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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이 방에서."
혈루는 방문을 열었다. 작은 방안은 트윈 베드 하나, 작은 책상과 의자 하나, 그리고 한 칸 짜리 옷장이 있는 극히 간소한 방이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혈루가 빙긋 웃으며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내 즐거움이에요."
묘하게 웃는 모습이 신경 쓰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유안은 방안으로 들어서서 책상 위에 서류와 노트북을 놓았다.
"식사는 바 부엌에서 알아서 해결해 주세요. 그리고 월이는 되도록 매일 밤마다 당신을 찾아올 거에요. 그건 그렇고, 그 아이가 우리 일족에 대해 뭐라고 하긴 하던가요?"
혈루가 재미있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유안은 짧게 고개를 젓고 서류를 정리하는데 몰두했다.
"그러리라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나랑 함께 있게 된 이상은 알아두는 편이 나을 거에요."
유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가는 서류더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혈루가 서 있던 문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놀랄 만큼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눈이었다. 너무 강렬하고 너무 크게 집중되어 있어서 오히려 감정이 전혀 읽히지 않는 눈. 그런 눈으로 유안이 차분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끌려 들어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를 끌어들일 생각도, 끌려들어올 거라는 생각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일은 저와 빨갱이 다... 아니, 적월 두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적월 덕에 모르는 일에 끌려 들어갔다고 해도 되겠죠."
"알겠어요."
혈루가 수긍했다. 저 차갑고 만만찮은 아가씨는 대답을 원하고 있지만, 그 대답을 해 주는 것은 아들이 될 것이다.
"화장실은 반대편이에요. 그리고 낮 동안 이 건물 어디든 돌아다녀도 좋아요. 바의 물건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고요."
"감사합니다."
유안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혈루가 그에 답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방을 나왔다. 혈루가 방을 나간 것을 확인한 유안은 방문을 닫고 정리한 서류를 한 쪽으로 치운 다음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털을 세우고 있는 고양이 같더구나. 아무래도 대가가 클 테지. 뭘 약속한 거니?"
"물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죠."
혈루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선천적인 거잖니 그건.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저 아가씨가 물줄기를 움직일 수 있을 수 있을지나 걱정되는구나."
적월이 빙긋 웃었다.
"재능은 제 걸 나눠 가졌으니 그걸로 되었고, 감각도 있는 것 같아요. 가르쳐 주면 나쁘지 않겠죠.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건 네 말이 맞구나. 알아보긴 했니?"
"설야 장로, 아니 설야 전 장로의 것이더군요."
적월이 헌원과 주영의 할머니인 설야의 이름을 댔다. 전대 수장이 살아있을 때의 장로이기도 했던 설야는 적월이 수장이 된 이후로 계속해서 은거 중이었다.
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핏줄을 중요시하는 우리 종족이지만, 그 아인 너무 자기 핏줄을 싸고도는 경향이 있었지. 헌원 쪽에서 도발했다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구나."
"누굴까요?"
적월이 드물게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딱히 누구에게 묻기 위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은 혈루가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감이 없는 아들을 키우진 않았단다. 빨리 알아내지 않으면 곤란해지는 것이 누구인지 설마 모르진 않겠지?"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결코 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신자를 추적하는 아들의 속내를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혈루는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그 아가씨는 어떻게 만난 게냐?"
"네?"
"네 벗 말이야. 짝짓기 상대도 아닌데 인간 아가씨를 불쑥 들이민 것은 그 아가씨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이겠지? 그런 상대라면 벗 밖에는 없잖니."
적월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의 날카로움과 솔직한 호기심은 때때로 그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시골길에서 만났어요. 그녀는 기어다니고 있었고, 저는 대구의 일이 이럭저럭 해결되어 올라오고 있었죠."
"그렇구나. 뭐 하는 아가씨니?"
"사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바쁘다는 것말고는 잘 모르겠어요."
"흐음. 아. 그 아가씨는 대답을 듣고 싶어하더구나."
적월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잊어주기를 바랬는데 역시 무리였던가?
"알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니? 이왕 이렇게까지 얽혔는데 말이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뭐, 약간 돌려 말하긴 했지만."
혈루가 피를 한 모금 마셨다. 냉동 보관된 피는 차갑고 기분 나쁜 여운을 남기며 식도를 한 번 휘감아 내려갔다. 적월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분간 참아주세요."
"정혈시설의 주요 부분은 거의 손상이 없었다고 했지?"
"반대를 하긴 하지만 정혈시설의 필요성만큼은 인정하는 거겠죠. 피의 오염은 앞으로도 계속될테니."
"그것도 그런 거지만. 흐음."
혈루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잠시 갸웃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그 아가씨에게 가 보렴. 네가 될 수 있는 대로 매일 밤 들를 거라고 말해 뒀단다. 게다가 그 아가씨에게 약속한 레슨을 하려면 일찍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 하구나."
"예."
어머니의 방을 나와 윗 층에 있는 유안의 방으로 향하는 적월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 유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대답하기에는 여러 가지 걸리는 것이 많았다.
어떻게 그녀의 질문을 돌려 막을지 고민하며 방문을 열자, 화면 가득 뜬 그래프에 몰두하며 뭔가 바쁘게 적고 있는 유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 닫아. 추워."
"그래."
적월은 순순히 문을 닫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대답을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비위를 맞춰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하던 일을 계속 하며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유안이 말을 이었다.
"잠깐만 앉아 있어 줘. 지난 분기 실적만 살펴보고."
"그래."
침대에 앉아 바라보는 유안의 뒷모습은 어쩐지 색달랐다. 찾아가면 항상 보게되는 일에 몰두한 모습이지만 이렇게 익숙한 공간에서 그녀의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쩐지 위화감이 드는 동시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유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말해줄 거야?"
"아니."
처음에는 돌려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런 서슴없는 대답이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약간 당황해서 말을 멈춘 적월과는 달리 유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디서 가르쳐 줄 거야?"
"응?"
"물 다루는 법."
어안이 벙벙하다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을 의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그 차가운 눈동자로 자신을 쏘아보며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적어도 몇 번은 언제 대답해 줄 건지에 대해서 묻기라도 할 줄 알았다.
"역시 욕실일까. 침대 쪽에 달려있는 문을 열면 이 방에 딸린 욕실로 갈 수 있어."
"아. 그런데 왜 화장실은 방 반대편인 거야?"
"이 층은 손님들이 쓰는 곳이야. 정확히 말하면 수장 회의가 열릴 때 각 나라의 수장들이 묵어 가는 곳이지. 우리들은 청결은 중요시 하지만 배변은 자주 하지 않거든."
유안이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밑에 있는 문을 열었다.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욕조와 좁은 샤워부스만 있는 작은 욕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월이 욕실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일단은 물줄기를 어떻게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는 지부터 배우는 것이 좋겠어."
"그만."
적월이 터져 버린 수도꼭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술자를 불러야겠어."
유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직접 고치는 것이 나을 것 같긴 하지만 난 지독하게 손재주가 없거든."
터져 버린 수도꼭지의 자리에서는 물이 흥건하게 고였다 만 채로 반쯤 출렁거리고 있었다. 적월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내가 처음 이걸 배웠을 때는 이렇게까지는 하지 못했어. 게다가 이 정도 비슷하게 만드는데 이틀이나 걸렸지."
일에 집중하는 그녀의 성격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능력에 있어서 이렇게까지 집중을 보일 줄은 몰랐다. 한 번도 기술을 남에게 가르쳐 본 적은 없지만 배우는 사람이 이 정도까지 열의를 가지고 있고 이렇게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면 가르쳐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누가 널 죽이려고 쫓지 않았었겠지."
차갑고 의표를 찌른,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 유안의 입에서 나오자 적월은 움찔했다.
"살아있는 것들은 목숨에 연관되면 누구나 필사적이 되고 초인적인 힘이 나오곤 하지. 자. 역류하는 법과 흐름을 막는 법 다음에는 뭘 배우면 되지?"
"일단 흐름을 조절하는 방법이겠지. 형상화는 그 다음이야. 자. 잘 봐."
적월이 흥건하게 고여있는 물을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려 잡아당겼다. 물줄기는 그대로 적월의 손가락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해. 원래 이 물줄기들은 이 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적월의 손가락이 위로 솟아올랐다가 아래로 내려앉자, 물줄기가 크게 출렁거렸다. 놀라운 것은 작은 물방울 하나도 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이 쪽으로 흐르게, 그리고 차분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이 관건이지."
적월이 물줄기를 잡지 않은 손으로 부서진 수도꼭지 쪽의 물줄기를 잘라냈다. 깔끔하게 잘려진 물줄기는 마치 짜장면 집의 길다란 면 반죽 같아 보였다. 물줄기라기 보다는 반죽 덩이가 된 물줄기를 양손으로 잡은 적월은 그것을 뭉쳤다.
"점토 찰흙 같아."
"이 정도까지 구사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형상화를 진행할 단계가 되는 거야. 자."
적월은 마치 패스하듯 물 공을 유안에게 넘겼다. 유안의 손에 떨어진 물 공은 그대로 산산 조각이 나서 욕실 바닥에서 부서졌다. 욕실 바닥에 고인 물을 바라보던 유안이 부서진 수도꼭지 사이에서 새고 있는 물을 손 하나 가득 받아내며 말했다.
"얼마나 걸렸어?"
"3년 정도."
손 안 가득 넘쳐나는 물을 바라보던 유안의 이마에는 땀이 배어있었다.
"단시간 내에 배우는 것은 무리야."
"어떻게든 해 내야지."
딱딱한 뒷모습은 낯설지 않은 모습이지만 낯설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어느새 그 마음이 불편해져 버렸다. 적월은 들었던 손을 내린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미안해."
"낮 동안에 연습해 볼게."
결연한 목소리가 어쩐지 자신을 꾸짖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적월이 욕실을 나왔다. 욕실에서는 부서진 수도꼭지를 통해 흐르는 물소리가 세차게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