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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일렁여 엄마의 옆얼굴에 근심처럼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예나는 엄마가 움직이는 모양을 보면서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정확히 인형처럼은 아니었다. 엄마를 따라 눈만은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작지만 탄탄하게 지은 통나무 바닥과 벽. 통나무를 잘라 만든 탁자와 의자. 따뜻하게 타오르는 벽난로. 가지런하게 장작을 쌓아놓은 벽으로 엄마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온 집 안을 한손에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엄마가 있으니 걱정 없어. 예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폭풍 따위는 금방 지나가 버릴 거야. 나는 안전한 집 안에 있고 제아무리 센 바람이라도 여기까지 들어오진 못할 거야.
예나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엄마가 옆에 와서 무릎담요를 하나 더 얹어 주었다. 몹시 추워서 밖에 나갈 수도 없는 밤이었지만, 예나는 깨끗한 천으로 만든 잠옷을 입고 나무로 만든 커다란 의자에 앉아 벽난로의 온기를 즐기고 있었다. 마음은 전혀 즐겁지 않더라도 온기에는 감사해야 하는 법이니까.
예나는 물끄러미 엄마를 바라보았다. 다른 곳을 보면 더 무서워질 것만 같아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예나의 곁을 떠나 집안일을 마저 하고는, 빠뜨린 것이 하나도 없는지 다 점검해 보고 나서야 예나의 옆으로 돌아왔다.
“무섭니, 우리 예나?”
엄마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예나는 긴장했다. 엄마는 아름답고 섬세했지만 그만큼 엄격했다. 처음은 그동안 배운 예법에 맞게 답해야만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니요. 견딜 만합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잘했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도 좋아.”
“무서워요…….”
엄마의 눈이 자랑스럽다는 듯, 기쁘다는 듯 반짝였다. 엄마는 예나의 팔에 보호대를 감아 주고 다정하게 그것을 두드렸다.
“괜찮아. 폭풍이 아무리 세도 이 집은 끄떡없어. 아무 걱정 안 해도 된단다.”
하지만 무서운걸요.
바람 소리가 저렇게 무시무시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집은 고작 나무로 만들었을 뿐이잖아요. 집을 지어 준 아빠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이 집에는 엄마랑 나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게다가 아까부터 바람 소리에 섞여서 이상한 짐승 울음소리가 들리잖아요. 숲 깊은 곳에서부터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잖아요. 그것도 똑바로.
예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다가 닫고, 다시 열려다가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여러 말들이 입까지 왔다가는 무엇엔가 놀라서 다시 마음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도대체 무엇에?
엄마는 그런 예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차분히 바라보면서 예나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끝내 예나의 입이 떨어지지 않자 다시 달래듯 말을 꺼냈다.
“우리 예나가 계속 무서워하는 것 같네. 그럼 엄마가 왜 안 무서워해도 되는지 이야기해 줄까?”
예나는 엄마가 그 말을 꺼낸 순간 갑자기 모든 소리가 희미하게 벽 뒤편으로 물러나는 느낌을 받았다. 달리 말하면 소리를 내며 무심하게 돌아가던 세상이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는 것 같기도 했다. 예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덜 무서워지기는커녕 정말로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얼른 괜찮다고 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나의 입은 예나보다 다른 것을 더 무서워했다.
“예나, 엄마가 이 근처 영지를 왜 좋아하는지 알지?”
알았다. 그러나 예나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이야기가 뭐든 간에 듣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예나의 입은 이번에도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고 단 한 음절만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
“네.”
“참 아름다운 곳이지, 브나스카야는. 꼭 내 고향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어른이 말씀하실 때는 눈을 약간 내려 뜨고, 그러면서도 조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게 대답을 해야 한다. 예나는 이런 때에도 배운 대로 행동하는 자기 몸이 미웠다.
“눈이 오고 폭풍이 치는 날도 많지만, 그런 때에도 튼튼히 견딜 수 있는 기술을 쌓아 왔으니. 게다가 그런 날에 브나스카야는 더욱 아름답지. 잿빛 바위들 사이로 떨어지는 빗줄기라든가, 하얀 눈은 정말…….”
아름답지 않아. 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무시무시한 바람과 얼어붙은 바닥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현장이지, 아름답다고 말할 만큼 여유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오늘의 엄마는 이상했다. 그곳의 위험을 모를 엄마가 아닌데. 엄마는 어느덧 예나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것은 따로 있지. 예나, 이 세상에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사람보다 더 오랫동안 살아온 존재들이 있단다.”
예나는 손을 모아 쥐려고 했다. 그러나 입처럼 손도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의 변해 가는 눈빛과 열띤 목소리에 정말로 기도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는데도.
“사람들이 알면서도 옛날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그런 존재들 말이지. 그들은 실제로 있단다. 짐승의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짐승으로 변하는 주술사들, 하룻밤 동안 내내 솥 주위를 돌면서 주문을 외워서 번개를 불러오는 마녀들, 숲 한가운데에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노는 요정들과 흉측한 난쟁이들…….”
엄마의 목소리가 약간 변한 것도 같았다. 목소리가 낮은 편이지만 항상 또박또박 힘을 주어 발음해서 엄격하면서도 쾌활하게 들렸던 엄마의 목소리가 땅에서 살짝 떠오른 느낌이었다. 예나는 엄마가 자신과 비슷하게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개 사라졌지. 남은 것들도 사람을 무서워하니까 꼭꼭 숨어 버렸고. 마녀나 주술사는 사람들 사이로 숨고.”
예나는 그제야 마녀라는 말을 이전에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했다. 가끔 엄마가 아랫마을에 갔다가 많이 다쳐서 올 때가 있었는데, 그런 때 잠든 엄마를 간호하다 보면 엄마의 입에서 듣던 소리였다. 난 마녀가 아니야 라고. 정말 엄마는 마녀가 아닐 것이다. 하룻밤 내내 솥 주위를 돈다고 번개가 떨어질 리가 없고, 그렇게 도는 것도 본 적이 없으니까. 엄마는 아름답고 섬세했지만 그만큼 엄격했다. 그뿐이었다.
“숨지 않은 건 밤을 손에 쥔 자들뿐이었어.”
갑자기 엄마가 목소리를 낮췄다. 무서운 이야기의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으로 접어들 때처럼. 예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런데 분명히 무섭지 않게 해 줄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었나?
“숨을 필요가 없었지. 그들에게는 힘이 있으니까. 짐승으로 변해 봤자 무력하게 몽둥이 찜질이나 당하는 주술사나, 솥을 지키고 있다가 그 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는 마녀들이랑 다른 진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게다가 아둔한 인간들은 그들의 존재도 모르고 있고. 바로 거기에 있는데 말이야! 바로 거기, 어둠 속에, 벽 그림자 뒤에, 인간들 바로 옆에…….
그들은 밤의 제왕이란다. 언제나 인간을 매혹시킬 줄 아는 제왕. 오랜 세월을 쌓아 온 그 눈을 보고 압도당하지 않는 인간은 없을 거야. 그 세월만큼 인간보다 월등한 지혜를 품고 있기도 하지. 게다가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그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을 거라는 점이란다. “
그 말을 마치고 엄마는 예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예나도 엄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가 요새 걱정하던 잔주름들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예나는 언제나 엄마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얼굴을 보니 그 잔주름과 무거운 표정이 얼마나 엄마의 미모를 깎아 먹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원래 새파랗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눈동자는 알고 보니 빛이 바랜 거였다.
“정말 좋겠지?”
예나는 머뭇거렸다. 동의를 구하는 것 같은 말의 내용과는 달리, 엄마의 말투는 ‘그렇다고 대답하면 죽을 줄 알아.’라고 이중으로 말하는 듯했다. 다행히 엄마는 예나가 대답하기 전에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아주 불행했어. 왜인지 알아? 그들은 모두 신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야. 사실 그들이 죽을 수 없게 된 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거든. 늙지도, 죽지도 못하고 해가 뜬 하늘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영원히 그대로 살리라! 인간의 피만이 살아도 살지 않은 그 생을 유지할 터이니, 그것마저 없어졌을 때에는 무로 돌아가리라!”
예나는 흠칫 놀랐다. 말을 하면서 엄마가 벌떡 일어서서 놀랐고, 천천히 원을 그리면서 걷고 있어서 놀랐다. 엄마가 걸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만들고 있는 원은, 커다란 솥이 하나 딱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 이야기까지 한 거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라?”
엄마는 잠깐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말하더니 예나를 향해 돌아섰다. 예나는 엄마의 입술이 참 예쁘고 새빨갛다고 생각했다.
마치 피를 머금은 듯이.
“그렇지, 참. 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지 알려 준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 덜 무서워지기는커녕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었다. 예나는 지금 엄마가 너무 무서웠다. 눈앞에 있는 여자가 정말로 엄마가 맞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름답고 섬세하고 엄격한 엄마는 저렇게 하얗고 팽팽한 얼굴도 아니고, 기분 나쁘게 입술만 찌익 늘려서 미소를 짓지도 않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저렇게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넌 아무것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단다, 얘야, 예나야. 네가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 안다면 널 가지고 싶어서 세상 끝에서라도 몰려올 밤의 제왕이 널렸으니까 말이지. 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 그저 네…….”
그때 예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보던 무심한 세상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말하지 마.
“시끄러워!”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절규처럼, 비명처럼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엄마도 들은 게 분명했다. 거역할 수 없는 무게를 담고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듯한 저 한마디를.
하지 마.
“시끄러워! 난 가르쳐 줄 거야! 당신 뜻대로 될 줄 알아?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았어!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하지 마.
예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떨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엄마도, 나직하게 스며들어오는 저 목소리도 예나에게는 그저 낯설 뿐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폭풍이 칠 뿐, 오늘은 그저 어제와 같은 평범한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는 날이긴 했다.
“예나! 내 말 잘 들어! 넌 네 이름을 기억해야 해! 네 이름은……!”
그 이상 말하면 끝이다.
그 말에는 엄마도 잠깐 멈췄다. 그러나 어느새 핏발이 선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네 이름은, 예나 더브 메이다니…….”
끝이다.
집 전체가 흔들렸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집을 지나쳐 가던 폭풍이 발길을 멈추고 이 집을 돌아본 것일까? 갑자기 온 창문이 흔들리고 문이 덜컥거렸다. 어쩌면 폭풍이 아니라 짐승의 발톱 같기도 했다. 저 소리는 바람 소리가 아니라 짐승의 발톱이 나무에 긁히는 소리이고, 짐승이 털을 세우고 목을 울리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예나 더브 메이다니 오즈리크. 잊지 마라, 예나, 절대로…….”
갑자기 힘이 빠진 듯 엄마의 말끝이 흐려졌다. 엄마는 문 밖에 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듯했다. 예나의 머리 한구석에도 그것이 뭔지 아는 누군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목소리가 의자에서 일어나라고, 달아나라고, 창문을 깨고라도 도망가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입술조차 떨어지지 않는데 몸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 예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의자에 앉은 채 엄마를 한 번 보고, 점점 더 심하게 흔들리는 문을 한 번 보고, 그렇게 양쪽으로 눈을 굴릴 뿐이었다.
흔들리고 흔들리다가 튼튼한 떡갈나무 문 한가운데가 퍽 터지는 소리가 났을 때, 엄마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생일 축하한다, 예나.”
그러니까 그날은 예나가 12살이 되는 날이었다.
다음 순간 문이 완전히 터지자 바람이 먼저 밀고 들어왔다. 큰 눈발이 바람과 동행했다. 무례하고 약삭빠른 그 두 손님 뒤로는 짐작했던 대로 하얗고 긴 털을 가진 네발 짐승들이 날카로운 발톱을 내밀며 들어왔다. 바람에 촛불이 꺼지고 조금 후에 벽난로의 불마저 꺼졌다. 바깥에 하얗게 쌓인 눈이 반사하는 희미한 빛과 짐승의 눈이 내뿜는 붉은 빛만이 집 안을 비췄다.
그 빛을 막은 것은 사람 형체를 한 길고 긴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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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자하라고 해요.
살짝살짝 눈팅을 하다가 급기야 테러를 감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들 잘 부탁드려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안 날 것 같지만, 로맨스 맞습니다. 믿어 주세요.(...)
이 화는 Keedie의 All Because Of You 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썼어요. 가사는 거의 상관이 없었는데 "In candle light, I saw your face." 라는 단 한 부분 때문에...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들어 주세요.
그럼 곧 다시 뵙길 바라며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