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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예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어제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들면서 했던 생각이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얼굴은 잘해야 이십대 후반, 하는 짓을 보면 정신연령은 십대. 그런데 쉰도 넘었다고?! 정말 할아버지와 세대를 초월한 게 아니라 진짜 그냥 또래 친구였던 걸까? 예나는 할아버지가 허허허 웃으면서 곡차를 마시는 건너편에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영주님을 생각하고 하얗게 질렸다. 끔찍하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등골이 오싹하고 봐서는 안 될 장면인 것만 같다.
“에나?”
“예나야.”
무의식적으로 대답해 놓고 예나는 앞을 다시 보았다. 카일라가 대단히 고마운 일을 해 준 것 같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연상의 늪에서 건져 주는 일.
“다 왔어.”
“응. 그런데 안 들어가고 뭐해?”
“문을 막고 있는걸.”
팔짱을 끼고 답삭 매달려 오는 카일라를 내려다보다가, 예나도 고개를 들어 화장실 문을 보았다. 튼튼한 떡갈나무 문이고 주위는 어두운 색깔 돌로 딱딱 짜여 있어서 화장실 주제에 위압적인 모습이긴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소리야, 막고 있다니?”
“허연 할아버지가 나만 오면 막고 안 들여보내 주려고 해.”
예나는 눈을 다시 비비고 보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라는 무언가 진짜로 보이는 듯 예나 팔에 매달려서는 그쪽을 보고 벌벌 떨었다. 예나는 가만히 카일라를 내려다보다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문 쪽으로 고개를 향해서 사람이 있다면 눈을 맞출 만한 높이로 턱을 들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누구신지도 모르겠고, 초면에 이런 말씀부터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좀 비켜 주시겠어요? 화장실이란 데가 급해야 오는 덴데 그런 곳을 막고 계시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이 애가 혹시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러시는 거라면 그걸 푸시는 게 옳지 계속 이런 식으로 보복하시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이가 있으신 분 같으니 어린 사람에게 계속 억하심정을 갖고 있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주제넘은 참견이라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꾸벅 인사까지 하면서도 예나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게 세상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고, 아니 인정하는 바였고, 카일라가 무서워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긴 그래서 한 번 해 보는 것뿐이었다. 맹세코 그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카일라가 왜 그러냐고, 그러지 말라고 팔을 잡아끄는 것쯤은 가볍게 무시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리던 카일라가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어, 어? 에나, 에나, 할아버지가 비켜 줬다. 나 들어갈게!”
“예나라니까.”
다시 한 번 지적해 주면서도 예나는 눈이 팽 도는 것 같았다. 카일라가 팔을 놓고 너무나 후닥닥 들어가 버려서이기도 했고, 정말로 비킬 줄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은 정말로 그런 게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거지만, 사실은 카일라 눈에만 보이는 카일라 눈의 먼지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카일라의 마음이 편해졌다는 뜻일 테니 나쁠 건 없겠지. 예나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어르신이라고 부를게요.”
아무 움직임도 없고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예나는 왠지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왕에 설득한 거라면,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서로 이야기를 해 가면서, 끄덕이거나 고개를 젓는 모습도 봐 가면서 의견을 좁혀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말 한 번 허공에 대고 했더니 상황이 달라지니 싱겁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제 하루 종일 믿을 수 없는 일을 잔뜩 당하더니 현실감각이 없어졌구나, 예나. 눈에 안 보이는 존재는 눈에 안 보이는 대로 있는 게 좋은 거야. 그런 존재들과 엮여서 좋아질 일은 없어. 카일라는 그저 자신에게만 보이는 세계를 갖고 있는 거고, 넌 카일라만 볼 수 있는 세계에 너도 모르게 한 가지 역할을 잠시 맡았던 것뿐이야. 그렇게 생각해.
“와, 에나, 다시 봤어. 할아버지가 그렇게 공손하게 구는 건 처음 봤는걸!”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도 환경이 안 받쳐 주는구나.
“예나야.”
“예나라고 그랬잖아.”
“관두자.”
“정말이라니까? 아가씨 모시듯이 인사도 했어. 에나 정말정말 대단해! 앞으로도 부탁할게!”
“그래, 능력이 닿는 한 도와줄게.”
아직까지 이 성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배정받지는 못했지만, 설마 잠깐 화장실 같이 가 주는 것도 못하랴 싶었다. 게다가 해 준다고 할 때 카일라 얼굴이 너무나 환해져서 웬만하면 꼭 해 주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아무리 봐도 카일라는 동갑내기라기에는 너무 귀여웠다.
“에나는 어디서 왔어? 성이 뭐야? 혹시 이 성 와 본 적 없어?”
“예나야. 저기 아랫마을에서 왔어, 성에는 이번에 처음 와 봤고.”
“헤에, 그래? 하지만 저 할아버지는 에나 아는 것 같은데.”
“그래? 이상하네.”
어쩌면 저 할아버지란 사람이 예나가 마을에서 살던 사람의 유령이라거나 하는 상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중에서 예나에게 아가씨 모시듯이 인사할 사람은 없었거니와, 유령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뭔가 이상했다. 역시 카일라에게만 보이는 카일라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속이 편할 것 같다.
“이런, 계속 찾았더니, 여기 있었군요! 식사도 안 하고 어딜 다녀오는 겁니까?”
복도를 걸어가다 보니 루치안이 갑자기 나타나서 물었다.
“아,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카일라라는 아이가 들어와서…….”
그러면서 옆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바로 옆에서 힘차게 팔을 흔들면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뒤로 돌고 옆으로 돌고 다시 앞을 보아도, 시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루치안은 누구냐고 묻는 듯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예나는 설명을 하려고 손으로 좀 전까지 카일라가 서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가, 허공을 휘저었다가, 결국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홀에 계세요. 벌써 점심도 한참 지났는데 배도 안 고프셨습니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전혀 몰랐는데.”
“배가 고플 리가 없겠군요.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아예 저녁 식사를 하시지요. 영주님께서 예나 씨를 모두에게 소개하고, 전원에게 공지할 일도 있고 하셔서 홀로 오라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이리로 죽 가면 되는 거였죠?”
“맞아요. 그런데 예나 씨.”
“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요?”
예나는 아차 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진데다 이상한 말만 하던 아이의 말이긴 했지만, 막상 루치안을 보자 자꾸 ‘400살’이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어디를 봐서 저 얼굴이 마흔이라는 건지, 주름은커녕 주근깨나 기미나 반점도 없는 루치안의 피부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의심이 들었다.
“죄송해요.”
“아뇨, 그냥 다음부터는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말씀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솔직하게 살아야죠, 안 그래요?”
예나는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이상한 소리를 내 버렸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자 루치안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다시금 카일라가 말했던 ‘능글능글 구렁구렁 미끈미끈’이라는 수식어가 생각났다.
“제가 감정 같은 거 잘 못 숨기는 거 아시잖아요? 그렇게 생각이 드는 날이 오면 꼭 말씀드릴게요, 그건 약속드릴 수 있어요.”
“저런. 엄격하셔라. 그럼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이번엔 정말 잠시 맞죠?”
“예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고 또다시 사라지는 루치안을, 예나는 다시 한 번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얼굴이 마흔. 저 얼굴이 마흔. 저 얼굴이 마흔. 저 얼굴이 마…….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고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고 애초에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아이가 한 말 때문에 이렇게나 흔들리다니. 예나는 반성했다. 이 성은 정말 이상한 곳이다. 유령이 나타나서 유령이 무섭다고 한 꼴이 아닌가. 게다가 나이 먹어서는 늙지도 않는 사람이 둘이나…….
안 믿는다고 했잖아!
예나는 다시 고개를 젓고 홀을 찾아서 가기 시작했다. 복도 끝의 문을 나가자 잠깐 건물과 건물 사이로 짧은 회랑이 이어졌는데, 거기서 올려다 본 하늘은 과연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태양의 붉은 흔적은 사라졌지만 아직 완전한 밤이 되지는 않은, 예나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하늘색이었다. 분명히 점심 전에 그로자 부인을 만났던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되었다니, 역시 요즘 해가 짧긴 한 모양이었다.
부지런히 발을 놀려 홀에 닿고 보니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벽난로에 불을 지펴 놓았고 아직 장작이 많이 타지 않은 걸로 보아서는 그 누군가는 금방 왔다 간 모양이었다. 팔각형으로 된 홀의 나머지 부분은 여기저기 걸린 멋진 액자와 넓고 따뜻해 보이는 양탄자, 그리고 난로를 바라보고 앉게 되어 있는 커다란 의자 두 개만 있을 뿐 넉넉히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이 성은 대개 가구를 많이 놓지 않고 양탄자 정도만 놓아서 휑한 것만 피하고 공간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찌 보면 넉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찌 보면 귀찮아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주인 성격을 보면 설득력 있는 생각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혼자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어제 언젠가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앞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의자에서 영주님이 일어났다.
“뭐가 설득력 있는 생각이라는 거지? 그 주인이 혹시 나인가?”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제 예나에게 덮어 주었던 것과 모양이 조금 다르지만 똑같이 검고 긴 비단 망토를 두르고 옷깃을 꼭꼭 여민 모습이, 뒤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의 불길과 엄청난 대조를 이루면서 보는 사람까지 덥게 만들었다. 벽난로 앞에 서 있으면서도 서늘한 눈길과 표정도 여전했다. 예나는 그 얼굴을 대하자 갑자기 다시 추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나는 거짓말이 서툴렀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전 다만…….”
다행히 영주님은 예나를 잠시 보고는 금방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망토는?”
전혀 도움이 되는 화제가 아니다.
“오늘까지 빨아놓으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그때는 늦은 밤이었고, 전 다쳐서 오늘 아무도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다치다니? 멀쩡하잖아?”
“무슨 소리예요, 붕대 간 지도 얼마 안 됐는걸요. 어제 여기가 찢어져서 피도 많이 났단 말이에요.”
“그거야 어제 이야기고. 지금은 멀쩡한데.”
너무나 단호하고 자신감에 찬 어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딱 자르는 어조였다. 예나가 잠깐 말문이 막힌 사이 영주님이 소리도 내지 않고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예나의 머리에 감은 붕대 한쪽을 잡았다.
“잠깐만요! 뭐하시려는 거예요?”
“멀쩡한데 쓸데없이 감고 있을 필요 없다.”
“안 멀쩡하……!”
갑자기 세상이 빙글 돌았다. 영주님이 붕대를 벗겨내더니 자기 팔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예나를 돌리고 있었다. 분명히 바닥도 그다지 매끄럽지 않고 예나가 몸을 돌리면서 협조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나 쉽게 돌렸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다시 소리치려던 예나는 혀가 꼬이고 눈 앞이 빙빙 돌아서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로자 부인이 예쁘게 감아 준 붕대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붕대가 다 떨어지고 나면 예나도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쉽게 돌렸던 만큼 영주님은 쉽게 예나를 잡아 세웠다. 그리고 붕대를 감았던 이마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이래도?”
조금 만지작거리는데 하나도 아프지가 않았다. 예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자기 손으로 그 부위를 만져 보았다. 어제 성으로 들어오기 전처럼 말끔했다.
“아까 붕대를 감을 때만 해도 딱지가 앉아 있었어요!”
“그거야 아까겠지. 그래서 망토는?”
“못 빨았다니까요!”
“거기에다 예의와 규칙도 배우지 않은 것 같군.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반발이 드는 대로 소리를 치던 예나는 그제야 아차 했다. 어제는 이곳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데다 마음속의 아가씨까지 강하게 주장을 펴서 앞에서 꿀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오늘은 그 아가씨들은 다 숨어 버린 것 같았다.
“영주님이십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내일까지 빨아 놔.”
좀 더 엄한 꾸중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말이 나오자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걸 빨게 하기 위해서 예의와 규칙까지 끌어다가 말했단 말인가? 물론 그 일 자체만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닐 것 같긴 했지만.
“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습니다. 전 일단 여기서 기다리라고 루치안 씨가 그래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던가?”
“네.”
“한 시간쯤 있다가 오겠군.”
그런 건가. 루치안 씨의 잠시란 말은 믿어선 안 되는 거였나. 예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한 시간 동안 영주님과 단둘이 이 홀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핑계를 대고 어딘가 다른 데로 가기에는 이 성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고, 영주님이 있으니 앉아서 편히 기다릴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게다가 벽난로가 아무리 따뜻하게 타올라도 영주님이 있다면 그 열을 상쇄해서 그냥 싸늘할 거라고 생각하니 두 배로 고역일 듯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주님은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
“네?”
“싫으면 말고.”
“아, 아뇨, 감사합니다!”
예나는 일단 냉큼 앉았다. 아무리 영주님의 냉기 때문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고 해도 벽난로 앞에 앉으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서서 한 시간을 있는 것보다는 앉기라도 하는 쪽이 훨씬훨씬 나았다.
앉아서 옆을 힐끔 보니 영주님이 한 손으로 부젓가락을 들고 장작 더미를 뒤적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기 좋게 타고 있던 불길이 화악 피어오르면서 열기를 끼쳐 왔다. 저렇게 꽁꽁 싸매고도 불을 올려야 하다니, 어지간히 추위를 타는 영주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에게서 뿜어지는 냉기에 자신도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불쌍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불을 키워도 체질이 바뀌지 않는 한 언제나 추울 테니까. 언제나 벌을 받는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불이 너무 센가?”
“네?”
“두 번 물어야 할 질문 같지는 않은데.”
“아, 아. 조금 센 것 같은데요. 조금 전이 딱 알맞았어요. 하지만 저쪽까지 열이 가려면 지금 정도가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도 없는데 뭐 하러.”
퉁명스럽게 말하기는 했지만 예나가 부젓가락을 든 영주님을 보는 눈길은 그 한마디로 달라졌다. 아무도 없는 게 아니라 여기에는 예나가 있었다. 그리고 영주님은 불에는 아무 영향을 안 받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불을 키운 것은 예나를 위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말만 저렇게 예쁘지 않게 할 뿐, 다정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불길에 비치는 옆얼굴이 더욱 잘생겨 보였다. 예나는 아까 루치안을 보았을 때와 같은 ‘500살’ 환각이 영주님 얼굴 옆을 떠돌기 시작하자 절망했다.
저 얼굴이 쉰, 저 얼굴이 쉰, 저 얼굴이…….
정말 말도 안 된다! 루치안이 마흔이란 것보다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루치안과 영주님은 아무리 봐도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솔직히 말하면 서른 살이 넘었다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카일라라는 유령인지 뭔지 그 아이가 말한 숫자는 그냥 되는 대로 주워섬긴 숫자일 뿐이다!
“저, 영주님, 나이가 혹시 어떻게 되세요?”
하지만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단 말인가. 예나는 새삼스레 자기 입의 실천력에 감탄했다.
더 감탄스러운 건 영주님의 대답이었다.
“실례다.”
“네?”
“나이를 묻다니 실례란 말이다.”
“네? 하지만 여자 나이도 아니고, 그런 게 실례가 되는 건가요?”
“대답하기 싫다고 곧이곧대로 말해야 알겠나?”
“그거라면 오히려 이해할 수 있지만요. 하지만 정말 왜 싫으신 건가요? 저한테 대답하는 게 싫으신 거예요, 나이를 말씀하시기 싫은 거예요?”
“어느 쪽이면 어떤가. 이상한 걸 물고 늘어지는군.”
“궁금하니까요. 오늘 정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단 말이에요.”
“스스로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남에게 그걸 다시 물을 필요는 없지 않나?”
“그게,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얼추 들어맞는 것 같은데 영주님하고 루치안 씨만 이상하니까 그러죠.”
“몇 살이라고 했는데?”
“루치안 씨는 마흔, 영주님은 쉰도 넘었다.”
피식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믿나?”
“믿기 힘드니까 물어보잖아요.”
“그럼 믿지 마라. 그러면 되지 뭐 하러 물어보는 거지? 쓸데없는 데 호기심이 많으면 명을 재촉할 뿐이다.”
“대답하기 싫으면 그렇다고 하면 되지, 악담까지 할 건 뭐예요!”
“대답하기 싫다는 말은 아까 맨 처음에 한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 예나는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을 내밀고 목을 움츠렸다. 잠깐 다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취소다. 악담을 덧붙이다니 아무리 뭘 잘해 줘도 점수 깎아 먹는 나쁜 말버릇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들려온 말은 더 깎아먹을 점수도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쓸데없는 말장난에 놀아나다니, 자네답지 않군그래. 세 마디 이상 말대꾸하는 하녀는 살려 둘 필요가 없어.”
내용에서도, 목소리에서도 날카로운 쇳소리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영주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와는 또 다르게 소름이 끼쳤다. 예나는 등까지 움츠리면서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보았다.
영주님처럼 검게 차려입었지만 깃털과 금줄을 화려하게 둘러서 무척 무겁게 입은 남자가 홀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얼굴 옆으로 금발이 흘러내려, 흰 피부와 묘하게 붉은 입술과 대조를 이루었다. 망토 밖으로 손을 내밀어 허리까지 오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얼굴은 그다지 늙은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손톱이 까맣고 길어서 기분 나빴다.
예나는 좀 전의 말을 들었을 때 머리가 텅 비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쪽을 멍하니 보다가 한 마디를 더 듣자, 아직도 남은 게 있었다는 걸 알았다.
“뭘 봐, 천한 게.”
불길이 일어서 머리까지 다시 도달할 만큼 충분하게 남아 있었다. 예나는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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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실은 써 놨었답니다. 격려해 주신 수룡님 감사해요 *^^*
또 새로운 인물인가! 싶겠지만 이제부터 비밀이 벗겨지기 시작한답니다. 기대해 주세요~
끝없는 밤은 월수금에 찾아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