 상관없어. 동족이라고 감쌀 마음은 없다. 오즈리크는 어떻게 된 거지? 어디로 빼돌린 거야? 내게서 숨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오즈리크, 오즈리크.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았다. 영주님, 오즈리크만 찾는 바보 같은 영주님. 화내는 목소리, 감정을 못 이겨 마구 지르는 목소리, 어린 목소리라니, 누군지 한번에 못 알아들은 게 당연했다. 영주님은 말을 길게 하지도 않고 언제나 말투에 고저가 없었으니까 목소리 자체가 같더라도 다른 사람처럼 들렸다.
예나는 왠지 웃음을 지었다.
기운이 넘치는 목소리도 잘 어울리는데, 영주님, 왜 그리 목소리가 낮아졌어요? 나이가 들어서? 왜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됐어요? 오즈리크라는 그 사람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 사람은…… 옛날에 죽었잖아!
예나는 벌떡 일어났다.
지금 저 대화는 어디서 들려오는 거지? 누구지? 왜 옛날에 했어야 마땅할 대화가 지금 들려오는 거지?
그리고 일어난 순간 몹시 깜깜한 방 한가운데, 커다란 침상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양 옆으로 한참은 굴러가도 될 정도로 커다랗고, 네 모서리에 기둥이 달려서 바깥이 어른어른 비쳐 보이는 커튼으로 주위를 모두 감싼 침대였다. 덮고 있는 것은 푹신하고 보드라운 비단 이불이었고, 손에 짚이는 베개 또한 서늘하고 기분 좋게 푹신한 비단 베개였다. 예나는 이 성에 며칠 있으면서 이런 침대를 딱 하나 본 적이 있었다. 영주님의 침대.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어엿한 잠옷이었다. 누워서 잠든 기억은 없고, 옷을 갈아입은 기억은 더 더욱 없으니 소파에서 깜박 잠이 든 후 누군가 침대로 옮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힌 모양이다. 설마 영주님? 루치안? 아니, 영주님이 그로자 부인을 불러 준다고 하셨으니까 그건 아니겠지.
예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지금 들은 이야기도 꿈에서 들은 걸까? 꿈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고, 누워서 소리만 듣고 있는 상황이라는 게 지금하고도 어울렸다. 하지만 침대에 누운 기억조차 없었는데 이렇듯 깜깜한 것을 보면, 또 한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깊은 잠에 빠졌던 것 같기도 하다.
뭘 망설이는 거야? 일어나서 확인해 보면 되잖아.
다시 마음속 목소리가 속삭이는 대로 예나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다행히 영주님의 방에는 가구가 많지 않았고, 청소하면서 봐 둔 바로는 침대 가까이에 램프가 있었다. 바로 들킬지도 모르니까 켜지는 않았지만, 일단 무슨 일이 벌어질 때를 대비해서 램프와 성냥을 들었다.
하지만 곧 가다가 딱딱한 것에 호되게 부딪쳤다. 다시 생각해 보니, 예나를 이곳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방 배치를 바꾸었다는 기억이 그제야 떠올랐다. 예나는 한숨을 쉬고 램프를 켰다. 이제는 누군가 있어서 달아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불을 켜자 갑자기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예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가 어느 쪽에서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바깥이었다. 창 밖은 아니고, 응접실 정도인 것 같았다. 그 방향을 보면서 뭐가 있었는지 지그시 생각하다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아…….”
붉은 꽃. 영주님이 쓰다듬던, 줄기부터 잎까지 새빨간 꽃.
영주님이 사라졌던 그 작은 방에 희미하게 불이 비치고 책장 문이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그 꽃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도록 한곳에만 밝혀 둔 희미한 조명 아래,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듯이 앉은 미인처럼 그 꽃이 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나는 그 암술과 수술과 물방울 같은 꽃잎과 간드러진 줄기를 마주 보아 주었다.
누군가 방금 전까지 여기에 있었던 모양이야. 아마도 이상한 이름밖에 부르지 않는 누구겠지.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나처럼 이 꽃을 바라보았겠지? 아니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꽃잎을 만졌을지도 몰라. 다정하게, 사랑스럽다는 듯이, 입 맞추기 직전의 연인처럼.
예나는 그때를 떠올리면서 자기가 자기 입술을 만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 놀라서 손을 내렸다. 순간적으로 가슴을 찔러 오는 감정이 있었다. 예나는 이 꽃을 질투했다.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을 질투해야 하다니, 참 비참한 일이다 싶었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 꽃을 질투했다. 당연한 듯이 서 있는 자세도, 영주님이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었던 것도, 유독 이 꽃에게 말을 걸 때만 그 깊고 끝이 촉촉이 젖은 듯한 목소리를 제대로 내는 것도, 그 목소리에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애정과 증오가 흠뻑 묻어 있는 것도 모두 질투했다. 미웠다. 이 꽃보다도 못한 자신이 비참했다.
이러지 마. 이럴수록 점점 더 비참해질 뿐이야.
“네가 소리를 낸 거니?”
예나는 괜히 소리 내서 말하면서 손을 뻗어 보았다. 붉고 붉은 꽃잎. 물기를 약간 머금고 있지만 따뜻하다.
“아니면 내가 꿈을 꾼 걸까? 하지만 이제까지는 그런 꿈을 꿔 본 적이 없는걸. 영주님 방에서 자서일까? 아니면 혹시 정말 네가 뭔가를 한 건 아니야?”
“꽃은 말을 못한다.”
“악!”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예나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러 버렸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슬금슬금 뒤를 돌아보았다. 영주님이 책장 문에 기대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예나는 유령 본 것처럼 놀라서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얼굴까지 보니까 심장이 자리를 이탈하고 싶어서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고 가만히 있으니 영주님의 발소리가 들렸다. 예나는 심장이 점점 위아래로 쿵쿵 뛰어올라서 너무 무서웠다. 이대로 더 내버려 뒀다가는 심장이 정말 몸 밖으로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그래서 바로 옆까지 왔을 때는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쿵쿵 흔들렸다.
하지만 영주님은 예나를 지나쳐 꽃 쪽으로 갔다. 예나는 몸이 얼음에 파묻힌 것처럼 추락했다. 그 다음 순간 영주님이 손목을 내밀어 손톱으로 직 긋는 장면을 보고 다시 불꽃처럼 폭발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척척 걸어가서 팔을 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영주님은 꽃에 팔을 대고,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꽃에 먹이고 있었다.
“영주님!!”
“보면 모르나. 먹이고 있는 거다.”
“피를요?”
“자꾸 묻지 마라.”
예나는 묻는 대신 옆으로 가서 영주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영주님의 피를 받아먹고 있는 꽃을 보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꽃이 좋아서 살짝 기울어진 것도 같았고, 좀 더 빨갛게 변한 것도 같았다. 예나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영주님 손에 달려들어 옆으로 치우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천장이 보이더니 몸이 붕 들렸다. 다음 순간 온몸에 충격이 왔고, 어딘가 딱딱한 것에 다시 어깨를 부딪쳤다. 예나는 자신이 그 방 구석에 처박혀 쓰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야……. 아프다…….”
목소리에 저절로 낑낑 소리가 섞여서 나왔다. 다시 소리도 없이 영주님 얼굴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괜찮나?”
“아뇨.”
“일어나 봐.”
“못 일어나겠어요. 다리랑 허리가 아파요.”
“엄살은.”
“엄살이라니! 영주님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가서 벽에 부딪쳐 떨어져 보세요, 안 아픈가! 악, 허리야…….”
“나는 안 아프다.”
“괴물.”
“맞는 말이지. 이 상황에서도 입은 살아 있는 걸 보니 너도 만만치 않긴 하다만.”
“이익! 정말 계속 그러고 보고만 있을……!”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예나는 다시 몸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에 들린 게 아니라 영주님의 단단한 팔에 안긴 것이었다. 끝을 맺지 못한 말은 입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날아서 사라져 버렸다. 전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도 단단한 품과 팔만은 맘에 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런 식으로 안기니 오히려 생각이 둘로 갈라졌다.
부끄러워, 부끄러워, 부끄러워! 당장 내려 줘! 안 그러면 과열되어서 펑 폭발할 것 같아!
좋아, 좋아, 너무 좋아! 폭발 좀 하면 어때? 계속 이렇게 안겨 있을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할래!
몇 발짝 안 가서 침대에 내리는 게 몹시 아쉬웠던 걸 보면, 전자는 그저 내숭이고, 부끄럽긴 해도 계속 안겨 있고 싶었던 게 진심인 모양이었다. 예나는 침대에 앉아서 영주님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지?”
바로 질문할 줄이야. 예나는 쿵 내려앉은 가슴을 추켜올리면서 짐짓 삐친 듯 입술을 내밀었다.
“사과는 언제 하실까 하고요.”
“사과?”
“영주님이 저 던진 거 아니에요? 무지막지하게 던지셔서 제가 이렇게 다친 거니까, 사과하셔야죠!”
“그런가. 미안하다.”
“웃…….”
너무 쉽게 사과를 해 버리니까 더 할 말이 없었다. 예나는 오히려 사과를 하기 전보다 더 골이 난 얼굴로 영주님을 올려다보았다. 영주님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안 된 건가?”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네! 이걸로는 부족해요!”
영주님은 다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평소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영주님이었지만, 지금 표정은 예나도 읽을 수 있었다. 인간 여자애란 뭐 이리 다루기 어려운가 하는 고민이 담긴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영주님에게 예나는 이해하기 힘든 패턴을 가진 여자로 찍힌 모양이었다. 예나로서는 영주님이 그렇게 생각해서 지금 기회를 이용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든 좋았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뭐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영주님 팔을 살짝 건드린 것뿐이잖아요. 그러니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제 소원을 들어 주세요.”
“일단 들어 보자.”
“들어 주시는 거예요?”
“들어 보고 나서 결정한다.”
“안 들어 주시면 어떻게 해요? 약속해 주셔야 말할래요.”
“그럼 말하지 마.”
“웃, 말할게요, 말할게요!”
이용하기에 앞서 놀림당하는 것쯤은 넘어가 줄 수 있다.
“저 꽃이 뭔지 가르쳐 주세요.”
이 질문의 답을 들을 수만 있다면.
영주님은 잠시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침대에 앉은 것도 아니고 누운 것도 아닌 자세로 어정쩡하게 버티던 예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 버렸다. 온몸이 화끈하고 쓰라렸다. 조금 더 기다려도 영주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 쓰라림이 마음까지 넘보았다. 예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 대답 안 하는 걸까?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걸까? 잘못한 거 하나 가지고 꼬투리 잡아서 알고 싶은 거 알려고 한 속셈이 들통 났나? 내가 영주님을 너무 만만하게 본 걸까? 사과를 재깍 한다고 해서 만만한 건 아니잖아. 하지만 재깍 하는 걸 보면 사과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럼 그냥 넘어갈 순 없잖아. 아무 이유도 없이, 아니 진짜로 아무 이유도 없는 건 아니지만 꽃에다 피를 주는 손목을 조금 밀었다고 붕 날아가 버렸는데, 진심 어린 사과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요구하는 것도 당연한 거 아냐?
아프고 쓰라린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한 걸 받지 못한 분노로 바뀔 때쯤 영주님이 예나에게 손을 댔다. 등에 푹신한 것이 닿는 느낌이 난 걸 보면 베개를 받쳐 준 듯했다. 눈을 뜨니 영주님이 망토를 벗으면서 침대 옆에 앉는 것이 보였다.
“왜, 왜 그러세요?”
“이야기가 기니까.”
그래서 두 개를 겹친 베개에 등을 기대고, 영주님이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는, 참으로 행복한 수면 전 상황이 되었다. 모르는 사이에 많이 잠을 잤기 때문에 더 잘 생각은 없었지만.
“루치안에게 나 같은 사람이 뭐라고 들었나?”
“밤이오. 그리고 낮이란 사람들도 있었다고. 아니, 그냥 편의상 붙인 이름이었는데, 전 그렇게 부르는 게 맘에 들어서요.”
“나쁘지 않군. 루치안은 시인 출신이라 그럴지도.”
“그래서, 꽃이 뭐예요?”
“벽화도 봤나?”
“네, 봤어요. 왜 자꾸 말을 돌려요?”
“거기 낮이 죽고 남은 피 웅덩이 있지.”
“네.”
“저 꽃은 거기서 피어난 거다. 신이 우리에게 내린 증표라고 할 수 있지. 저 꽃은 우리의 저주가 존재하는 한 지켜져야 하고 밤의 수장은 저 꽃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
“꼭 그렇게 피를 줘야 하는 거예요?”
“피에서 피어난 꽃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않나.”
“잠깐만, 꽃을 보존할 의무가 있는 건 수장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수장이다.”
“영주님이?”
“세르자크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에도 분명 이야기했을 텐데?”
“아, 맞다……. 어, 그러면, 저 꽃은 도대체 언제까지 지켜야 하는 거예요?”
“알 수 없지.”
“정말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있지만.”
“뭔데요?”
“별로 들을 만한 말은 아니다.”
“가르쳐 주세요.”
“그냥 갔으면 좋겠는데.”
“가르쳐 줘어어요!”
“시시하다고 하거나 후회하지 마라.”
“안 그럴게요.”
“끝나지 않아.”
“네?”
너무 담담하고 가볍게 말해서 예나는 반문했다. 영주님의 표정도 그다지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영주님은 예나가 쳐다보자 머쓱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까지 지었다.
“영원히 지켜야 할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다.”
“왜, 왜요?”
“우리에게 내린 저주가 거두어질 리도 없고, 오즈리크도 돌아올 리도 없으니까.”
“도대체 왜요? 그, 오즈리크라는 사람은 계속 환생하면서 살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면서요!”
“그렇게 돌아온다 해도 오즈리크는 아니다.”
“어째서요?!”
“다시 태어나도 같은 사람이라면, 무엇 하러 그런 축복을 받는 건가? 난 이해할 수 없다.”
예나는 왠지 스스로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오즈리크를 대변하고, 오즈리크란 사람을 위해 변명하고 있는 건가? 내가 왜? 나도 그 사람 싫은데. 내 조상일지도 모르지만, 영주님을 이렇게 아프게 하고, 영주님이 안타깝게 부르는 사람, 싫은데.
“그럼, 다시 태어나서 다른 사람이 되더라도, 인연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내가 왜 이런 말까지 하고 있지?
갑자기 먼 곳을 보는 듯 말하던 영주님이 찌르듯 예나를 쳐다봤다. 예나는 영주님의 짙은 푸른 눈이 시간을 멈추는 위력까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허튼 소리하는 예나와 예나의 말을 전달하는 공기를 모두 얼려 버릴 듯, 냉기와 살기가 팽배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영주님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바로 직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있다. 오즈리크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몰……라요.”
“아침이란 뜻이다. 낮의 마지막 생존자가 아침이라니 공교롭지.”
설마 동의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겠지? 예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영주님을 바라보았다. 영주님은 딴 사람이 된 것처럼 길게, 열띠게 말을 늘어놓았다. 둑이 터진 것처럼 이성이 범람하고 열기가 넘쳤다.
“우리는 끝없는 밤을 걷고 또 걷는 저주받은 자들이다. 신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고, 오즈리크는 우리를 기억하지 못해. 오즈리크가 몇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아침은 오지 않는다. 그리고 끝없는 밤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 있어. 아침이 온다 해도…….”
갑자기 영주님은 이마를 싸 쥐고 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의 자기 상태를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영주님은 다시 망토를 걸치더니 예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만 자라.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잤는걸요. 안 졸려요.”
“넌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잘 수 있어. 다 안다.”
“누, 누가 그래요! 그 말이 맞더라도 그렇지, 말하다 말고 가시는 게 어딨어요? 좀 전에 한 말은 다 하고 가세요!”
다시 영주님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제는 포기가 빨라진 듯,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
“아침이 오면 우리는 모두 사라지겠지. 그것만이 우리에게 남은 미래다.”
그리고 됐느냐는 듯이 다시 예나를 보았다. 예나는 굳어서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영주님을 올려다보았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씁쓸하게 웃던 영주님의 얼굴과,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서 돌아서는 그의 등과, 마지막으로 한 번 이마에 얹었던 차가운 손의 감촉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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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너무 오랜만에 뵈어요 ㅠ_ㅠ
이벤트 소설로 뵌 분들도 있겠지만 말이지요.
약간 이후 진행된 것이 있어 슬그머니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제가 많이 바쁩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월수금 연재는
힘들 듯해요. 대신 최선을 다해서 월목 연재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럼 다음 장으로 다시 뵈요. 목요일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