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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95
다음편은 추석 연휴 후에 올라갑니다. (줄행랑 중.)
읽으실 때 필요하실 지도 몰라서, 흡혈족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게시물로 올렸습니다.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어쩐지 귀가 간지러운데."
"쓸데없는 것들이 많이 날아다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형님. 그렇게 나다녀도 괜찮은 거야?"
"뭐, 그럭저럭."
"그런데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호형 (狐炯) 이 그 특유의 어린애 같은 말투로 물었다. 적월이 주변을 둘러보며 태연히 말했다.
"나한테 빚 진 거 아직 갚지 않았지?"
"그. 그거야 뭐."
호형이 말을 더듬거렸다. 몇 십 년 전, 호형은 몰래 산 밖으로 나왔다가 차에 치일 뻔 한 경력이 있었고, 그것을 적월이 간신히 구해내었다. 그 때 호형은 그에게 호족 (狐族) 의 표식인 붉은 인장을 하나 주면서, 빚과 은혜는 꼭 갚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이번에 애써 만든 정혈시설이 엉망이 되어버렸어."
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월이 정혈시설에 들인 공과 시간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그 정혈시설 건설 문제는 처음부터 나이 많은 흡혈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흡혈족 본능인 사냥 본성을 그런 것으로 억누를 수 없으며, 억눌러서도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의견 때문에 적월이 그런 소요를 진정시키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삼장로를 설득하면 안 될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지금 이 근처 재개발 중이라서."
호형이 짧게 말했다.
"결계가 엉망이야. 일단 한 2년 정도는 기다려 줘."
"너무 길어."
"그렇다면 포기해. 장로들 설득만으로도 2년은 충분히 지나갈테니까."
적월은 호형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 다 젊은 나이에 일족을 짊어진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아쉽고 당장 안전한 부지가 급하긴 했지만 호형을 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적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 형님."
적월은 그저 고개만 저어보이고 방을 나섰다. 그런 그의 뒤를 쫓아 나온 호형이 길게 늘어진 주렴 앞에 서서 양 팔을 활짝 벌리자 주렴이 걷히면서 바깥이 보였다.
아무 말 없이. 적월은 호족의 결계 밖으로 나가 호형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종족은 다르더라도 수장끼리 만남을 가지고 헤어질 때 하는 간단한 예의였다. 호형이 마주 고개를 깊게 숙이며 미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결계를 빠져나온 적월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며 생각에 잠겼다. 공개할 수 있으면서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곳. 도대체 한국 어디를 찔러야 그런 장소를 만날 수 있을까?
수장 자리에 오른지 100여년. 겨우 설득하고 겨우 자리를 잡은 혈액원의 존폐문제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 하루가 멀다 한 거야?"
떠들썩한 파티장의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유안이 한마디 툭 던졌다.
"일이야."
적월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웃기고 있네."
유안이 대꾸했다. 약간 찡그려진 인상에 딱 달라붙은 검은색 차이나형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적월이 그녀의 손목에서 눈을 떼고는 헛기침을 했다.
"믿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난 여기 다른 사람을 만나러 온 거거든."
"하. 행여나."
코웃음을 한 번 친 유안은 왼편에서 걸어오는 몇 명의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단정하게 잘린 단발머리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젖히고 들어가는 모습에는 은근한 여유가 배어나왔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바라보는 동안, 그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치는 것도 몰랐다.
"뭐에 넋을 놓고 있는 거야?"
"아. 케인."
적월이 고개를 돌렸다. 금발머리의 남자는 유쾌한 미소를 띄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뉴판 감상."
가볍게 대답하자 케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케인의 손이 적월의 팔을 잡았다.
"조용한 곳으로 옮겨갈까?"
파티가 한창인 호텔 연회실 한쪽 구석으로 간 두 남자는 한 손에 이름 모르는 술을 들고 느긋하게 섰다.
"혈액원 습격사건은 들었지."
"누가 지껄였는지 빨리도 퍼졌는걸?"
"아직 실험 단계의 일이니 더욱 그렇지.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난동이 일어나다니, 자네도 운이 나쁘군."
"그 쪽은?"
"아직 별 문제는 없어. 사실 문제가 일어난다면 우리쪽이 먼저일 줄 알았는데. 자네 일족도 말이 많았지만 우리 일족은 아주 드러내놓고 반대했었잖아."
케인이 가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의 가슴에는 일족이 돈을 모아 산 헌터가 낸 깊은 상처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혈루님도 장소 이외의 것에는 찬성하셨으니, 자네 쪽은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문제는. 또다시 장소야."
적월이 케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장로들이 중얼거리는거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야. 이번에는 어머님도 화가 나셔서 더 이상 나서주시지 않을테니까 그 쪽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고, 일족들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것도 만만치 않기는 하겠지만 일단 장소가 문제지."
"과연."
두 남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서 사람들이 가득한 파티장을 바라보았다. 케인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간식감으로 저 아가씨를 생각하고 있어?"
"응?"
"단발머리. 목과 팔을 잔뜩 감싼 검은 차이나 드레스의 아가씨."
"아니."
주식이야. 라고 대꾸하려다 참았다. 아는 사람이 많아서 절대 좋을 것 없었다. 적월은 슬그머니 고개를 딴 곳으로 돌렸다.
그렇게 눈치 채일 정도로 유안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다. 그저 멍하니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꽂혔던 시선은 내내 유안을 향해 있었나 보다. 적월은 처음 느끼는 생경함에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곳은?"
"별 이상 없다는 것 같아."
"특별히 자네를 공격하고 있는 거 아냐?"
"글쎄."
거기까지는 이미 생각이 미쳤다. 최장수 흡혈족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에, 300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수장 자리에 올라 있는 그는 흡혈족 사이에서는 충분히 질시의 대상이 될 만 했다.
"몸 조심해."
"알고 있어."
수장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그나마 다른 일족들이 달려드는 일은 없었지만 수장이 되고 나서는 꽤 잦은 공격에 시달리곤 했다. 그나마 조금 공격이 가라앉은 것은 최근의 일로, 혈액원 일로 큰 무리 없이 수장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려 매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의 눈이 다시 유안을 향했다.
그의 유일한 약점.
생을 나누는 반쪽.
유안의 존재가 일족에 알려진다면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서 자기 인생에 누군가 개입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유안이 어떻게 나올지도 미지수였고.
"어이. 정말 도시락감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해?"
"응."
적월이 유안에게서 눈을 떼며 대답했다. 케인이 휘파람을 불었다.
"저 정도면 한 번 꼬셔서 한 입에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케이트에게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던지."
만삭의 아내의 이름이 나오자 케인이 금새 사색이 되었다.
"아.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그냥 도시락 감으로 딱이라 이거지. 한 입에 삼키면 정말 10년은 어디서 피 구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잖아."
케인이 열심히 변명하는 것이 어쩐지 거림칙했다. 적월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변명이 먹혔다고 판단했는지 케인이 말을 멈추었다.
"그럼 나중에 만나지. 혈루님께 인사도 드려야 하니까."
케인이 처음 그에게 접근했던 것 처럼 조용히 그 곳을 떠났다. 적월도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용건이 끝났으니 돌아갈 시간이다.
"이러니 내가 하루가 멀다 하는 거 아니야."
유안이 투덜거리며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야근?"
"체력이 남아 도니까. 아, 블라우스에는 피 묻히지 마. 세탁하기 불편하니까."
유안이 왼 팔의 소매를 걷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희고 부드러운 피부가 눈에 잡히자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러 온 거야."
적월이 사무실 한 켠에 있는 작은 냉장고의 문을 열고 생수를 꺼내며 말했다.
"사과?"
"기분 나쁜 것 같았으니까."
"아."
유안이 인상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확실히 짜증스럽긴 했다. 그렇게 사람 진을 빼 놓을 정도로 피를 빨아먹고 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 하지만 그게 사과하러 나타날 정도로 유난스럽진 않았다.
"미안해."
"알텐데?"
"아."
사실은 약간 서운했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약속을 어기지 않는 좋은 벗이고 그에 대해서 그다지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편리한 벗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귀찮은 파리 같다는 듯한 얼굴을 할 필요는 없지 않았냐고 말하고 싶었다.
"기분의 문제니까."
"하아."
유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간단히 대꾸했다.
"그런데 지금 뭐 해?"
"아. 이거?"
유안을 바라보기만 해도 식욕이 당겼기 때문에 그는 식욕을 억제하기 위해서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손 끝에서 물줄기가 흔들리는 것을 유안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안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기에, 적월은 무의식적으로 쿡쿡 웃었다. 그가 웃자 장미꽃 모양을 하고 부드럽게 흔들리던 물줄기가 잠시 흐트러지면서 물방울이 형광등 빛 아래 부서졌다.
"그런 거 어떻게 하는 거야?"
"아마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물을 다루는 것은 그에게는 숨 쉬는 것 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벗과는 능력을 나눌 수 있으니 아마도 유안도 물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드문 표정을 하고 그에게 다가오는 유안에게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어쩐지 재미있게 느껴졌다.
"내가?"
"내가 할 수 있다면 너도 할 수 있어. 자."
적월은 생수병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물 표면을 살짝 잡아당겼다. 물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주욱 올라와 작은 분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유안이 작게 웃었다.
"재미있네?"
"자."
그는 자신의 손가락 대신 그녀의 손가락을 넣었다.
"일단 끌어 올리는 것을 생각해. 올라올 거라고 생각하면 올라올 테니까."
몇 번을 끙끙거리더니, 생각보다는 쉽게 물줄기를 병 밖으로 올려냈다. 표면이 정리되지 않은 데다가 조금 밖에 올라오지 않았지만 병 밖으로 줄기가 끊기지 않고 올라오긴 했다.
"이걸 응용하면 꽤 여러가지 형상을 만들 수 있어."
적월이 냉장고 안에서 새 생수병을 꺼내며 말했다. 그의 왼손을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진 물은 기둥 모양으로 단단하게 얼어 붙었다. 유안이 눈을 약간 크게 뜨며 빈정거렸다.
"서커스 단에서 일할 생각은 없었어?"
"아. 내 몸 건사하기도 바빠서."
그는 주로 물을 얼려서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을 만들어 썼다. 뒤에서 덮치는 헌터들의 허와 급소를 순간적으로 찔러서 맥을 못추게 하는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왼손바닥을 얼음 기둥 위에 대자 얼음 기둥은 물기둥으로 변했다.
"얼어버리라고 간절히 원하면 얼어버리니까. 가끔 치한 방지용으로 써. 좋은 무기가 되니까."
"요즘은 거의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 써먹을래야 써먹을 수 없겠어. 하지만 가끔 정신을 분산시키기엔 좋겠네."
어쩐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적월은 간단하게 물기둥을 손 끝으로 모아 다시 생수병 안에 넣었다.
"버려. 바닥 청소 오래 안 해서 그거 못 먹어. 어쨌든 사과는 받아주지."
"그거 고맙군."
유안이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것도 가르쳐 줬으니까."
하지만 그 재미있는 것을 그녀가 조만간 쓰게 될 거라는 것은 두 사람 다 예측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