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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신적으로는 생각보다 낫지만, 몸은 확실히 고달프다는 것이 그 계획대로 일하기 시작한 첫날 예나의 소감이었다. 정신적으로 고달프지 않은 것은 아무 생각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잠들 정도로 몸이 고달픈 덕이었다.
네이트와 파울은 말한 대로 최대한 돌봐 주기 위하여 애쓰기는 했지만, 이미 너무나 자기 일에 익숙해서 새로 일을 배우는 사람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 했다. 네이트야 그렇다 쳐도, 파울은 조수라서 조금쯤 기대했는데, 말만 조수에 총 책임을 소네틴이 맡은 것일 뿐, 파울도 경력이 오랜 요리사라는 사실만 알았다. 예나가 재료를 준비해서 건네주는 속도보다 파울이 요리하는 속도가 더 빠르니 일이 안 됐다. 미오리타는 예나를, 자기 옷에 음식 재료가 튀지 않았는지 봐 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다미엘은 상냥하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긴 했지만, 같이 일할 사람이 아니라 마치 일하는 집 아가씨가 말이랑 좀 놀고 싶다고 해서 궂은 부분까지 가르쳐 주겠다는 것 같은 태도였다. 이 성의 일하는 사람들 전체가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고, 새로운 사람을 끼울 자리를 마련한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한 자리에 진득하니 배치된 게 아니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게 만든 영주님의 탓도 크다고 예나는 생각했다. 아무도 자기 동료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를 지려 하지 않았다. 최악은 마지막 코스였다.
안나, 안나, 안나!
분명히 영주님은 사흘간 일을 가르친 후 이후로는 검사만 하라고 했는데, 안나는 처음부터 검사만 했다. 물론 주의사항은 가르쳐 주었지만, 영주님의 침실에는 금지사항이 하도 많아서 목록이라도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영주님의 침실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은 사실 영주님이 쓰는 부분을 모조리 가리키는 것이어서, 예나는 응접실과 서재와 침실에 이르는 한 층 전체를 샅샅이 들고 쑤셔야 했다. 응접실에서 영주님 책상은 건드리면 안 되고, 서재에서 책장은 먼지는 털되 책은 건드려선 안 되었다. 만약 책을 꺼내서 털어야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모두 꽂혀 있던 자리에 그대로 다시 꽂아 놔야 했으며, 그중에서도 유리문이 달리고 열쇠로 잠긴 책장은 외관만 걸레질하고 손도 더 대지 말아야 했다. 커튼을 빠는 것은 헬라의 몫이었지만, 커튼을 달고 예쁘게 묶어 놓는 것은 안나가 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그것도 예나의 일이었다. 아무도 예나를 자기 동료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안나는 자기 대신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날 예나가 쉰 것은 식사 시간과, 저녁 식사가 끝나고 레이낙스가 램프를 들고 영주관으로 데려다 주면서 잠깐 몰래 쉬게 해 주었을 때뿐이었다. 레이낙스는 그보다 더한 것을 해 줄 수 없는 보잘것없는 위치라고 말했지만, 예나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그 뒤에 안나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다면 충분하다는 생각은 못했을 테지만.
그 뒤로도 안나는 검사만 했고, 사흘째가 되자 이제 가르쳐 줄 건 다 가르쳐 줬고, 영주님이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날짜도 이때까지이니 자기는 손 떼겠다고 하면서 아예 예나를 보러 나오지도 않았다. 안나는 레이낙스와 함께 일을 하러 왔을 때에는 세상 다시없는 동료처럼 살갑게 굴다가 둘만 남게 되었을 때에는 예나를 자기 하인처럼 부려먹었다. 그 태도 차이가 너무나 극심해서 예나가 누군가에게 말한다 해도 안 믿을 것 같았다. 누군가 표리부동한 안나의 태도를 눈치 채고 있다고 해도, 고자질을 한다는 것도 성격에 안 맞고 꺼림칙하기는 했다. 그저 아예 안나가 안 나오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나았다. 실제로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사흘째가 되니 혼자서도 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흘째, 안나 없이 혼자서 청소할 때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걸레질을 하면서도 딴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예나가 계속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저녁 식사 후에 영주님의 방을 청소한다는 것이었다. 영주님은 아침과 점심에는 보이지 않았다. 예나가 청소할 때가 영주님이 침대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갔을 때였다. 그런 식으로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난다면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영주님이 딱히 건강이 나빠 보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힘이 세고 너무 건강해서 탈이라면 모를까.
영주님이 그런 식으로 생활을 해서인지 확실히 예나가 마을에 있을 때보다 이 성의 생활이 좀 더 늦게 시작해서 늦게 잠에 드는 생활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 그렇다는 것이었고,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주님은 밤에 일어나서 깨어 있는 사람 하나 없는 성을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는 깨어서 영주님을 보좌하고 있는 걸까? 이를테면 루치안이라든가 그로자 부인이라든가.
영주님의 서재를 다 청소하고 침실로 들어서면서, 예나는 그런 게 아닐 때의 광경을 상상했다. 영주님이 침대에서 일어나서 겹겹이 검은 옷을 입고, 장화를 신은 후 방을 나서서 성 안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방문은 모조리 닫혀 있고, 복도에는 횃불이 켜져 있지만, 그나마도 희미하게 깜박거리면서 최소한의 조명을 줄 뿐이다. 영주님은 지하로 내려가거나 밖을 향한다.
예나는 여기에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상상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첫날 들어오면서 외경심을 느꼈던 것처럼, 이 성은 그냥 생활공간이 아니라 엄청나게 방어와 공격에 신경을 쓴 요새이기도 했다. 들어오고 나가는 문은 앞에 커다랗게 하나, 그리고 뒤에 작게 하나 있었는데 모두 혼자서 열 수 없는 문들이었다. 몇 겹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무시무시하게 굵은 사슬이 감긴 도르레를 풀어야 했다.
길어온 물 양동이에 걸레를 빨면서 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영주님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지하에서 뛰어 올랐을 때부터 어제 예나를 빙빙 돌리던 힘이나 칼을 팔에 맞고도 그냥 서 있는 배짱 같은 걸로 보건대 영주님은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엔 한숨이 나왔다. 영주님은 보통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첫날 그로자 부인의 말투에서 이미 알던 사실이기는 했지만, 영주님은 이 성 사람들에게 확실히 사랑받고 있었다. 이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영주님에게 보이는 감정은 그저 존경할 만한 주인을 넘어서서 뭔가 더 친근하고 오랜 뿌리를 가진 것 같았다. 영주님은 단문으로 말하긴 하지만 말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자신의 ‘소유물’을 끔찍이 챙기고 지켜 주는 사람으로 보였다. 확실히 브나스카야 성의 땅을 부쳐 먹고 사는 마을 사람들도 영주님을 본 적은 없지만 불공정한 처사나 주민을 생각하지 않는 무거운 세금 때문에 죽겠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찌 보면 브나스카야 영주는 자기 땅에 대해 무심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실제로 옆에서 본 영주님은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자기 땅에 관심이 없는 영주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영주님이 관심을 가지고 아낀다거나 소중히 여긴다거나 하는 게 있기는 할까? 자기의 소유물? 그러나 ‘소유물’에 대해 말하던 영주님의 말투는 애착보다는 의무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정말 영주님이 관심을 가지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건 없는 걸까?
‘변하지 않는 건 지긋지긋하니까. 끝은 환영이야.’
다시 그때 영주님의 말투를, 묘한 열기와 씁쓸함을 떠올리면서 예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영주님의 방을 청소하는 와중이라고는 해도 뭐 하러 이런 문제를 고민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너무 영주님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반성 아닌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시간에 절대로 보일 리 없는 영주님 부츠나 보고 있지. 걸레 빠느라고 책상 옆에 앉아 있을 때 본 게 아니라면 그 부츠 속에 다리가 있고, 다리의 주인도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뻔…….
예나는 잽싸게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착각이 아니었다! 다리가 붙어 있는 부츠가 아니라면 걸어갈 리가 없는데다 망토 자락까지 옆에서 펄럭일 리가 없지 않은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리도 영주님의 발소리와 같았다. 예나는 그가 걸어가는 방향에 맞추어 그 반대 방향 책상으로 나가려고 살금살금 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무사하구나.”
아니, 그게 영주님의 목소리였던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영주님의 목소리가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언제나 말투가 딱딱하고 목소리도 어미를 딱 잘라 버려서 정말로 어떤 목소리인지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영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일이 있으면 대개 내용을 꼭 들어야만 하거나, 예나를 화나게 하는 말이라 목소리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영주님이 저런 식으로 목에 힘을 풀고 읊조리듯 다정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렇게 목소리가 은근하고 촉촉할 수 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저런 목소리로 사랑이라도 속삭였다가는, 듣는 순간 당장 다리에 힘이 풀리……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예나는 세차게 고개를 젓다가 옆 책상에 가볍게 머리를 찧고 말았다. 영주님이 들었을까 봐놀라서 주위를 살피느라 아픈 건 몰랐지만, 영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두근거렸던 가슴이 마침 더 놀라서 내려앉을 뻔했다. 일단 거기 누구냐는 식의 불호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예나는 다시 왔던 길로 살금살금 기어가서 고개를 빠끔 내밀어 보았다. 보이는 건 문간뿐이었다. 서재에서 다른 방으로 넘어가는 문이 가까이에 있었다. 문은 영주님이 열고 간 그대로 열려 있었다. 양쪽을 다시 두리번거린 예나는 재빨리 문간과 가장 가까운 벽으로 붙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벽에 붙어서 고개를 내밀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어둡고 문이 있는 곳을 빼곤 책장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문에서 할 수 있는 한 고개를 돌려서 봐도 영주님도 보이지 않았다. 예나는 분명히 여기로 건너가는 것을 보았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길고 무거워 보이는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문 빼곤 사방의 벽을 다 가리고 있어서, 방금 전까지 예나가 있던 방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으로 희미하게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런 데에서는 책을 꺼내지도 못하겠다고, 램프를 들고 들어와야 했나 생각하면서 예나가 오른쪽 책장에 손을 댔을 때, 갑자기 책장이 움직였다. 너무나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이 움직여서, 예나도 바로 자기 앞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 같았다.
그것은 그 안쪽에 있던 영주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영주님은 평소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옆으로 내던지고 어느 화분 앞에 서 있었다. 화분이라고 하기보다는 작은 화단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크기였다. 네 명이 둘러싸고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큰 식탁 정도의 넓이에, 딱 그 정도의 높이였다. 검고 기름져 보이는 흙이 가득 찬 화분에는 줄기부터 꽃까지 소름끼치도록 새빨개서 낯선 느낌을 주는 식물이 심겨 있었다. 색깔만 빼면, 잎이 가늘고 길게 뻗은, 작은 꽃나무라고 할 수 있었다. 꽃은 물방울 모양으로 도톰한 꽃잎이 다섯 개 수술과 암술을 감싸고 있는 평범한 모양이었지만, 아래쪽 꽃잎 두 개가 조금 길게 늘어져서 어떻게 보면 입술처럼 보였다. 영주님은 바로 그 부분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왠지 알 수 없지만 예나는 얼굴이 따끈해지는 걸 느꼈다. 그 손길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에 입을 맞추기 전에 몹시도 사랑스러운 듯이 쓰다듬는 것 같았다.
‘정말, 도대체, 이런, 어떻게 그런 생각만 하는 거야, 미쳤어, 너.’
예나는 이제까지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나 노래 같은 것도 들어 봤고, 주위에서 몰래 밀애를 나누는 장면을 보기도 하는 등 그런 방면에 대한 지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회도 없었고, 황홀하고 꿈 같은 키스와 성애를 상상하기에는 본 것들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런 것들은 사실 축축하고 냄새 나고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되는 것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저 입술 같은 꽃과 영주님의 손길을 보았을 때 처음으로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세상에는 그런 애정만 있는 게 아닐지도.
“네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다시금 낮게, 심장으로 스며들어오는 목소리.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닌데도 그 목소리가 너무 짙게 살기와 애정을 동시에 품고 있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켠 어딘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게 남은 마지막 기회도 사라지는 거겠지. 항상 바보 같이 널 죽이려고 하고 잊으려고 해도, 결국 실패하는데.”
정말로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영주님이 맞는 걸까? 예나는 뒤돌아 서 있는 그 사람의 어깨를 잡아서 얼굴을 보고 싶었다. 입고 있는 옷도,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도, 강인한 팔도, 첫날 자랑스럽게 내보였던 부츠도 모두 영주님의 것이 맞는데도.
“그 기회가,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 네가 이렇게 살아 있으니, 아직도 나는 기다려야 하는 건가? 도대체 언제쯤에야…….”
그리고 입을 꾸욱 다무는 듯, 이빨로 입술을 깨무는 듯한 침묵. 예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뒤돌아서 나왔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기분이었다.
하려던 일도 까먹고, 뭘 찾아야 하는지, 뭘 안 했는지도 생각 안 나는 채로 멍하니 걸어서 나가다 보니, 채이는 게 걸레요, 부딪히는 게 빗자루였다. 예나는 거짓말처럼 빗자루를 밟고 넘어지면서 균형을 잡겠다고 손을 짚은 데에 하필 걸레가 있어서 다시 앞으로 주욱 미끄러지고 말았다. 팔은 만세를 부르며 바닥으로 널브러지고 무릎은 바닥에 부딪히고 엉덩이는 하늘로 향한 자세로 잠시 움직이지도 못하고 아파하는데,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청소가 아니라 체조를 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어느 새 망토를 다시 챙겨 입고 평소 말투로 되돌아온 영주님이 눈앞에 서 있었다. 예나는 재빨리 얼굴을 들고 일어났다. 다행히도 영주님의 얼굴에는 의심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심해하고 있을 뿐.
“잠깐 앞이 안 보여서, 넘어졌어요. 제가 가끔 그러거든요.”
가끔 그러긴 뭐가? 앞이 안 보였다는 건 맞으니까 아주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그렇군. 확실히 눈이 보였다면 그런 자세로 넘어졌을 것 같진 않다.”
“보, 보셨어요?”
영주님은 끄덕이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넘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죽. 모두 다. 멋진 구경거리였다.”
“그러면서 일으켜 주시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자랑스럽게 그걸 다 봤다고 말씀하시다니 너무해요!”
아니, 이러고 싶은 건 아닌데……. 예나는 속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좀전에 몰래 엿봤던 게 미안하고, 추한 꼴 보인 게 무안하다 보니 이상하게 땡깡을 부리게 된다. 감히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데 영주님이 웃었다.
“일으켜 줄까 했는데, 다 넘어졌나 싶으면 더 꺾이더군. 틈이 없었다. 그리고 자랑한 게 아니라 사실이다.”
웃었다.
예나는 잠깐 그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러니까, 그렇게 딱딱하던 목소리가 그렇게 달콤하게 변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서늘하고 무섭던 얼굴이 저렇게도 변한단 말이지. 그저 칼로 벨 듯이 오똑 서 있던 콧날까지도, 입술을 조금 반달형으로 그리는 것만으로 부드러워 보였고, 무표정하고 안을 들여다볼 수 없던 눈동자가 살짝 일그러지면서 물기를 머금었다. 그저 반짝이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그 얼굴로 말을 하니, 말의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네, 네?”
“안나는 어디 갔냐고 물었다.”
“아, 네, 안나요……. 오늘부터는 검사만 하라고 하셨으니까, 딴 데 계시겠죠.”
그러자 영주님이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예나는 진정으로 안타깝고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더 우스꽝스럽게 넘어질 용의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자기 마음에 자기가 놀랐다. 놀란 것을 감추려고 질문을 하자, 목소리가 통제에서 벗어나 마구 커졌다.
“왜, 왜요, 영주님? 필요하신 일이라도?!”
“귀 안 먹었다.”
“네…….”
“지금 해 놓은 꼴을 보아 하니 오늘 자정 전까지 청소를 끝낼 수 있을까 의심스럽군. 오늘은 그때까지 끝내야 하고, 내일부터 연회 날까지 사흘은 청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네? 무슨 일인데요?”
“알 필요 없다.”
“그래도…….”
입속에서 중얼중얼거릴 뿐 예나가 별 말을 하지 못하자, 영주님이 그제야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상하군.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를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얌전하다니.”
“만날 소리만 지르는 건 아니에요.”
“넘어지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지.”
“그러니까, 만날 그런 건 아니라고요!”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금방 놀라서 자기 손으로 입을 막기는 했지만 이미 늦었다. 영주님은 다시 또 놀릴 것 같은 표정으로 예나를 보다가 말했다.
“그 꽃,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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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하입니다.
오늘도 일찌감치 금요일 분을 올리고 갑니다.
보기만 하고 댓글 안 다시는 분은 미워할 거예요~
(미워해서 뭘 어쩔 건지는 .... 침묵...)
그럼 월요일에 또 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