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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95
소 문 - (1)
"그래서 어제 그 사람하고 밥 먹고 나이트까지 간 거예요?"
"응. 갔어. '모나코'에 갔는데, 내가 그 날 바보처럼 하고 나갔잖아. 화장품도 하나도 안 들고 가고……."
점심을 먹고 난 후의 짧은 휴식시간.
동수는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히고 조는 척을 하며 수다를 떨기 위해 디자인팀에 온 3D팀 팀장인 지영과 그의 옆자리에서 일하는 동화 일러스트 담당, 경미가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아, 선배, 근데 '바비 브라운'꺼 그거 어때요?"
"어, 야.. 그거 진짜 좋더라. 색깔도 무지 이쁘고……."
아니나 다를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강 알아듣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금세 이야기의 주제를 바꿔버렸다. 감은 두 눈 위로 동수의 눈썹이 중앙으로 살짝 모아졌다.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려면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했다.
"어머, 나도 그거 하나 장만할까? 아니다, 나 '맥'에 찍어둔 립스틱 하나 있는데, 그걸로 살까?"
아하, 화장품 이야기.
그의 미간이 펴졌다.
화장품 이야기는 약 5분 동안 계속되었다.
"정말 괜찮다니까. 나도 맨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봐봐. 내 피부 이전에 비해서 훨씬 좋아지지 않았냐?"
"어, 분명히 나아졌어. 그러지 말고, 나도 좀 선배 담당자한테 소개 시켜줘요. 좀 비싸더라도 써보게."
"그래. 두 달 후면 정말 감쪽같아진다니까."
"아, 그래서 잘 될 것 같아요?"
"글쎄……."
이 시점에서 또다시 화제가 바뀐 듯 했다. 동수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잘 된다는 소리지?
"뭐, 나쁘지는 않아. 그래도 '필'은 안 오더라."
아.
이야기는 또 다시 처음의 '그 사람'에 대한 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지영이 드디어 소개팅에서 한 건 올린 모양이었다. 동수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선배, 근데 그거 진짤까?"
"뭐?"
갑자기 대화가 중단되었다.
동수는 혹시나 사장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슬쩍 한 쪽 눈을 떴다. 하지만 주변에는 수다를 떨고 있는 두 여자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아! 걔?"
대화를 멈춘 것이 아니라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귓속말을 한 모양이다.
"모르지. 보기에는 전혀 안 그래 보이잖아."
"그래도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진짜일지도 모르죠."
순간 동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간혹 이렇게 머리를 식히고 있을 때 들리는 이야기 속에 누군가의 뒷담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던 것이다. 물론 대개의 수다 속에는 늘 누군가의 뒷담이 꼭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게 바로 수다의 로망이 아니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긴, 남자들한테만 보이는 어떤 매력이 있을지도 몰라."
"맞아. 원래 걔 입술이 좀 퇴폐적이잖아요."
퇴폐적?
그는 갑자기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둘이서만 속닥인 것으로 봐서는 분명히 이곳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과연 누가 '퇴폐적'인 입술을 갖고 있을까? 동수의 머릿속에 ‘퇴폐적인 입술’을 가졌다고 할만한 주변 여자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사귀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진짜 빵빵하다는 거."
"내 말이! 그건 진짜 못 믿겠던데요."
"무슨 재벌 집 아들에, 잘 나가는 벤처기업 사장에, 요새 주가 최고로 오른 펀드매니저에……. 야야, 걔가 그런 남자를 꿰차고 있으면, 난 빌 게이츠 하고 사귀겠다."
"근데, 혹시 그 전화한 '재혁'이 그 '재혁' 아녜요?"
"무슨 재혁?"
"지산그룹 둘째 아들, 오재혁. 그 사람."
"야, 설마……."
"아무래도 이상하잖아요. 그 누구냐, 은형씨가 하는 말 안 들었어? 우리나라 5대 기업 중 하나, 최근 재산상속으로 심기가 불편하고, 유학파에, 미남에, 능력 있고 어쩌고……."
"그래, 맞아떨어지긴 하지만……, 인정하긴 싫다, 야."
두 사람은 다시 대화를 멈췄다. 동수는 혹시 이야기가 계속되면 누구에 대한 건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귀를 쫑긋했지만, 이번에는 속닥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멈춘 것 같았다.
"저어, 지영선배. 컴퓨터가 이상한데, 좀 봐주실래요?"
등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서 대화를 멈춘 것이다.
"아, 그래요, 좀 있다 갈게요. 잠시만……."
동수는 흘끔 지영을 보았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끼어 든 사람이 자리를 뜨자, 두 사람은 재빨리 머리를 모아 소곤댔다.
"봤어요? 진짜 퇴폐적인 입술 아녜요?"
"야, 그건 니가 그렇게 보니까 그런 거지."
설마.
"진짜야. 잘 봐요. 도톰한 게 화장 잘 하면 진짜 퇴폐적으로 보일 입술이라니까."
설마.
두 사람은 책상 칸막이 너머로 목을 쭈욱 빼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후다닥 고개를 다시 숙였다.
"듣고 보니 진짜 좀 그러네……."
"그쵸? 그쵸?"
아까 뒤에서 얼쩡댔던 아가씨가 누구지?
그는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분명히 아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왠지 가물가물했던 것이다.
"으아아~"
동수는 막 잠에서 깨어났다는 듯이 한껏 기지개를 폈다. 그러자 옆에서 소곤대던 두 사람이 황급하게 말을 멈췄다.
"어머, 팀장님, 깨셨어요?"
경미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좀 더 자지 그랬어? 내가 사장 오면 깨워준다고 그랬잖아."
이 회사 뒷담계의 큰손이자, 그의 지긋지긋한 벗, 지영이었다.
"조잘조잘 그렇게 떠드는 데 내가 어떻게 잠을 자냐."
동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우리 얘기 다 들었어?"
지영이 난처하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장난기가 솟았다.
"그럼, 들었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 마냥 침묵했다. 동수는 지영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의 얼굴은 신호등이다.
파란색, 기분 좋음, 뭐든지 오케이, 당신을 사랑해.
노란색, 조울증 증세 있음. 혹은 생리중.
빨간색, 위험물, 폭발물, 독극물, 가까이 오지 마시오, 목숨을 장담 못함, 기타 등등.
얼굴 표정으로 모든 심리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영이를 놀리는 것은 푹신한 소파에 앉아 리모콘으로 TV채널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만큼 쉽고 재미있다는 뜻이다. 이제 약 삼 초 후면, 노란불은 곧바로 빨간불로 변할 것이다. 그건 나름대로 꽤나 골치 아픈 일이다.
그는 웃음을 참고 멀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소개팅에서 재벌 집 아들 만났다고?"
뭔가에 맞은 듯, 지영과 경미의 얼굴은 멍한 표정으로 변했다.
"뭐?"
"아냐?"
땡땡, 노란불이 깜박이더니, 곧바로 선명한 초록색 불이 켜졌다.
"우하하하하하!"
지영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경미가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 그는 표정관리를 위해 얼굴근육에 힘을 주며 약간 무안하다는 느낌을 실어 말했다.
"아님 말구."
지영은 계속 낄낄댔다.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이 역력했다.
제어를 못 할 정도의 수다쟁이에, 단순함의 극치, 거기에 회사 내 모든 소문의 메카인 지영이었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최고의 친구다. 그가 지영이에게 만큼은 모든 것을 내보일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한 이유는 그녀가 전혀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편안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다혈질이긴 했지만, 충분히 이성적이고, 의외로 상당히 쿨한 구석이 있기도 했다. 한때 미묘한 관계이긴 했지만, 지영은 한순간의 연애질로 잃을만한 친구는 아니었다.
‘네놈이 바람둥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친해지지도 않았을 거야.’
졸업식 후에 친구놈 둘, 그리고 지영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떡이 되도록 취한 그녀가 한 말이다. 그것이 지영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이자 찬사라는 것을 동수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얄팍하긴 해도 넌 항상 진심이잖냐. 거짓이 아닌 진심’
"참, 정신 좀 봐. 잠깐만,"
지영의 얼굴에 만연한 초록 불을 보며 한참 생각에 잠겼던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에게 말했다.
"현정씨, 컴퓨터가 뭐 어떻게 됐다구?"
'컴퓨터'란 말에 동수의 얼굴이 일순간 싹 굳었다.
…현정?
주현정?
설마 그 얼빵한 아가씨?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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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밍 프린스의 등장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습니다. --;
중간에 넘어서야 제대로 등장한다고나 할까요;;
그때까지는.. 사뭇 재수없는 왕자병 환자일 뿐일 겁니다. ㅜ.ㅡ
개인적으로 전 은형과 지영같은 조연들을 좋아합니다.
홀라당 발라당 까진 선수 은형,
다소 사내같지만 여성의 수다파워를 보여주는 뒷담계의 여왕 지영.
제 친구들의 모습이지요.
이름을 교묘하게 바꿨지만,
(제 친구들이 여기에 올 리도 없지만 소심해서... ㅜ.ㅡ)
만일 녀석들이 본다면 당분간 은둔을 해야할 지도 모르겠네요.
일주일에 두 편을 올릴 것인데,
그 사이에 막힌 부분을 빨리 뚫어야겠습니다.
건투를 빌어주세요. ^^;
그다지 행복하지 않는 우울한 월요일에,
제이리 올림.
(월요일은 무.조.건. 싫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