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경비가 덤벼든 것과 회사 광고 모델의 차안에 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느 때와 비슷한 하루라는 생각이 들자, 유안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피식거리며 몸을 뒤로 기울이는 유안을 적월이 무표정한 눈으로 한 번 훑었다.

"괜찮으신가요?"

제이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코트를 여몄다. 길고 사각거리는 바바리 코트의 감촉이 차가웠지만 폭 파묻히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댁이 어디인 줄도 모르겠고, 이대로 가면 분명 집안 분들이 걱정하시겠죠. 그러니 옷이라고 갈아입고 가세요."

차가 멈췄다는 것을 안 유안은 몸을 바로 세웠다. 어두침침하고 차가 몇 대 보이는 것을 보니 지하 주차장 같았다.

"내려."
"무슨 일인지 알고 있지?"

적월은 차 문을 잡은 채로 잠시 모호한 눈길을 그녀에게 보낸 다음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말 해."
"일단 들어가서."
"먼저 무슨 일인지 말해봐."

그녀의 눈을 본 적월이 짧은 한숨을 쉬었고, 어느새 적월의 뒤에 와 있던 제이가 키득거렸다.

"큭큭. 아.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하지만 먼저 저희 집으로 들어가실 순 없을까요? 아내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유안이 정중하게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적월을 바라보는 눈길은 여전히 차고 강했다. 그 눈길이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제이의 집 문 앞에서도 이어지자 적월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서 와요. 어머."

지극히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환영의 말 뒤에 지극히 여성적인 감탄사가 따라 나왔다. 그리고 즐거이 노래하는 듯 한 한 마디.

"정말 오랜만이에요. 적월씨."


"아멜리에가?"
"피곤한지 자고 있어요. 하지만 옷 한 벌 정도는 빌려줄 수 있겠죠."

나지막하고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미령이 말했다. 그리고 유안을 향해 빙긋 웃었다.

"아멜리에의 옷이라면 당신한테 잘 맞을 거에요. 잠시만요."

미령이 현관에서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자 유안의 차고 강한 눈이 바로 적월을 향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봐."
"몰라."
"뭐?"
"널 찾아 왔더니 웬 경비원이 널 습격하더군. 그래서 찌른 것 뿐이야."

침착한 표정으로 말하는 적월의 모습을 본 유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 행여나."
"아직 널 죽게 놔두기에는 받아낼 것이 너무 많아."

적월이 짧게 한 마디 했다. 유안의 냉철하고 뚫어볼 듯한 눈동자가 그를 샅샅이 훑는 것이 느껴지자 적월은 몸을 굳혔다. 그리고 아까 느꼈던 강한 공포를 떠올렸다.
왜, 어쩌다가 습격당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흐느적거리며 그녀를 덮치는 미끼와 죽을 듯 얼음 기둥을 휘두르며 버둥거리는 유안의 모습이 눈에 담긴 순간, 어떻게든 그 미끼를 끝장내고 싶다는 마음 뿐.
간신히 냉정을 가장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심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떨고 있던 유안의 모습에 강한 분노가 느껴지면서 그 미끼를 아주 으스러뜨려 흔적도 남지 않게 만들어 버릴까 잠시 생각했었다. 그러나 차분해지면서 자신에게 따지고 드는 유안의 모습을 보자 안도감과 동시에 유안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죽기 직전에 몰려있던 사람답지 않은 차분함과 날카로움이었다. 조금쯤은 허둥대고, 조금쯤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건가?

"말을 안한 것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차분하게 유안이 말했다.

"몰라도 괜찮았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아서 가만있었지만 이젠 달라. 설명해 봐. 어쨌든 조금이라도 알고 있긴 한 거 아니야?"

침착하지만 강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유안의 눈빛을, 적월은 그냥 담담히 받아내기만 했다. 유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관련된 이상 이건 내 일이 된 거야. 그러니까 말 해 봐. 무슨 일인지."
"이걸 입어 보세요. 불편하시면 말씀하시고요."

옷을 들고 방밖으로 나온 미령에 의해 팽팽했던 긴장감이 잠시 깨졌다. 유안이 옷을 받아 들자 미령이 부드러운 미소를 띈 채 현관 맞은 편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갈아입으세요. 안 쪽에 화장실이 있으니 씻으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자. 어서."

방안으로 들어가기 전, 유안의 차가운 눈동자가 적월을 훑었다. 방안으로 들어가던 유안을 바라보던 적월이 한숨을 쉬자, 제이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자. 나에게는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아? 도대체 저 아가씨와는 어떤 관계야?"
"음?"
"솔직히 털어놔 봐. 바지 주머니 속에 든 손톱, 누구 거야?"

제이의 표정은 어느새 특유의 날카로운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적월이 조용히 말했다.

"모르겠어."
"응?"
"아무것도 모르겠어."

제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뜻이야 그건?"
"말 그대로야."

엉망이 된 혈액원, 갑자기 미끼의 표적이 된 유안.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이 뒤섞여 주변이 엉망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게다가.

"짝이야?"
"아니."
"그럼?"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필요해서 만나고 있어."

그녀의 피 때문에. 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제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적월을 흘끗 바라보더니, 팔을 주욱 뻗어 기지개를 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 손톱은?"
"맡겨 봐야 알겠어. 그런데 자네는?"
"광고 모델하고 있다고 했잖아. 촬영이 그 쪽에서 있어서. 어쨌든 저 아가씨. 안 됐군."

제이가 유안이 들어간 방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잘못 얽혔어."

적월이 인상을 찡그렸다. 제이가 큭큭 웃었다.

"차는 뭘로 하시겠어요?"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적월이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제이가 아내를 향해 말했다.

"나는 홍차로."

적월이 제이를 바라보자 제이가 싱긋 웃었다.

"조금씩 미각이 생겨. 요즘은 홍차에 상당히 관심을 두고 있지."
"생각 외야."
"그렇지? 나도 이렇게 적응을 잘 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그런데 생각 외로 적응을 잘 하고 있더라고."
"차 드세요."

미령이 특유의 노래하는 듯한 부드럽고 깊은 목소리로 차를 권했다. 제이가 미령을 사랑스럽다는 눈동자로 바라보며 찻잔을 잡았다.

"아멜리에는?"
"푹 자고 있어요. 자아. 축하해요."
"네?"

자신을 바라보며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미령을 보며 적월이 되물었다.

"아내 되실 분 아니에요?"
"아닙니다."

적월이 딱 부러지게 말했다.

"어머나. 하지만."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 입니다."

불편함을 느끼며 적월이 대답했다. 보통 이럴 경우 흡혈족은 상대방에게 억측을 말한다거나 함부로 묻지 않는다. 상당히 친밀하고 믿음이 강한 사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면에 있어서는 예의상의 거리를 두지 않는 듯 했다.

"업무상 관계가 있나 봐."

제이가 아내에게 부드럽게 말하자, 석연찮은 표정을 하면서도 미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문이 열리며 청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를 입은 유안이 나왔다.

"신세 졌습니다."
"괜찮아요."

미령이 따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안이 제이를 바라보았다.

"블레어씨께도 신세를 졌군요."
"아닙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이런 식으로 떠나게 되어서 유감입니다만 시간이 너무 늦어 더 머물 수 없겠군요."

예의바르고 완곡한 말에 미령이 고개를 저었다.

"이 늦은 밤에 그런 차림으로 떠나게 할 순 없어요. 주무시고 가시는 것이 어떠세요?"
"더 이상 머물면 정말로 폐가 될 거에요. 게다가 이미 기사를 불렀으니 금방 올 거고요."
"네?"

미령이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유안이 빙긋 웃었다.

"택시를 타고 가려고 했던 것이 실수였던 것 같네요. 운전 기사도 있고, 차도 있으니 이럴 때 이용해야죠."

제이가 조그맣게 적월에게 속삭였다.

"뭐 하는 아가씨야?"
"K&Y Intercope 의 회장님이야."
"뭐?"

제이가 눈을 약간 크게 뜨며 유안에게 시선을 뒀다 내렸다. 적월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자네의 현재 고용주지."
"대단한 아가씨군."
"응."

적월이 진심 어린 공감으로 대답했다.


"데려다 줄게."
"필요 없어."
"죽기 싫으면 같이 가."

제이의 집에서 나온 유안에게 바래다 줄 것을 제안했던 적월은 단번에 거절당했다.

"죽어도 내가 죽어."
"웃기지 마."

그녀를 데리러 온다고 했던 차는 없었다. 적월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눈높이를 맞췄다.

"형편없이 굴지 마."
"네가 했던 행동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보는데."

유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내가 말했지. 나와 관련된 이상 나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넌 계속 모른 척 입만 다물고 있었어."
"모른다고 말했잖아."
"거짓말."

유안이 딱 잘라 말하며 차가운 눈으로 적월을 바라보았다.

"넌 피 몇 방울 편하게 먹자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편이 못 돼. 그러니까 그 경비를 죽인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고, 그건 내가 모르는 뭔가와 관련되어 있겠지. 물론 경비가 나를 습격한 이유도 거기서 알아낼 수 있을 테고."

유안에 침착하고 날 선 말투와 내용에 적월은 얼어붙었다.

"게다가 갑자기 데려다 준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까지 하잖아.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속을 뚫어 볼 것 같은 유안의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던 적월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야기 한다면 분명 엄청나게 화를 낼 테지만,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다.

"너와 파트너가 되는 계약을 할 때, 말하지 않은 것이 몇 가지 있어."

유안이 고개를 끄덕여 계속 말하라는 몸짓을 했다. 적월은 숨을 깊게 들여마셨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순간이다.

"어떤?"
"넌 나와 함께 죽어."
"뭐?"

유안이 약간 당혹스럽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원래 흡혈족은 인간이나 흡혈족이 죽일 수 없어. 병에 걸려도, 불구가 되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도 혼혈의 사냥꾼이 아니면 죽일 수 없어. 하지만 파트너가 있는 흡혈족이라면 그게 가능하지. 파트너와는 생애의 길이를 나눌 수 있으니까."

쉬지 않고 한꺼번에 쏟아내 버렸다. 그런 그를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유안의 팔이 힘껏 뒤로 젖혀졌다.

"꺼져."

붉게 물든, 아픈 뺨을 만지며 적월이 차분하게 앞서가는 유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다려."
"꺼지라고 한 말 못 들었어?"

유안이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다지 크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월의 귀에는 천둥소리만큼이나 크게 울렸다.

"네 목숨은 내 목숨이야."

적월의 목소리가 유안의 귀에 스며들었지만 유안은 애써 무시하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유안의 어깨를 적월의 차가운 손이 잡아 돌렸다.

"꺼지라고 했잖아."
"꺼질 수 없어. 말했지. 네 목숨은 내 목숨이야."
"그건 네 생각이지."
"아니. 다른 누군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적월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습격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유안의 눈동자가 적월의 눈동자와 부딪혔다. 유안의 손이 다시 힘차게 적월의 뺨을 때렸다.

"일단 내 말 부터 들으면."
"시끄러워."

유안이 딱 잘라 말하며 적월의 배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윽."
"알았다면 차라리 그냥 도로로 기어나갔을 거야."

유안이 냉정하게 말했다. 적월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주변 정리는 알아서 하도록 해. 더 이상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차라리 내가 내 손목을 긋겠어."
"기다려."

냉정하게 한 마디 던지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유안을 향해 그가 손을 뻗었다. 뻣뻣하게 굳은 유안의 어깨가 손에 잡히고 그녀의 냉정하게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정면으로 그의 것과 부딪히자, 그는 조용히 손을 놓았다.

"내 앞가림은 내가 할거야."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유안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가 될 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단."

처음으로 '어쩔 수 없다' 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파트너인 유안이, 그리고 그의 목숨이 함께 위기에 빠진 지금, 누구 하나 믿고 도움을 청할 상대가 생각나지 않다니.

"젠장."

적월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다.

"널 안전한 장소로 데려다 놓는 것이 좋겠어."
"싫어."

차가운 눈동자 안에는 간신히 억눌러 놓은 분노가 스며있었다.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기분을 하나하나 맞출 상황이 못 되었다. 재빠르게 판단을 끝낸 적월은 유안의 배를 한 대 쳤다.

"지금 뭐하는...?"

충격이 큰 모양인지, 멍한 눈동자를 한 유안이 서서히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적월은 유안을 그대로 들쳐 안고 들고 있던 생수병을 들어 땅에 물을 부었다.

"이성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으로 가려고."

말을 마친 적월이 물 위에 한 발을 내딛자, 그대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배에 가해진 충격으로 아찔해져서 정신을 잃어가는 순간. 유안이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자신이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편은 다음주에 올라갑니다. (제 굼벵이 같은데다가 변덕이 심한 연재방식 치고는 상당히 성실연재군요...;;;;;)

잠깐 등장하는 미령과 제이 커플은 전작인 '어둠 속의 속삭임' 의 주인공 커플입니다. 이 글도 언제 기회가 되면 정파에 올려보도록 하죠...;;;;;




댓글 '2'

流河

2004.10.10 15:03:19

니임~~~~~~~~ 넘 잼있어요
완벽한 저의 취향이에염
좀더 자주 써주시면 좋겠지만 저의 간절한 바램뿐이지요...
흐흑~ 건필하세요

Junk

2004.10.11 21:21:44

유안도 냉, 적월도 냉. 부딪치는 느낌이 두 배로 강렬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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