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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은 힘들다.
사실 그래서 가치 있고,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며, 그래서 아마 더 절실하기도 할 것이다. 환상 속의 사랑, 자기애의 다른 방법, 피학적인 취향의 하나. 그 어느 성질을 가져다 붙여도 좋다. 결국은 환상이기 때문에 가질 수 없고, 결국은 상대에게 뒤집어씌운 자기의 이상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이 되기 힘들며, 그 애틋한 고통이야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여자의 스물아홉은 힘들다.
기혼여성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미혼인 경우에는……. 나는 단 한 번의 스물 아홉 살의 6개월을 사춘기 겪듯이 앓았다. 서른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남은 젊은 혼을 씻어내리 듯, 나는 아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혹독한 성인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인식의 이름이 바로, '이십대의 마지막 짝사랑'이다.
스물 아홉 여자의 짝사랑은 매우 힘들다. 그냥 짝사랑보다도, 여자의 스물 아홉 살의 열두 달보다도 훨씬 힘들다.
어린 풋사랑이야 순수함의 상징, 그리움의 대상, 더 이상 어리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되었을 곱씹을 수 있는 삶의 위안일 것이다. 반면에 스물아홉의 짝사랑은 어리석음의 훈장이고 미성숙의 상징이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이십대와 삼십대, 그 미묘한 기준점에서의 마지막 아노미였다.
강동수.
같은 회사, 같은 사무실, 같은 팀에서 일하고 같이 밥을 먹는 사람. 내 앞의 칸막이 너머에서 늘 정신없이 코골며 자는 남자. 바로 내가 짝사랑하는 상대다.
그는 내가 입사한 지 6개월이 넘도록 내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워낙 내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의 주변에는 신경을 써줘야 할 여자들이 너무 많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나의 이름은 '저기', 혹은 '이봐요.'다. 그리고 둘 다 소속해있는 회사, <N&J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그가 이름을 부르지 않는, 혹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는 나 하나뿐이다.
하긴. 내 옆자리 앉아있는 애교 만점의 경미씨, 3D 팀에 있는 정지숙 팀장과 은주씨, 어떤 남자가 봐도 침을 흘릴만한 쭉쭉방빵 미녀인 김인영 마케팅팀장까지, 공공연하게 그를 낚아채기를 바라는 여자들은 내 주변만 봐도 넘쳐흘렀다.
나는 코맹맹이 목소리로 말끝을 살짝 올려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미씨처럼 애교도 없고, 수다쟁이지만 재치 있는 말발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지숙씨나, 청순한 분위기로 늘 에스코트를 받는 은주씨 같은 매력도 없을뿐더러, 김팀장처럼 솔직하고 자신만만한 섹시함도 없었다. 이러저러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잡다한 이유로 나는 스스로 '그의 여자' 후보의 후보도 꿈꾸지 않았다.
하지만 점심시간 이후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코고는 소리, 볼펜을 똑딱이는 소리, 하품을 하거나 몰래 사장을 욕하는 소리 등,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그가 있었다. 특히 책상 밑으로 살짝 그의 발이 내 발을 스칠 때 느끼는 묘한 설렘. 그건 소심한 내가 가질 수 있는 전부였고, 나는 그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나는 남들보다 더한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가 핸드폰으로 지숙씨와 영화관에 갈 약속을 하는 소리나, 누군가를 '자기야'라고 부르는 소리 등을 혼자 들어야만 했으니까. 뿐만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여자들에게서 걸려오는 수많은 전화내용도 모두 나만이 알고 있었다.
짝사랑은 그런 거다. 항상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의 한숨소리, 작은 웃음소리에 행복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짝사랑이 가르쳐주는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이다.
"짝사랑은 바보나 하는 짓이야."
은형이 TV앞에 엎드려 노트에 무언가 적으면서 말했다.
"심장에 피가 흐른다, 이것아. 꼭 그렇게 잔인하게 찔러야겠어?"
"흥. 너두 참 바보야. 남들은 남자 갈아치우면서 연애하는데, 넌 남자 갈아치우면서 짝사랑을 하냐?"
"그만 좀 해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땅 치며 후회하고, 니 앞에 넓죽 엎드려서 도와달라고 하잖아."
은형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래그래. 알았어."
사실 은형에게 있어 짝사랑은 '바보짓'이 아니라 '불가능한 짓'이다. 그녀는 점쟁이도 혀를 내두를 만큼 '도화성'이란 것을 타고난 사람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남자가 꼬이는 그녀를 볼 때면 가끔 '헤프다'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내심으로는 무척 부러웠다. 그런 친구랑 같이 살면 그 '도화'의 일부분이 나한테도 옮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까.
언젠가 그녀에게 '도대체 넌 남자 어떻게 꼬셔?'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은형은 '눈빛'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눈빛에 대담함과 자신감, 여성스러움과 경멸, 모두가 담겨야 한다고도 말했다. 내 눈에 그런 것을 다 쑤셔 넣으려면, 엄청난 성형수술이 필요할 거라고 멍청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좋다. 대담함, 자신감, 여성스러움. 여기까지는 이해한다고 치자. 그런데 경멸은 또 뭔가? 나는 그게 궁금해서 은형에게 물어봤다.
- 예를 들자. 어느 바에 내가 친구랑 앉아있었어. 그리고 건너편에 남자 셋이 앉아있었지. 그 중 하나가 마음에 들지 뭐야?
- 그래서?
- 그래서 쳐다봤지.
- 그랬는데?
- 그랬더니 우리한테 칵테일 사주더라.
- 잉? 어떻게 쳐다만 보고 그럴 수 있어?
그때 은형은 웃으며 대답했다.
- 간단해. 남자들, 특히 성공했다 싶은 남자들은 호승심이 강한 편이야. 여자도 꽤나 꿰차고 있다고 자부할 테지. 그 남자도 분명히 그런 부류였어.
- 그런데?
- 난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그 사람을 쳐다봤지. 그 사람도 날 쳐다보더라.
- 그래서?
- 사람은 말이지, 서로 눈을 응시할 때 대개 두 가지 의도를 품어. 첫 번째는 위압을 주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유혹하기 위해서야.
- 그 때는 뭐야?
- 둘 다.
유혹하기 위해서 라고만 확신했던 나는 순간 당황했었다.
-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 일종의 싸움이야. 누가 먼저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느냐. 거기에 두 사람의 관계에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가 달려 있거든.
그녀의 이야기는 그 어떤 철학책보다도 난해했다.
- 대개는 그렇게 생각하지.
- 응?
- 아마, 그 남자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게다가 남자들이란 원래 그러거든. 처음 만나서 악수할 때, 일종의 기싸움을 하잖아.
- 응.
전혀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그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 대답했다.
- 그런 걸 상기시키는 눈싸움을 했지. 그 사람이 그런 종류의 싸움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려고.
- 그래서?
- 이제 결정 날 때가 왔다 싶을 때, 난 시선을 돌렸어.
- 뭐야, 니가 진 거야?
- 아니.
- 그럼 뭐야?
- 내가 시선을 돌렸다고 하는 건, <당신을 탐색하는 건 이미 끝났어요. 하지만 별로 그럴싸한 사람은 아니네요>란 의미야. 즉, <흥미 없는 사람이네> 라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거지.
- 오오!
- 그러면 상대는, 그 기싸움이 동등한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니란 것을 느끼게 되지. 나는 그 사람을 동등하게 본 것이 아니라 간택할 상대로 봤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야. 근데 웃긴 건, 그렇게 해서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나를 그럴만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지. 일종의 최면이랄까.
은형은 이런 여자다.
'눈빛'에 자신감, 대담함, 여성스러움, 거기에 경멸까지 담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현재, 나의 '20대 마지막 짝사랑'을 '연애'로 연결시켜 줄 황금열쇠, 믿음직한 작전참모다.
"나이, 서른 둘, 이름, 강동수, 고향, 서울, <N&J 프로덕션> 디자인팀 팀장."
그녀는 내가 읊었던 그의 신상명세를 적은 노트를 들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현재 잘 나가는 디자이너로, 이곳저곳에서 스카우트를 할 정도로 주가 높은 인재. 그 사람 사촌형이 너네 회사 사장이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끌려 들어왔음. 분명히 능력은 있지만, 대개 벼락치기를 하는 성격으로 사실은 약간 게으르다. 맞아?"
"엉. 프리랜서로 일했었으니까."
나는 나의 작전참모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빠진 거 있으면 말해. 적을 테니까."
"엉."
"음, 성격은 외향적으로 일단 주변에 여자가 많다."
"매우."
나는 강조하며 덧붙였다. 은형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문장 사이에 V표를 넣고 '매우'라고 적었다.
"여하튼, '매우' 여자가 많은 그는 이상하게도 헤어진 여자들과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맞아?"
"엉."
"흠……. 좋아."
은형은 또 뭔가를 썼다.
"에, 그리고 벼락치기를 하는 성격이라 일주일치 일을 하루에 몰아 밤샘하며 하고, 그 다음날 낮 동안 내내 회사에서 자는 경우가 많다. 맞아?"
"응."
그녀는 또다시 뭔가 적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됐어. 이제 다음 물어볼게."
"응."
"그 사람, 호기심 강해?"
"응. 뭔가 늘 관심 가는 거에 정신을 쏟느라 일을 못하는 거니까."
"그 사람, 집요해?"
"음, 아마도. 관심사에 흥미가 떨어질 때는 이미 다 샅샅이 해부한 후거든."
끄적끄적.
그녀와 나의 선문답은 계속 이어졌다. 은형은 그에 대한 질문이 끝나고도 계속 질문을 해댔다. 회사 사람들 하나하나에 대해 묻더니, 깨알만한 글씨로 메모를 하고,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고, 다시 질문했다.
그와 사귄 여자는 누구누구고, 누구는 이런 성격, 누구는 저런 성격, 누가 누구와 친하고, 누구와 누구는 앙숙, 입이 가장 싼 사람은 누구고, 그와 가장 친한 사람은 누구, 누구…….
그에 대한 질문이 아닌지라, 나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음. 그러면 일단 이걸로 시작하자. 현정아?"
그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져 내려앉았고, 은형의 질문도 서서히 꿈결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깨를 흔드는 것 같았지만, 이미 세포가 알아서 감각을 차단한 상태였다.
"…소문…수다…그러니까……."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의 의식은 현실과 완전히 차단되었다.
꿈을 꿨다.
나는 어느 바에 앉아있었다. 그 바는 형형색색의 온갖 불빛으로 가득한 현란한 무대, 그리고 그 무대는 권투 시합에서나 볼 수 있는 정사각형의 링이었다. 바 너머로 그가 나와 마주한 채 앉아있었다. 현실에서는 날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는 그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나는 묘한 성적흥분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헐떡였다.
그의 손가락이 앞에 놓인 칵테일 잔의 굴곡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고, 그에 따라 내 몸의 감각이 요동쳤다. 성적인 긴장감과 열망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차올라 쓰러질 지경이었다.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말했다.
"별 거 아니네."
나는 그 자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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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치를(...) 미리 올렸습니다.
써놓은 것이 줄어드는 속도가 무섭습니다. ㅜ.ㅡ
이번주는 외근 투성이라 너무 바쁘군요. 하아.
독감 조심하세요!
그리고 모두 즐거운 초봄 보내시길!
고향에는 벌써 진달래가 핀 지 오래라는 소식이 왔답니다. ㅜ.ㅡ
제이리 올림.
짝사랑은 힘들다.
사실 그래서 가치 있고,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며, 그래서 아마 더 절실하기도 할 것이다. 환상 속의 사랑, 자기애의 다른 방법, 피학적인 취향의 하나. 그 어느 성질을 가져다 붙여도 좋다. 결국은 환상이기 때문에 가질 수 없고, 결국은 상대에게 뒤집어씌운 자기의 이상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이 되기 힘들며, 그 애틋한 고통이야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여자의 스물아홉은 힘들다.
기혼여성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미혼인 경우에는……. 나는 단 한 번의 스물 아홉 살의 6개월을 사춘기 겪듯이 앓았다. 서른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남은 젊은 혼을 씻어내리 듯, 나는 아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혹독한 성인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인식의 이름이 바로, '이십대의 마지막 짝사랑'이다.
스물 아홉 여자의 짝사랑은 매우 힘들다. 그냥 짝사랑보다도, 여자의 스물 아홉 살의 열두 달보다도 훨씬 힘들다.
어린 풋사랑이야 순수함의 상징, 그리움의 대상, 더 이상 어리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되었을 곱씹을 수 있는 삶의 위안일 것이다. 반면에 스물아홉의 짝사랑은 어리석음의 훈장이고 미성숙의 상징이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이십대와 삼십대, 그 미묘한 기준점에서의 마지막 아노미였다.
강동수.
같은 회사, 같은 사무실, 같은 팀에서 일하고 같이 밥을 먹는 사람. 내 앞의 칸막이 너머에서 늘 정신없이 코골며 자는 남자. 바로 내가 짝사랑하는 상대다.
그는 내가 입사한 지 6개월이 넘도록 내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워낙 내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의 주변에는 신경을 써줘야 할 여자들이 너무 많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나의 이름은 '저기', 혹은 '이봐요.'다. 그리고 둘 다 소속해있는 회사, <N&J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그가 이름을 부르지 않는, 혹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는 나 하나뿐이다.
하긴. 내 옆자리 앉아있는 애교 만점의 경미씨, 3D 팀에 있는 정지숙 팀장과 은주씨, 어떤 남자가 봐도 침을 흘릴만한 쭉쭉방빵 미녀인 김인영 마케팅팀장까지, 공공연하게 그를 낚아채기를 바라는 여자들은 내 주변만 봐도 넘쳐흘렀다.
나는 코맹맹이 목소리로 말끝을 살짝 올려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미씨처럼 애교도 없고, 수다쟁이지만 재치 있는 말발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지숙씨나, 청순한 분위기로 늘 에스코트를 받는 은주씨 같은 매력도 없을뿐더러, 김팀장처럼 솔직하고 자신만만한 섹시함도 없었다. 이러저러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잡다한 이유로 나는 스스로 '그의 여자' 후보의 후보도 꿈꾸지 않았다.
하지만 점심시간 이후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코고는 소리, 볼펜을 똑딱이는 소리, 하품을 하거나 몰래 사장을 욕하는 소리 등,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그가 있었다. 특히 책상 밑으로 살짝 그의 발이 내 발을 스칠 때 느끼는 묘한 설렘. 그건 소심한 내가 가질 수 있는 전부였고, 나는 그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나는 남들보다 더한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가 핸드폰으로 지숙씨와 영화관에 갈 약속을 하는 소리나, 누군가를 '자기야'라고 부르는 소리 등을 혼자 들어야만 했으니까. 뿐만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여자들에게서 걸려오는 수많은 전화내용도 모두 나만이 알고 있었다.
짝사랑은 그런 거다. 항상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의 한숨소리, 작은 웃음소리에 행복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짝사랑이 가르쳐주는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이다.
"짝사랑은 바보나 하는 짓이야."
은형이 TV앞에 엎드려 노트에 무언가 적으면서 말했다.
"심장에 피가 흐른다, 이것아. 꼭 그렇게 잔인하게 찔러야겠어?"
"흥. 너두 참 바보야. 남들은 남자 갈아치우면서 연애하는데, 넌 남자 갈아치우면서 짝사랑을 하냐?"
"그만 좀 해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땅 치며 후회하고, 니 앞에 넓죽 엎드려서 도와달라고 하잖아."
은형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래그래. 알았어."
사실 은형에게 있어 짝사랑은 '바보짓'이 아니라 '불가능한 짓'이다. 그녀는 점쟁이도 혀를 내두를 만큼 '도화성'이란 것을 타고난 사람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남자가 꼬이는 그녀를 볼 때면 가끔 '헤프다'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내심으로는 무척 부러웠다. 그런 친구랑 같이 살면 그 '도화'의 일부분이 나한테도 옮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까.
언젠가 그녀에게 '도대체 넌 남자 어떻게 꼬셔?'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은형은 '눈빛'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눈빛에 대담함과 자신감, 여성스러움과 경멸, 모두가 담겨야 한다고도 말했다. 내 눈에 그런 것을 다 쑤셔 넣으려면, 엄청난 성형수술이 필요할 거라고 멍청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좋다. 대담함, 자신감, 여성스러움. 여기까지는 이해한다고 치자. 그런데 경멸은 또 뭔가? 나는 그게 궁금해서 은형에게 물어봤다.
- 예를 들자. 어느 바에 내가 친구랑 앉아있었어. 그리고 건너편에 남자 셋이 앉아있었지. 그 중 하나가 마음에 들지 뭐야?
- 그래서?
- 그래서 쳐다봤지.
- 그랬는데?
- 그랬더니 우리한테 칵테일 사주더라.
- 잉? 어떻게 쳐다만 보고 그럴 수 있어?
그때 은형은 웃으며 대답했다.
- 간단해. 남자들, 특히 성공했다 싶은 남자들은 호승심이 강한 편이야. 여자도 꽤나 꿰차고 있다고 자부할 테지. 그 남자도 분명히 그런 부류였어.
- 그런데?
- 난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그 사람을 쳐다봤지. 그 사람도 날 쳐다보더라.
- 그래서?
- 사람은 말이지, 서로 눈을 응시할 때 대개 두 가지 의도를 품어. 첫 번째는 위압을 주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유혹하기 위해서야.
- 그 때는 뭐야?
- 둘 다.
유혹하기 위해서 라고만 확신했던 나는 순간 당황했었다.
-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 일종의 싸움이야. 누가 먼저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느냐. 거기에 두 사람의 관계에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가 달려 있거든.
그녀의 이야기는 그 어떤 철학책보다도 난해했다.
- 대개는 그렇게 생각하지.
- 응?
- 아마, 그 남자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게다가 남자들이란 원래 그러거든. 처음 만나서 악수할 때, 일종의 기싸움을 하잖아.
- 응.
전혀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그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 대답했다.
- 그런 걸 상기시키는 눈싸움을 했지. 그 사람이 그런 종류의 싸움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려고.
- 그래서?
- 이제 결정 날 때가 왔다 싶을 때, 난 시선을 돌렸어.
- 뭐야, 니가 진 거야?
- 아니.
- 그럼 뭐야?
- 내가 시선을 돌렸다고 하는 건, <당신을 탐색하는 건 이미 끝났어요. 하지만 별로 그럴싸한 사람은 아니네요>란 의미야. 즉, <흥미 없는 사람이네> 라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거지.
- 오오!
- 그러면 상대는, 그 기싸움이 동등한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니란 것을 느끼게 되지. 나는 그 사람을 동등하게 본 것이 아니라 간택할 상대로 봤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야. 근데 웃긴 건, 그렇게 해서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나를 그럴만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지. 일종의 최면이랄까.
은형은 이런 여자다.
'눈빛'에 자신감, 대담함, 여성스러움, 거기에 경멸까지 담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현재, 나의 '20대 마지막 짝사랑'을 '연애'로 연결시켜 줄 황금열쇠, 믿음직한 작전참모다.
"나이, 서른 둘, 이름, 강동수, 고향, 서울, <N&J 프로덕션> 디자인팀 팀장."
그녀는 내가 읊었던 그의 신상명세를 적은 노트를 들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현재 잘 나가는 디자이너로, 이곳저곳에서 스카우트를 할 정도로 주가 높은 인재. 그 사람 사촌형이 너네 회사 사장이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끌려 들어왔음. 분명히 능력은 있지만, 대개 벼락치기를 하는 성격으로 사실은 약간 게으르다. 맞아?"
"엉. 프리랜서로 일했었으니까."
나는 나의 작전참모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빠진 거 있으면 말해. 적을 테니까."
"엉."
"음, 성격은 외향적으로 일단 주변에 여자가 많다."
"매우."
나는 강조하며 덧붙였다. 은형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문장 사이에 V표를 넣고 '매우'라고 적었다.
"여하튼, '매우' 여자가 많은 그는 이상하게도 헤어진 여자들과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맞아?"
"엉."
"흠……. 좋아."
은형은 또 뭔가를 썼다.
"에, 그리고 벼락치기를 하는 성격이라 일주일치 일을 하루에 몰아 밤샘하며 하고, 그 다음날 낮 동안 내내 회사에서 자는 경우가 많다. 맞아?"
"응."
그녀는 또다시 뭔가 적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됐어. 이제 다음 물어볼게."
"응."
"그 사람, 호기심 강해?"
"응. 뭔가 늘 관심 가는 거에 정신을 쏟느라 일을 못하는 거니까."
"그 사람, 집요해?"
"음, 아마도. 관심사에 흥미가 떨어질 때는 이미 다 샅샅이 해부한 후거든."
끄적끄적.
그녀와 나의 선문답은 계속 이어졌다. 은형은 그에 대한 질문이 끝나고도 계속 질문을 해댔다. 회사 사람들 하나하나에 대해 묻더니, 깨알만한 글씨로 메모를 하고,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고, 다시 질문했다.
그와 사귄 여자는 누구누구고, 누구는 이런 성격, 누구는 저런 성격, 누가 누구와 친하고, 누구와 누구는 앙숙, 입이 가장 싼 사람은 누구고, 그와 가장 친한 사람은 누구, 누구…….
그에 대한 질문이 아닌지라, 나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음. 그러면 일단 이걸로 시작하자. 현정아?"
그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져 내려앉았고, 은형의 질문도 서서히 꿈결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깨를 흔드는 것 같았지만, 이미 세포가 알아서 감각을 차단한 상태였다.
"…소문…수다…그러니까……."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의 의식은 현실과 완전히 차단되었다.
꿈을 꿨다.
나는 어느 바에 앉아있었다. 그 바는 형형색색의 온갖 불빛으로 가득한 현란한 무대, 그리고 그 무대는 권투 시합에서나 볼 수 있는 정사각형의 링이었다. 바 너머로 그가 나와 마주한 채 앉아있었다. 현실에서는 날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는 그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나는 묘한 성적흥분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헐떡였다.
그의 손가락이 앞에 놓인 칵테일 잔의 굴곡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고, 그에 따라 내 몸의 감각이 요동쳤다. 성적인 긴장감과 열망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차올라 쓰러질 지경이었다.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말했다.
"별 거 아니네."
나는 그 자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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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치를(...) 미리 올렸습니다.
써놓은 것이 줄어드는 속도가 무섭습니다. ㅜ.ㅡ
이번주는 외근 투성이라 너무 바쁘군요. 하아.
독감 조심하세요!
그리고 모두 즐거운 초봄 보내시길!
고향에는 벌써 진달래가 핀 지 오래라는 소식이 왔답니다. ㅜ.ㅡ
제이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