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회사 내에서?"

유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 주차장이 넓고, 이번 신차 광고에 어울릴 거라는 판단 하에 결정 내렸다고 합니다."
"감독은?"
"이시영입니다. 젊고 감각 있는 친구로 지난번 화장품 광고를."
"알고 있어요. 재량대로 하라고 전해 줘요."
"예."
"촬영은 언제부터죠?"
"회장님의 지시가 떨어지는 즉시. 랍니다. 몇 번을 다시 촬영할지 모르기 때문에 직원들이 없는 밤에 촬영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당분간 회사에서 지내던지, 집에는 택시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비서가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당장 그만 두라고 전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나 한 사람 때문에 광고를 망칠 수는 없죠. 광고를 촬영하는 동안에는 사무실에서 지내다가 광고가 끝나는 날에는 집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유안이 명쾌하게 말하자 비서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것을 잊어버리다니."
"아니에요."

사실 그녀 자신도 잊고 있었다. 워낙 집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은 탓에 그녀도 회사에 출퇴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두 달 정도 안 들어갔나?"

어차피 들어가도 아무도 없는 곳이다. 오히려 사무실보다도 낯이 설어 어쩌다 집에 들어가면 놀라고 만다. 처음에는 차라리 사옥 꼭대기에 펜트하우스 비슷한 공간을 만들어 지낼까 생각했었지만, 가끔 급한 출장에 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해 사옥 꼭대기에는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어 곤란했다. 그래서 근처 호텔에 가 있을까 했었으나, 잠시 눈을 붙이러 들어가기에는 너무 가격이 비쌌다.
그래서 있으나 마나 한 집에 몇 달에 한 번씩 들어가면서. 집안의 냉기를 느끼고는 그 때야 집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낀 것이다. 그러니 없느니만 못했다.
사무실 옆에 있는 작은 휴게실로 들어간 유안은 휴게실 한쪽에 마련된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며 조용히 생각했다. 차라리 그녀의 집은 이 회사라고.
그리고 그대로 평소와 똑같이 며칠이 흘렀다.



"컷, 좋았어."

이시영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종료를 선언하자 스탭들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돌렸다. 이 감독이 막 차에서 내리는 광고 모델을 향해 다가가며 엄지손가락을 치켰다.

"멋진데요."
"감사합니다."

검고 긴 머리를 가진 남자가 조용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모호한 검은 눈동자는 창백한 얼굴과 대조되어 놀라운 매력을 발휘했다. 그런 매력을 지니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머물러 있음을 느끼자, 이 감독은 자신이 남자라는 것도, 노멀한 성향이라는 것도 잊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다음에도 저와 일해 볼 생각은 없습니까?"

이 감독이 제안했다. 모델은 잠시 모호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이죠."
"자자. 정리하자고. 그리고 그만 해산!"
"예."

주변을 정리하는 스탭들을 바라보며 제이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깊은 동굴 속 같은 지하 주차장은 넓긴 했지만 어둡고 답답했다. 하지만 감독이 처음에 제안한 것처럼 검고 매끈한 그가 광고할 신차와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코디가 화장을 지우고 사복을 챙기는 동안, 그는 집에서 기다릴 미령을 생각했다. 며칠 밤샘 촬영을 한다고 했을 때 걱정을 하던 미령은 결국 그가 촬영을 끝내고 들어올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던 것이다.
임산부에게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미령의 눈 밑에 검은 기미가 끼는 모습이 보이자, 결국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촬영을 일찍 끝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결국 까다로운 감독을 매혹시킬 수 있었다.

"그럼 먼저 갈게요."
코디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친구가 마중을 왔다며 한사코 만류하는 코디에게 밀려 막 차를 탔던 제이는 갑작스러운 느낌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흡혈족 시절. 그것도 꽤 오래 전에야 느꼈던 느낌이었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자. 그리고 살아있지만 살지 않은 자의 느낌.

"미끼?"

몇 세기 전, 마녀 사냥으로 인구가 꽤 줄었을 때 유럽의 흡혈족들은 미끼를 썼었다. 잡은 사냥감의 피를 빨아먹은 다음 그 사냥감의 머리를 가르고 그 안에 자신의 몸의 일부를 집어  넣으면 그 인간을 꼭두각시 인형으로 쓸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만든 인형들은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었고, 낮에도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을 유인해 자신을 미끼로 만든 흡혈족의 먹이로 바쳤다.
제정신인 흡혈족이라면 굳이 자신의 미끼가 아니더라도 미끼를 느낄 수 있는 법이었다. 제이는 쓰게 웃었다.

"이 봐. 이제 너는 인간이라고."

되다 만 인간이라고 보는 편이 나았지만. 그래도 인간이긴 했다. 차에 타며 제이가 고개를 저었다.

"신경 과민이야. 신경 과민."

그러나 막 기어를 넣는 순간, 비명 소리가 들렸다. 제이는 비명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차를 몰았다. 주차장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제이는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꺄아악"

유안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팔에 걸려 넘어졌다. 회사의 정면을 장식한 분수대의 축축한 물이 코로 사정없이 들어와 숨이 막혔다. 가까스로 고개를 든 유안은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목을 쥔 회사의 경비를 보고 소스라쳤다.

"이. 이봐요."

어떻게 해서든 목과 다리에서 손을 떼게 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신을 부여잡고 있는 손과 팔의 힘은 마치 살기 위해서 접시에서 떨어지지 않는 산낙지의 빨판과 비슷했다. 한참을 버둥거리던 유안은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럴려고. 이럴려고 그 짓을.



"약속하지. 실패하면 너는 죽어. 성공하면 네가 원하는 다리를 얻을 수 있을 거다."

달콤하디 달콤한 유혹. 그러나 그녀는 유혹의 너머에 있는 대가가 보였다.
그는 언제든 그녀에게 자신의 몫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든지 그에게 약속한 것을 주어야 할 테고.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그녀 스스로가 꾸리는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그리고 결국은.

"좋아."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는 것은 없다. 그녀가 지금껏 살아온 위태한 안전 속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녀의 자유를 대가로 치렀다.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처음으로 제대로 재어보지 않았다. 그녀의 대가를. 그리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목을 파고  들고, 그녀의 입술로 타는 듯한 액체가 쏟아져 들어왔을 때 그녀는 엄청난 고통을 첫 번째 대가로 치렀던 것이다.



"아직은. 아직은 싫어."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의 반도 못 해봤다. 자신의 계획한 인생의 1/10도 살지 못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얼어버리라고 간절히 원하면 얼어버리니까. 가끔 치한 방지용으로 써. 좋은 무기가 되니까.'


생수병의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적월이 했던 한 마디.
아.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일단 끌어올리는 것을 생각해. 올라올 거라고 생각하면 올라올 테니까.'

마침 그녀의 주변에는 물이 있다. 자유로운 손에서 첨벙거리는 물을 손에 쥐기 위해, 유안은 흐려지는 정신을 집중했다.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 굵은 물줄기가 손에 잡혔다. 적월이 했던 것처럼 그녀의 손 안에 쥐어진 것이다.

"가. 간절하게."

원하면. 이라고 했다. 그러면 얼어버린다고. 그녀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물이 단단히 얼어버리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크어억!"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경비원이 잠시 손과 팔에 힘을 뺐다. 그 틈을 이용해 유안은 한 손에는 얼음 기둥을 들고 재빨리 한 쪽으로 물러섰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경비원은 비틀거리기까지 했으나 그녀를 보고 죽을 듯 달려들었다.

"비켜!"

유안이 얼음 기둥을 휘두르며 소리질렀다.

"비켜! 비켜! 비키라구!!"

미친 듯, 유안은 얼음 기둥으로 달려드는 경비원을 치고, 치고, 또 쳤다. 그러나 그 때마다 경비원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그녀를 향해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그리고.

"젠장."

파삭거리며 얼음기둥이 부서져 내리는 것을 본 유안은 부들부들 떨면서 정신 없이 달렸다. 그런 그녀의 뒤를 피투성이가 된 경비원이 목숨을 건 듯 쫓았다.

"왜? 어째서?!"

제대로 된 인생은 이게 겨우 시작인데. 이건 너무 하잖아! 나는 아직 살고 싶다고!
오랜 야근을 마치고 텅 빈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회사를 나오다 죽기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얻어낸 시간이 짧았다. 피투성이가 되고 몇 군데 찢어지기까지 한 옷이 거추장스럽게 다리에 감겨들고, 끈적하고 기분 나쁜 살갗이 발목에 닿는 것을 느끼자 유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크억!"

기분 나쁜 느낌이 발목에서 사라졌다. 단말마의 비명소리에 감은 눈을 뜬 유안은 경비원의 어깨에 긴 고드름을 찔러 넣은 적월을 발견했다.

"이. 이게."

더듬거리고 있는 그녀를 흘끗 본 적월은 고드름을 부러뜨려 경비원의 머리에 꽂았다. 비명은 없었다. 버둥거림도 없었다. 그저 바둥거리기를 멈춘 경비원의 시신만 보일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제대로 묻기도 전에, 적월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얼굴과 경비원의 손자국이 남은 목, 그리고 엉망이 된 수트 안쪽의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다치지 않았군."

뭐라고 하려고 막 입을 벌렸을 때였다. 까만 차 한 대가 적월의 뒤에 섰다.

"어떻게 된 거야? 이런 곳까지."

새까만 차안에서 온통 새까만 남자가 내리며 말했다. 적월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냥."
"그냥이 아니잖아. 무슨 일이야? 그리고 이건."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경비원의 시체의 뒷통수를 살폈다.

"미끼잖아. 말 해 봐. 무슨 문제인 거지 적월?"

유안은 가까스로 적월에게 질문을 퍼붓는 남자를 알아보았다. 새까맣고 긴 머리. 색스러운 눈동자. 창백한 피부.

"제이 블레어?"

그녀 회사의 광고를 찍기 위해 고용된 모델이, 적월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다. 혼란으로 눈을 깜빡거리는 그녀를 돌아본 적월이 제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차 좀 빌릴까? 보시다시피 꼴이 말이 아니야."

그 때서야 제이의 시선이 유안에게 향하며 부드러워졌다.

"곤경에 처한 숙녀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제이가 재킷을 벗어 유안에게 둘러 주려 했을 때야, 유안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닿는 차갑고 강한 손길을 느꼈다.
적월의 긴 코트가 그녀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제이의 의아한 눈길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적월은 유안의 어깨를 잡아 부축해 제이의 차에 태웠다.

"무슨. 어떻게 된 일이야 빨갱이 달? 제대로 설명해 봐."

적월이 눈을 깜박이며 유안을 살폈다. 마치 처음 본다는 듯한 눈길로. 그리고 제이를 보고 딱 한 마디 했다.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미령이 옷은 안 맞을 거야."
"이것 봐. 빨갱이 다..."

차가 출발했다.


... 다음편은 다음주에 올라갑니다... (먼 눈) 가능하다면 진도가 좀 더 빨리 빠졌으면 좋겠군요.

덧붙여서 간신히 시간 내에 올려서 다행입니다. 일요일에 올리려고 나름대로 바둥거렸거든요.


... 바봅니다 저... (어쨰서 2-2를 2-1이라고 해서 올린 게냐!!)






댓글 '1'

Junk

2004.10.03 23:05:54

갈수록 의문이 더해지는군요. 소재가 소재인지라 미스터리 구조로 가실 것은 짐작했지만서도... 무척 기다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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