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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마가 앉은 성
숲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길을 마차 한 대가 달려가고 있었다. 작은 마을을 둘러싼 숲을 지나 점점 위로 올라가는 오르막이었지만, 완만하면서도 평탄하게 잘 닦여 있어서 마차가 지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마차 안에는 갈색의 곱슬머리를 정성껏 빗어서 하나로 묶고, 장식도 없고 옷감도 거칠지만 깨끗한 긴 옷을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작은 돌멩이에 마차가 덜컹 튀어오를 때마다 작게 비명을 지르며 허리에 손을 댔지만, 흔들림이 지나가면 체념한 듯 다시 얌전히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호기심 어린 초록 눈동자만이 마차 안과, 창문 밖을 부지런히 훑어 내렸다.
마차는 원래 4인승은 되어 보였다. 여자가 혼자 앉아 있기에는 과분하도록 널찍하고 푹신했다. 게다가 안에 있는 물건마다 모두 최고급인 것 같았다. 다만 창에 달린 커튼도, 의자에 씌운 공단도 모두 검은색, 또는 검은색에 가까운 빨간색이라 음침하고 때도 안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오점으로 보였다. 빡빡하고 어두운 숲 안이라 그림자까지 창문 안으로 넘어들어와, 어둠에 한 겹을 더했다.
몇 분쯤 지나자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어둠에 빛이 섞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숲이 옅어지는 걸 보니 거의 외곽인 모양이었다. 여자는 조금 더 창문 옆으로 가까이 붙어 밖을 내다보았다. 숲이 옅어지면서 낮도 옅어졌는지 빛 또한 푸르게 시들어 갔다. 마지막 햇살과 어우러져 붉고 푸르게 층이 진 하늘을 등지고 가운데가 푹 들어가고 양쪽으로 높은 절벽이 보였다. 그 푹 들어간 가운데에 성이 하나 있었다. 해자로 연결된 정문과 그 양옆에 기둥처럼 높은 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그 옆으로 연결된 두꺼운 벽과 그 뒤로 솟은 본탑에 그 다음으로 눈길이 갔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다시 한눈으로 보고 여자는 숨을 들이켰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순간, 성이 쭈그리고 앉은 악마처럼, 그리고 그 뒤의 절벽이 성으로부터 뻗어 나온 날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얼른 마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 얌전히 앉았다. 단지 한순간 착각한 것인데도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마차는 숲을 나가서도 조금 더 앞으로 가다가 멈췄다. 다시 여자가 밖을 내다보니 성문이 열리면서 무거운 쇠사슬에 매달린 문이 다리가 되는 광경이 보였다. 숲에서 다리까지는 점점 길이 좁아졌다.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것만큼 좁아져서야 겨우 다리랑 연결되는 걸 조금 앞에서 확인한 여자는 다시 또 고개를 집어넣었다. 흔들흔들 심하게 흔들리는 마차도 불안한데, 해자의 푸른 물이 넘실넘실대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육중한 쇠사슬로 지탱되는 다리 위로 올라가자 여자는 다시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쇠사슬의 크기에 감탄하는 놀라움이 배어나왔다. 신기한 것을 처음 구경하는 어린아이처럼 자꾸 창문을 내다보았다가, 고개를 집어넣었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완전히 창문 밖으로 몸을 빼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차가 문루 아래, 겹겹이 겹쳐진 창살 문과, 격자문, 대문과, 그 뒤 겹문을 통과하여 다리 내리는 도르레 옆을 지나가는 동안 내내 그러고 있었다. 눈동자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모든 걸 눈에 담아 둘 듯이 시선으로 훑었다.
마차가 성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그 시선은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 개 등의 가축으로 옮겨 갔다. 긴 옷에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이 웃으면서 가다가 마차를 보고 손짓하자, 여자는 다시 마차 안으로 숨었다. 하지만 곧 마차 문이 열렸다. 여자는 구석에 앉아 있다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마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폴짝 뛰어내려 버렸다.
마부가 손짓하는 쪽을 보자, 멀리서 보았던 성의 본탑이 아주 가까이에서 보였다. 양 옆으로는 치마를 두른 듯 회랑과 기둥이 이어졌고, 오른쪽으로는 말과 개가, 왼쪽으로는 음식 재료가 한창 날라지고 있는 것을 보니 회랑 안쪽으로 각각 마구간과 주방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이것저것 구경하고 싶어서 몸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매정한 마부가 커다란 보퉁이를 마차 뒤편에서 꺼내 떠안더니 얼른 따라오라고 소리를 쳤다. 여자는 여전히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면서 그 뒤를 따랐다. 너무 뒤처졌다고 혼 한 번 나고, 뒤처진 걸 만회하려고 성큼성큼 걷다가 마부의 뒤꿈치를 밟기도 했다. 사람 좋게 생긴 마부는 화내지 않았지만 여자는 몹시 미안해했고, 그 뒤에 다시 똑같은 사고를 세 번쯤 더 일으켰다. 그러나 여자의 표정을 보고 마부는 계속 용인해 주었다.
여자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것처럼 본관의 문을 보고, 기둥을 보고, 바닥을 보고, 천장을 보았다. 흑단으로 만든 무겁고 높은 양여닫이 문을, 그 문 뒤에 나타난 넓은 홀을 지탱하는 벽돌 기둥을, 어두운 색이지만 화려한 기하학적 무늬가 수놓아진 양탄자와 그 밑으로 보이는, 누르면 들어갈 것처럼 매끈하게 깎은 나무판과 넓적하고 깨끗한 돌로 된 바닥을, 벽돌 기둥끼리 아치를 이루며 교차하는 천장을 보았다. 오른쪽으로는 기둥과 높이가 같은 색유리창이, 마지막 햇살을 홀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었고, 왼쪽으로는 어둑한 복도가 이어졌다. 마부는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양쪽으로 흑단은 아니지만 튼튼하고 장식조각까지 되어 있는 나무 문이 늘어서 있었고, 복도 끝에는 계단이 있었다. 복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직각으로 휘면서 다시 이어졌지만, 마부가 계단을 오르는 바람에 그쪽은 계단을 오르면서 애써 고개를 돌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곧 계단 벽에 걸린 램프에 마음을 뺏겼다. 돋을새김으로 우아하게 꽃잎을 표현한 램프는 그 빛이 닿는 공간을 묵직하게 고풍스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여자는 다시금 마부의 재촉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여자는 두 층을 올라가서 마부가 가리킨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주위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가 방에 들어갔다는 것을 인식한 감각은 시각이 아니라 촉각이었다. 돌바닥에 깔린 모피와, 그 위를 장식한 붉은 비단. 발 밑으로 푹신한 감촉이 느껴지자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야 돌아보니 그 방은 커다란 창과 그 앞의 커다란 책상, 뒤로 돌아 있는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의자 외에 가구란 긴 의자와 의자 몇 개뿐이라 전체적으로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는 방이었는데, 부드럽고 따스한 바닥보만으로 공기가 훨씬 넉넉해지는 느낌이었다.
큰 책상 앞에 젊은 남자가 서 있다가 여자가 들어오자 반기듯이 팔을 벌렸다. 긴 조끼와 튜닉을 입고 머리에는 납작한 모자를 쓴, 그다지 차림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여자는 안내인인가 싶어 빤히 쳐다봤다가 그가 웃자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금발에 초록색 눈이 따뜻하게 보이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웃는 모습을 보면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들었다. 아니, 눈이었던가?
“예나 씨죠? 이쪽에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곧 부인께서 오실 겁니다.”
예나는 신기하게 그를 쳐다보면서 그가 가리킨 긴 의자에 앉았다. 그는 잠깐 예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큰 책상 앞에 편한 의자를 하나 갖다 놓더니 그쪽으로 손짓했다. 의자의 위치를 보고 예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하면 안 돼. 긴장하면 안 돼.
“고맙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숙녀에게나 하듯이 예나가 앉자 의자를 밀어 넣어 주었다. 지금 이 자리가 식사 자리도 아니고, 예나는 이곳에 고용되러 온 사람이고, 그는 그저 그런 하인으로 보였기에 조금 우스웠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 너무나 자연스러웠기에 예나도 배운 대로 정중하게 답하며 앉았다. 그의 눈에 잠시 놀라는 빛이 스쳐갔다.
“잘 어울리시는군요.”
“네?”
몸을 똑바로 하고 한껏 긴장하고 있던 예나는 그의 뜬금없는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팔짱을 끼고 예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짓궂어 보였다. 예나는 고양이를 떠올리면서 반문했다.
“뭐가 잘 어울린다는 말씀이시죠?”
“예나 양은 오늘 반드시 고용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네?”
그렇다면야 좋은 일이지만 역시 뜬금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예나는 멀쩡하게 생겨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성에서는 보이는 그대로를 믿으면 안 되거든요. 그런 면에서 잘 어울린다는 말씀입니다.”
“아, 네.”
더 이상 반문하면 실례가 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예나의 머리는 점점 더 헝클어지고 있었다. 보이는 그대로를 믿으면 안 되는 성이라고? 그럼 뭘 믿어야 하는 성인 거지? 이 성 이상한 곳인 거야? 아니면 이렇게 어둡고 무시무시하지만 밝고 살 만한 성이라는 거야? 게다가 그런 면에서 잘 어울린다니, 이거 칭찬일까?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고 한다면 예나의 초라한 옷차림에 대고 하는 말일까, 그냥 순수하게 예나의 예절에 놀라서 하는 말일까?
남의 의도를 곡해하거나 부풀리는 것은 좋지 않다. 예나는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예나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가 휙 돌아섰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예나는 그가 자기 인사에 기분이 나쁜 것 같아서 당황했다. 잠깐 떨다가 돌아서는 그의 눈에는 눈물까지 살짝 맺혀 있었다. 예나는 두 배로 당황했다. 자기 인사가 울 만큼 분한 일이란 말인가!
“인사는 나중에 할 기회가 있을 것 같군요. 그럼 저는 이만.”
떨리는 것을 감추려고 낮게 깐 목소리까지 들으니 예나의 정신은 더욱 멀리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면접도 보기 전에 화내는 사람이 생기는 걸까.
그가 다시 몸을 돌려서 천천히 나가고 나자, 장식이 적은 갈색 드레스를 입은 노부인이 들어왔다. 부인은 나가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서 계속 그쪽만 보다가 나중에야 사과를 했다.
“이런, 미안해요. 기다리게 했군요. 워낙 진기한 걸 봐서…….”
진기한 것이라니. 그 사람은 아무래도 평소에는 화를 내거나 어깨를 떨지 않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침착하고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라든가,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초록 눈동자를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
“루치안이 저렇게 웃다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웃는 거였다니.
웃는 거였다니.
예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부인이 흔들었을 때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아가씨? 아가씨?”
“아, 네……. 죄송합니다.”
“편히 앉도록 해요. 나는 에우제네 그로자라고 해요. 보통 그로자 부인이라고 부르니까, 아가씨도 그렇게 불러 주시면 좋겠군요.”
그로자 부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예나 쪽으로 다가오더니, 책상에 있는 의자에 앉지 않고 다른 의자를 끌어다 예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다정하고 따뜻한 몸짓으로 예나의 손을 가져가 자기 손에 얹었다. 예나는 부인이 너무 스스럼없고 다정하게 다가와서 잠깐 놀랐다. 하지만 부인의 약간 메마른 손, 솜털 같은 백발, 정겨운 주름살을 보고 있으니,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부인의 손 움직임을 느끼고 있으니 금방 마음이 편해졌다. 예나가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짓자 그로자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가씨 이름을 말해 보세요.”
“예나 클로비츠예요.”
“그 이름이 맞나요?”
이름을 말하자마자 바로 반문이 들어오자 예나는 그로자 부인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부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예나는 부인을 이상하게 보는 자신이 더 수상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끄덕거렸다.
“네, 맞아요.”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자랐고,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이야기해 주겠어요?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네. 음, 저는 열두 살때까지는 엄마랑 둘이서 테르비낙 숲에서 살았고요. 열두 살에 엄마랑 헤어진 다음에는 할아버지랑 같이 브나스카야로 와서 살았습니다. 엄마랑 살 때는 숲에 둘만 있었기 때문에 고기를 저장하는 법부터 옷을 짓는 법까지 집안에서 하는 일은 거의 다 배웠고, 엄마가 굉장히 엄격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절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여기에서 예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마차를 타고 여기에 오기 전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너는 예쁜 아이야, 예나야. 내 손녀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이다. 그러니까 어딜 가서든 잘살 수 있을 거야. 잘 가라.’
“할아버지께서, 이곳에 일자리를 알아봐 놨다고 하셔서…….”
단순히 그런 것 치고는 할아버지의 태도가 너무나 숙연했고, 단순히 고용되러 오는 사람에게 마차까지 내준 이 성의 태도는 너무 수상했지만. 예나는 잠깐 고개를 떨어뜨리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도 뭔가 물어보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예나를 마차에 태워 버렸고, 마차에 탄 이후에는 당연히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니 조금 친숙해지기 전까지는 이런 건 물어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아가씨가 제일 잘하는 건 뭔가요?”
“집안일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읽고 쓰기도 배웠고요. 그밖에도 교양이라고 엄마가 가르쳐 주신 게 조금…….”
“그런가요. 그럼 아가씨는 어디에 배치되는 게 좋을까…….”
“그건 내 권한인 것 같은데, 제니.”
어디에 배치될지를 안 정했다니, 보통은 모자라는 부분이 있어서 사람을 부르는 게 아닌가 생각하던 예나는 난데없는 남자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할 곳은 자신이 들어온 문밖에 없었는데, 목소리는 아무래도 앞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과연 앞에 창문 쪽으로 돌아 있던 의자에서 남자가 일어났다.
“어머나, 영주님.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 계셨나요?”
사람 놀라게 한다는 타박이 섞여 있긴 했지만 그 사람을 부르는 그로자 부인의 말투는 기본적으로 따뜻했다. 영주님이 그녀를 부르는 방식부터 심하게 친근하긴 했다. 예나는 처음으로 보는 브나스카야의 영주 앞에서 벌떡 일어서서 인사했다.
“예, 예나 클로비츠입니다.”
“들었어.”
그 말투가 예나에게 답할 때는 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퉁명스러웠다. 예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 자리에 앉아 버렸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갑작스러운 한기가 겹쳐서 앞이 핑 돌았다.
“얼굴, 들어 봐.”
다시 영주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몹시 무례하고 거만하면서도 자신의 말에 상대가 따를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예나는 ‘정말 무례하군요! 숙녀가 이름을 밝히면 자기 이름도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요? 게다가 얼굴을 들라니, 내가 당신 소유물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마치 말 시장에 가서 이빨을 보게 입을 벌리라고 하는 것 같은 말투잖아요!’ 라고 팔팔 뛰는 자기 안의 어떤 아가씨를 꾸욱 눌렀다.
안 돼, 안 돼. 이 사람은 진짜로 고용주에다 우리 마을 영주님이란 말이야. 엄마에게 교육받은 대로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예나는 억지로 얼굴을 들었다. 방긋방긋 웃는 것까지는 못해도 평정을 가장하고 얼굴을 드는 데에도 얼마나 큰 힘이 드는지 처음 알았다. 무례하고 거만한 영주란 작자를 그때 처음 봤다.
예나는 그가 일어서자 밀려 온 한기가 목소리에서만 비롯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영주님은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드리운, 키가 큰 남자였다. 여름을 갓 지난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속에 무엇을 입었는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길고 깃이 높게 선 망토를 치렁치렁 감고 있었고, 조금 밖으로 드러낸 손에도 두꺼운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입가에 비웃음처럼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놀랍게도 얼굴은 젊고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햇볕에 그을린 마을 남자들에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창백하고 흠집 없는 피부와, 선이 거칠지 않은 눈썹, 그 밑에 있는 크고 짙은 눈은 한 번만 봐도 사람 눈에 도장처럼 찍혀 잊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인데도 예나의 첫 감상은 ‘춥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차가움’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손짓에서, 목소리에서 저 숲의 눈보라 같은 한기가 스며 나와, 그 앞에 오래 있으면 겨울에 얇은 옷 입고 밖에 나가 손 들고 서 있는 벌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래,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네, 네!”
“이 성에서는 가끔 연회가 열리지. 50인 분의 새끼 양 구이와 연어 절임, 샐러드를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나?”
예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걸 혼자서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새끼 양 구이와 연어 절임이라니, 어릴 때 엄마에게 말로만 듣고 본 적도 없는 요리다!
“아뇨…….”
“읽고 쓰기를 할 줄 안다고 했지. 쓸 수 있는 단어 수는 몇 개나 되나?”
“그, 그건, 세 본 적은 없지만…….”
“회계 장부를 작성하고 성의 물품 목록을 관리할 수 있겠나?”
“목록은 할 수 있겠지만, 회계라니 뭘…….”
“사람을 부려 본 경력은?”
이제까지 엄마나 할아버지와만 살아 왔던 열여덟 살 소녀에게 너무 바라는 게 많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예나의 입이 점점 튀어나왔다.
“없습니다.”
“옷도 지을 줄 안다고 했지. 지금 내가 신고 있는 것 같은 거 만들 수 있나?”
자랑하듯이 영주님은 다리 한쪽을 망토 밖으로 내밀었다. 최고급 가죽을 여러 번 무두질해서 부드럽게 만든 후, 발에서 발목과 종아리까지 딱 맞게 감싸도록 잘 재단해서 만든 부츠로, 한눈에 봐도 최고의 솜씨를 가진 장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옷이 아닌데요. 영주님 지금 입고 계신 망토 같은 건 만들 수 있어요.”
“지금 내게 시비 거는 건가?”
영주님의 말투가 한층 더 차가워지자 예나는 자기 입을 후회했다. 누르고 눌러도 안에 들어 있던 아가씨는 힘이 센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영주님이 대는 예는 자신에게 꼬투리를 잡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말 잘하는 건 하나도 없잖아? 침대나 데우는 건 어때?”
“네? 하지만 저 체온 낮은 편인데요.”
그 말에 처음으로 영주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쪽만 올라갔기에 분명 비웃음의 의미였다.
“돌려 말하면 모르는 건가? 잠자리 시중 말이야. 아니, 이 정도도 못 알아들으려나?”
예나는 지금 자기 얼굴에 이는 불길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알 수 있는 건 그 불길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는 것, 그래서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 한순간 마음속의 그 아가씨가 물 위로 올라와서 손을 움직였다는 것, 그래서 결과적으로 감히 자신이 영주님의 뺨을 갈겼다는 것이었다. 더 나쁜 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영주님의 얼굴이 돌아가자마자 머리에서 그 불길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예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놀라고 분하고 당황해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발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계속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되뇌이면서 도망갈 뿐이었다.
이제 끝이야. 이런 성에 누가 있어 줄 줄 알고! 처음에 악마가 앉은 성처럼 보일 때 알아봤어야 했어, 이 성엔 악마가 살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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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따뜻하게 맞아 주신 데 힘입어 빨리 올렸습니다.
프롤로그에서 기대한 분위기가 아니라 실망하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계속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 주세요!
이번에 들은 곡은 스티브 바라캇의 Flying 이었습니다.
이렇게 조급하게 올려 버렸으니 다음 편은 언제나 올릴 수 있을지 장담을 못하겠네요. 최선을 다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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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이라니요~ 이렇게 빨리 다음편을 주시다니 정말 감동뿐입니다..
아아~ 이런 빠른 연재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죠...작가님들은 반성하라~ 반성하라~
타의모범으로 자하님을 강력추천~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