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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얼굴이 따뜻하고 간질거리고, 희미하게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들려 예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밤에 잠들 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예나가 잠든 방은 침대 발치 오른쪽으로 창문이 있어 해가 잘 들었다. 창문이 난 방향이 동쪽인지, 아직 빨갛고 싱싱한 해의 모양이 창문을 덮은 성긴 나무 격자 사이로 생생하게 보였다. 일어나서 격자 사이로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나 씨, 예나 씨? 일어나셨습니까?”


루치안의 목소리였다. 예나는 잠시 창문 밖으로 짐마차와 수레가 다리를 넘어 들어오는 광경을 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아, 네!”


“탁자에 옷을 두었으니까 갈아입고 나오세요.”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고 나가자 루치안이 복도를 보면서 짐 놓는 것을 지휘하고 있었다.


튼튼하고 무거워 보이는 나무 궤짝은 위층으로, 얇은 판자로 만들어서 신선한 냄새를 솔솔 풍겨서 뭔가 먹을 게 들어있을 것만 같은 상자들은 주방으로 보냈다. 더러 길고 무거운 촛대는 연회장으로 들고 가라고 했다. 날개를 치며 시끄럽게 구는 닭과 오리가 든 상자는 왜 여기까지 들고 들어왔느냐고 호통을 쳤다.


예나는 어색하게 서서 루치안이 이쪽을 보기를 기다렸다. 루치안은 일할 때는 옷을 목부터 발까지 꽁꽁 싸매고 좋게 말하면 단정하게, 나쁘게 말하면 꽉 막히게 입는 걸 선호하는 듯했다. 호통 치는 모습이나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이 어제 싱글싱글 웃으면서 놀리고, 다정하게 잡아끌던 것과는 무척 달라 낯설었다.


“아, 미안합니다. 불러 놓고.”


몇 분이 지나서야 루치안은 예나를 돌아보았다. 예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웃어 보였다.


“붕대도 가는 게 좋을 것 같고, 성도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불렀습니다.”


“네. 그런데 무슨 잔치라도 있나 봐요? 짐이 많이 들어오네요.”


“약간 시일은 남았지만요.”


루치안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답하고는 살짝 발을 돌려 예나 옆에 나란히 섰다.


“가실까요?”


그리고 손을 내미는데 마치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듯 손바닥을 위로 하여 내미는 것이었다. 예나는 잠깐 어렸을 때 키가 큰 남자 역할을 맡았던 엄마를 생각하고 웃었다.


“저는 이 성 고용인인 줄 알았는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어찌 이리 아리따운 아가씨를 그냥 마구 모시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몸도 성하지 않으신데.”


“업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제가 발을 다친 것도 아니고, 에스코트한다고 몸이 낫는 것도 아닌데요?”


“마음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예나는 잠깐 멈추어 진지하게 루치안을 바라보았다. 루치안은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것처럼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때는 왜 그 반짝이는 초록 눈에 담긴 장난기를 못 알아챘나 싶었다. 풍부한 표정이 깃든 입은 살짝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기분은 좋네요. 고맙습니다. 그럼 기꺼이…….”


예나가 루치안의 손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으로 능숙하게 치마 자락을 쥐고 걷기 시작하자, 루치안은 다시 한 번 그녀를 놀라움의 눈으로 보았다.


“귀족 집에서 태어나거나 자랐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도대체 이런 예절들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엄마가 좀 엄격하셔서요.”


“흐응…….”


뭔가 더 말이 있을 줄 알았으나 루치안은 그저 가늘게 눈을 뜨고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나가면서 지나가는 친구들마다 붙잡으며 말했다.


“아, 이쪽은 짐 나르는 친구예요. 한스라고, 정말 평범한 이름이죠? 얼굴도 평범하고. 어어, 그렇게 죽일 것처럼 노려보지 말라고, 아가씨가 놀라잖아? 여기는 한스의 단짝 데르첸. 한스가 화내면 항상 말려 주는데, 내가 화내게 하는 건 이제 포기했다고 하더군요. 한두 번이 아니라서 지쳤다나. 그렇게 고개 젓지 마, 데르첸. 늙은이 같다고. 아, 뭐 그렇다고 평소에 젊어 보인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쪽은 안나예요. 아름답지요? 이 성 최고미인이랍니다. 어, 그러고 보니 둘이 좀 닮았군요. 미인끼리는 비슷한가 봐요? 안나, 안나, 그렇게 노려보지만 않으면 훨씬 인상이 나아질 거라니까요. 그로자 부인은 어디 계십니까? 아, 네, 고마워요. 자자, 위층으로 갑시다, 예나 씨. 한스, 그 촛대는 거기 있을 게 아닙니다. 연회장으로 가져가세요. 안녕하세요, 네이트? 예나 씨, 이쪽은 옷에 관련된 부분을 맡고 있는 네이트 씨라고 합니다. 귀여운 조수들은 어디 가셨습니까? 원래 쌍둥이 자매가 조수로 있거든요. 헬라와 메둘라라고 하죠. 나중에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을 겁니다. 상당히 눈에 띄거든요. 아, 이분요? 이따가 영주님이 돌아오시면 정식으로 소개할 겁니다만, 예나 씨라고 합니다. 예나…… 성이 뭐였죠?”


“클로비츠요.”


정신없이 말하던 도중에 물은 질문이라 순간적으로 말이 막힐 뻔했지만, 그럭저럭 잘 받아넘긴 것 같았다. 예나의 말에 루치안은 “예나 클로비츠군요. 자꾸 잊어버리네.” 하면서 다시 이야기하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이었지만 루치안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스쳐간 것도 같았다. 예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루치안이 계속해서 소개하는 성 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데 몰두했다. 그 후로도 몸집이 풍부해서 척 보고 알 수 있는 요리사 소네틴, 꽤 맵시를 내고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무슨 일을 할까 궁금했지만 결국 요리사 조수로 밝혀진 미오리타, 그리고 그녀의 오빠라고 하며 조명과 인테리어를 담당하고 있다는 레이낙스, 또다른 요리사 조수이자 팔뚝이 굵고 한스보다 더 힘이 세어 보이는 파울 등 당장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을 소개받았다. 그로자 부인이 있다는 3층까지 가는 데에 이만큼 만났으니 거기에서 더 올라가거나, 거기에서 다시 나올 때에도 인사할 사람이 남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로자 부인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예나를 맞아 주었다. 잠을 얌전히 자는 모양이라고 하면서 붕대를 풀어 주고, 사람들은 좀 봤느냐고 묻기에 루치안의 행태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로자 부인의 반응은 데르첸과 비슷했다. 웃는 표정이 조금 더 부드럽다는 정도만 다를 뿐이었다.


“그래, 사람들 인상은 어떻던가요?”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서…… 나중에 다시 한 번 천천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은 다들 웃으면서 반갑게 인사해 주셔서 좋았어요. 다들 젊고 미남미녀시던데요, 게다가.”


“젊고 미남미녀라……. 그렇긴 하지요. 아직 어린 아가씨다 보니 그런 부분이 먼저 보이는 모양이에요?”


“참,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여자 고용인들은 그로자 부인께서 통솔하신답니다. 지내면서 불편한 점이 있거나 하면 저를 찾으셔도 되지만, 저한테 말하기 좀 그런 부분은 부인께 여쭈면 될 겁니다.”


그로자 부인이 붕대를 다시 감아 주는 동안 루치안이 다시 끼어들었다. 예나는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어서 알았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문득 소개를 해 주는 당사자에 대한 궁금증이 치밀어 물었다.


“그런데 루치안 씨는 담당이 뭐예요?”


“저요?”


다시금 루치안의 눈이 가늘어지며 반짝였다.


“소위 집사라고 하기도 하고, 시종장이라고 하기도 하죠. 아니, 원래 다른 역할인데 그냥 능력 좋은 제가 다하는 거라는 게 진실.”


“와, 나이도 많지 않으신 것 같은데, 정말 능력 있으신가 봐요.”


그 말에 그로자 부인과 루치안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그렇죠, 능력 있죠, 암요. 예나 씨는 진실을 알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아, 정말 오랜만에 웃어 보는군요. 예나 양, 앞으로도 기대하겠어요.”


“네? 뭘요?”


그로자 부인과 루치안은 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더욱더 크게 웃었다. 그리고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계속 웃어 대기만 해서 화난 예나의 입이 점점 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고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아, 영주님 침실을 봐야 하는데…….”


“짐이 더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데 잊고 있었네. 예나 씨,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알았어요.”


“예쁜 얼굴 망가지니까 입 좀 집어넣고.”


루치안이 머리에 손을 얹고 슥슥 쓰다듬고 도망가듯이 자리를 떴다. 예나는 왜 한스가 만날 루치안에게 화를 낸다고 하는지,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왜 미워하는 기색이 없었는지 잠깐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자니 시간이 잘 갔다. 예나는 바른 자세로 앉아 있다가, 엉덩이가 욱신거려서 잠깐 허리를 틀었다가, 다리를 좌우로 한 번씩 뻗었다가, 일어났다가, 걸었다가, 다시 앉았다. 방에는 책 한 권 없었고 그저 깃털 펜과 잉크병과 종이가 놓인 커다란 책상과 의자뿐이었다. 그로자 부인의 방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삭막한 풍경이었다. 심심해서 죽을 것 같은 풍경이기도 했다.


‘왜 이리 안 와.’


다시금 일어나서 서성거리면서 예나는 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루치안이 편지를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할아버지의 편지를 보고 완전히 힘이 빠져서 이 성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여 버렸는데, 루치안은 묻지도 않고 그냥 당연한 듯이 예나를 소개시키고 다닌다. 예나가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다 아는 것처럼. 예나에게 주기 전에 루치안이 편지를 뜯어 봤다면 봉인도 무사하지 않을 테니 그건 아닐 것 같고.


하지만 할아버지의 봉인을 루치안이 갖고 있다면? 하지만 왜? 어떻게? 할아버지의 봉인은 그렇다 쳐도 할아버지의 글씨까지 흉내 내서 여기에 묶어 놨다고 생각하기엔 좀 이상하다. 아주 폭력적이고 어두운 가정을 하지 않는 한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방법도 없다. 할아버지와 예나에게 재산이 있을 리도 없고, 영주님의 성에서 재산을 탐내서 이런 방법을 동원할 리도 없고, 그렇다고 예나를 탐내서 이렇게 했다고 보기에는 이 성에서 예나가 오길 기다렸던 사람도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열여덟 살이 된 다음에는 데려간다, 다른 조건도 있었다고 한다면 마치 신부감을 데려가는 듯한 계약인데, 이 성에서 예나를 제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바로 그 영주님인 것 같으니 말이다. 계약은 했지만 막상 보니까 맘에 안 든다는 뜻일까?


갑자기 기분이 팍 상했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 물론 배경 같은 면에서는 가진 거 하나도 없긴 하지만 이 정도면 교육도 잘 받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얼굴도 못나진 않았고 성격상 큰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빠지는 게 어디 있다고!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그래서 영주님이 맘에 들어서 신부감으로 데려가려고 해도 좋다는 거야?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이 나은 것 같기도 하네.


왜? 아무리 성격이 이상해도 영주님인데다 외모도 그만하면 괜찮지 않아? 아니지, 그만하면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 네가 이제까지 본 남자 중 제일 미남이잖아. 말은 바로 해야지.


무슨 소리야, 아무리 미남이라고 그런 성격을 용서해 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차라리 조금 덜 미남이지만 루치안이 따뜻하고 친절하고 위트도 있고 훨씬 낫겠다.


그래도 두 번이나 구해 주고 약속도 지켰잖아.


그건 그래. 그리고 뭔가 다른 약속도 했던 것 같은데……. 무슨 약속이었더라?


할아버지나 엄마가 없을 때 혼자서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버릇 그대로 논쟁을 벌이던 예나 안의 두 아가씨는, 그 문제에 부딪혀 갑자기 침묵했다. 약속은 지킨다고 하고, 뭔가 약속을 한 것 같은데, 깨어나서 다시 되새기지 않았더니 꿈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정말 뭔가 말도 안 되고 영주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말이었는데…….


“엄마!”


엄마 같은 말은 아니었고…… 응?


갑자기 쨍 하는 소리를 내며 예나 속의 두 아가씨는 아예 사라져 버렸다. 예나보다 약간 어려 보이는 얼굴에 금발을 양 갈래로 느슨하게 묶은 여자 아이가 문을 확 열고 들어오면서 지른 소리였다.


“엄마! 어? 넌 누구야?”


그러는 넌 누구니?


예나는 바로 그렇게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막았다. 질문을 받았을 때 답을 하지 않고 질문으로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상대가 예의를 지키지 않았더라도 자신까지 예의를 어기는 것은 상대와 똑같은 자리로 스스로 내려가는 것이다. 엄마의 교육은 철저했다.


“예나. 예나 클로비츠.”


하지만 나이도 알 수 없고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을 만나서 처음부터 존대말을 하기에는 또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아! 새로 온 애가 너야? 반가워어!”


아무래도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은 예나에 대해 말은 다 들은 모양이었다. 각각 반응이 다르긴 해도 예나의 이름을 듣는 순간 다들 알고 있었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격렬한 반응은 처음이었다. 여자 아이는 단숨에 문에서부터 예나에게로 돌진하더니 바로 앞에서 폴짝 뛰어서 예나의 목을 껴안고 늘어졌다.


“반가워! 반가워! 난 카일라라고 해!”


왜 그렇게 반가워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와! 이젠 내가 막내 아니다!”


확실히 이제까지 본 사람들은 적어도 스물은 넘은 것 같았으므로 카일라라는 이 아이가 막내라는 데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나중에 들어온 걸로는 막내일지 몰라도 카일라보다 예나가 나이가 적다는 건 좀 믿기 힘들었다. 예나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카일라가 바로 떨어지더니 선수를 쳤다.


“응? 아니라는 거야? 너 아무리 봐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걸?”


“몇 살인데? 요?”


어머니, 왜 절 이리 교육하셨나요.


“180살. 넌 몇 살이야?”


18……0?


잠깐 사색이 됐던 예나는 곧 기운을 차리고 웃었다. 아마도 이 아이가 0을 하나 더 붙여서 말하는 것일 테지. 가끔 물건을 사거나 할 때 이런 식으로 농담을 해서 엄청난 가격을 부른 후, 사색이 되는 예나 얼굴을 보고 즐기는 가게 주인도 있었던 터라 그런 거려니 싶었다.


“아하, 나도 180살.”


그렇다 해도 동갑이라니, 약간 의외였다. 카일라는 잠깐 얼굴을 찌푸리고서 끙끙대더니 다시 얼굴이 환해져서 소리쳤다.


“그래도 늦게 들어왔으니까 내가 언니지?!”


“선배님이라면 몰라도 언니는 좀 이상하다.”


“그럼 선배님!”


“네, 네.”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엄마 못 봤어?”


“엄마? 누구? 그로자 부인?”


“응응!”


끄덕끄덕끄덕끄덕. 대답은 두 번에 고개는 네 번 끄덕이고, 목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동작도 격렬하다. 아무리 봐도 동갑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이 귀여워 예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영주님 침실 가신다던가…… 그러면서 가셨는데.”


“그렇구나……. 엄마 없으면 누구한테 부탁하지. 참!”


“응?”


“엄마는 근데 우리 엄마 아냐! 낳은 엄마는 아닌데 그래도 엄마라고 불러도 된댔어! 엄마한테 가서 이르지 마!”


누가 물어봤니.


그로자 부인이 여자들을 보살펴 주는 역할을 맡고 있으니 아마도 그래서일 테지. 카일라라는 아이는 고아인 모양이었다. 예나는 퍼뜩 할아버지의 편지를 생각하고,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반성해, 예나. 그래도 그분이 널 키워주셨잖니.


그때 카일라가 동그란 눈에 열의를 담고 예나를 흔들었다. 눈동자만이 아니라 팔동작에도 열의가 넘쳤다.


“에나?”


“예나야.”


“응, 예나랬잖아.”


“에나라고 하지 않았어?”


“예나라고 했어!”


“알았어. 근데 왜 불렀어?”


“웅…… 있잖아.”


“응.”


“화장실 좀 같이 가 주라!”


“응?”


열여덟 살이라더니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


“다른 사람들은 네가 나이가 몇이냐고 놀리기만 하고 안 가 준단 말이야. 넌 내 선배님이니까 같이 가자고 하면 그냥 가야 돼! 맞지?”


“아니, 네가 내 선배님인 거겠지. 그런데 정말 화장실?”


“응, 화장실. 화장실 무서워.”


성에 처음 와 보는 예나는 화장실이 왜 무서운 데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부탁이라고 말하고 실제로는 어느새 강제로 끌고 가고 있는 카일라의 발길을 보아하니 성의 화장실이란 상당히 어둡고 구석진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카일라는 기분이 좋은지 가면서 계속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뭐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갑자기 예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카일라의 패턴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어서, 예나는 가면서도 정신머리가 없어서 다시 오는 길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예나는 아예 먼저 말을 시켜 보기로 했다.


“그런데 카일라가 180살이면 딴 사람들은 몇 살이나 된 거야?”


“응? 음, 안나는 190살밖에 안 됐으면서 나 보고 진짜 애기 취급해! 칫, 차이 나면 얼마나 난다고. 그리고 한스도 200살밖에 안 됐다? 파울도 그 얼굴에 220살이라니 너무 이상해. 완전 아저씨야, 아저씨. 그래도 멋있으니까 이 말 이르지 마? 그리고…….”


그대로 놔두면 또 마구 이상한 길로 흘러가게 생겼다.


“그럼 루치안은 어때? 젊은데 굉장히 일을 많이 하던걸?”


“젊긴 뭐가 젊어!”


카일라는 세상에서 제일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주인님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걸? 400살은 됐을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능글능글 구렁구렁 미끈미끈하지!”


능글능글 구렁구렁 미끈미끈이라는 원초적인 표현보다도, 400살이라는 숫자보다도 더 황망한 건 ‘주인님 다음으로’ 라는 말이다. 예나는 왠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럼 영주님은?”


“500살도 넘어!”



==============================

안녕하세요!
아직 금요일이 아니지만 금요일에 아마도 시간이 없을 듯하여
미리 올립니다.
미리 올려 버리면 다음 월요일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져서 좋진 않지만
그래도 늦게 올리는 것보다야... 라고 생각 중.
그럼 월요일에 뵈요~


댓글 '12'

수룡

2005.11.18 00:43:24

로설 사상 가장 많은 나이 차이 커플 탄생인가용? ㅎㅎ;

mirage

2005.11.18 08:58:04

ㅋㅋㅋ
구렁이 무리에 들어온 개구리...인건가요?
그나저나 카일라는 아무래도 나중에 구박을 받지 싶네요...

노리코

2005.11.18 09:19:31

이상한게 아니라 정신없는 것인 아닐지..-_-
그나저나 정말 가장 나이차 많이 나는 커플이군요.. ㅋㅋㅋㅋ

사비나

2005.11.18 12:39:29

오호~500살과 18살이라.......뭐 나이야 뭔 상관이겠습니까...정신연령이 중요하죠......ㅎㅎㅎㅎ

자하

2005.11.18 13:28:16

푸하하, 무려 로설 사상 가장 나이차 많은 커플인 겁니까! 이렇게 된 이상 더욱 정진해야겠 (응?)

Miney

2005.11.18 13:46:30

그러네요. 마족들이 드글드글한 성에 들어온 제물 아가씨;로군요. 예나를 지켜주기로 한 성주님은 특별히 흥미를 보이 건 아닌(혹은 일부러 안 가지려고 하는) 거 같지만. 누가 잡아먹던 먼저 유혹해서 잡아먹는 게 임자, 라던지 그런 걸까요? ^^; 그래도 다들 친절하게 해줘서 다행입니다.

자하

2005.11.18 13:58:50

Miney/ 와하하; (아무 대답 없이 웃음만)

위니

2005.11.18 22:39:07

500살.....그래도 그토록 멋지다면...도전해볼만..ㅎㅎㅎㅎ;

파수꾼

2005.11.20 17:35:31

사랑엔 나이가 없다!!!
난 거버할수있음!!! 자하님 예나가 싫다면 주인공을 저로 교체 시켜주세요.!!

자하

2005.11.20 20:27:19

위니/ 우후후후후후후후후후 (...)
파수꾼/ 덜덜덜, 파수꾼과 영주님이라니 무언가 우화성 BL 같잖습니까(...)
=========
현재는 일요일 출근 중. 이래서 내일 올릴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ㅠ_ㅠ

수룡

2005.11.21 01:12:00

자하님 홧튕! +ㅁ+!!!

Junk

2005.12.08 14:02:22

역대 로맨스 중에 가장 남주와 여주 나이차가 많이 나는 작품이 될 듯...-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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