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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은 다음주에 올라갑니다... (도망간다.)
"그 녀석은 어디 간 게야?"
"식사 하시러 갔습니다."
"하!"
혈루 (血淚) 가 코웃음을 쳤다. 1/3 정도 날아가버린 건물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고, 그 미소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한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게, 맡기는 것이 아니었어. 그렇게도 조르더니만."
"죄송합니다. 저희가 관리가 소홀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다음 부터는..."
"탓하자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속이 많이 상하긴 했다. 잦은 재개발로 인해 벌써 몇 번을 변한 이 근처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건물이었다. 40 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해도, 옛 맛은 충분히 우러나는 법. 그 건물을 보고 있으면 여러가지 옛 생각이 나서 마음에 족했었다. 그런데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이런 짓거리를 서슴치 않게 저지르다니.
"넘겨주는 것이 아니었어."
마음이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그런 혈루의 속을 눈치 챈 것인지, 옆에서 상황 보고를 하고 있던 여자가 말했다.
"그래도 아직은 사진이 있지요."
"그렇긴 하지만."
아까운 것은, 아까운 거다. 혈루는 입맛만 쩝쩝 다시다가 처참하게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 가까이로 걸어가 파편 하나를 주웠다. 그녀의 검은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다.
"호오."
조각은 정말이지 깔끔하게 동그랬다. 그렇게 세밀하고 깔끔하게 되기도 힘들 터였다. 엉망이 된 건물에서 나온 파편이라기 보다는 공들여서 둥글게 만든 세공 구슬 같았다.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버혀낼 수 있다면...
혈루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홍."
"예."
"물을 쓰는 자를 물색해."
그것도 최고가 아니면 곤란할 것이다. 혹시나 싶어, 혈루는 주변에 흩어진 다른 조각들을 주워 살펴보았다. 똑같이 깔끔하고 똑같이 깨끗하게 난도질 당했다.
"그리고 월이를 불러."
"예."
아홍은 아무 불만 없이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크게 노하시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기면서.
수장인 적월의 어머니인 혈루는 현존하는 흡혈족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였다. 누군가는 그녀의 나이가 적어도 천 살은 넘는다 했으며, 또 누군가는 아마 네안데르탈인 무렵부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흡혈족의 능력은 나이와 상관 있다. 원래 능력이 출중한 자이든, 그렇지 않은 자이든 간에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가지고 있는 능력의 힘은 늘어간다. 때문에 어린 흡혈족은 자연스럽게 어른 흡혈족을 공경하게 되는 것이며, 어느 정도의 위계 질서도 잡혀갈 수 있었던 것이다.
몇 살인지 알 수 없는 혈루의 능력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능력 덕에 한 때는 12명의 고명 장로 중 한 사람이었고, 수장의 어머니로서 고명 장로의 자리에서 물러난 지금에도 그녀는 흡혈족 전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한 번 노한다면, 분명 한 바탕 피바람이 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홍은 다소 마음을 놓으면서 사고 현장 대책 본부로 다가갔다. 그 곳에서는 서넛의 흡혈족들이 모여서 두런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아홍님?"
"밤 사이에 처리할 수 있지?"
"완벽히 재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혈루님의 재가는 떨어졌나요?"
"그건."
"부숴도 상관 없어."
똑 떨어지는 소리가 천막 너머로 들렸다. 아홍을 비롯한 천막 안의 흡혈족들은 깜짝 놀랐다.
"그럼 밤 사이에 깔끔하게 만들 순 있지요. 문제는 지하에 있는 엉망이 된 정혈시설들입니다만, 잔해를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입구만 보이지 않게 잘 단도리 해 놔. 나머지는 당분간 매일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아."
"예."
"탐색 능력을 최대한 발동해서 수장님을 찾도록. 혈루님이 찾고 계셔."
"알겠습니다."
두 명의 흡혈족이 일어서서 천막을 나갔다. 아홍은 천막 한 켠에 쌓여있는 서류들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예측이라도 한 듯 그녀의 간이 책상과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처음부터 어머님 건물을 안 썼으면 뭐든 간단했잖아."
"안전성이라는 문제지. 안전성."
유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적월의 눈이 그녀의 손놀림을 그대로 훑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어머님을 방패로 쓴다는 것은 좀 심하잖아. 게다가 명색이 수장이라는 사람이, 무슨 지하기지를 그렇게 알기 쉬운 곳에 만들어?"
적월은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유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내 말 듣고 있어?"
"응. 하지만 혈액원은 흡혈족에게 공개된 장소에 있어야만 해. 누구나 가서 피는 받아야 하니까. 그런 상황에서 나름대로 조금이나마 보호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머님 건물을 쓰는 것이었는데."
"망가뜨리지 않겠다고 각서도 쓰고?"
"이젠 다 틀렸어."
적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안은 의자에 앉아 말끄러미 그를 올려다 본다.
"예고라도 좀 해. 마음의 준비를 하던 안 하던 너는 어차피 내 피를 먹겠지."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 스케줄 망치겠다는 소리를 하는 것 보다야 낫지."
적월은 아무 대답 없이 처음 나타났을 때 처럼 훌쩍 자리를 떠났다. 유안은 의자를 돌려 다시 컴퓨터에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자. 내가 어디까지 봤더라?"
"혈루님이 와 계십니다."
아홍이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적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실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떠신가?"
"상당히 불편해 하십니다."
적월은 약간의 각오를 하고 들어섰다. 수장의 방 한 구석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할 필요 없다."
혈루가 훼훼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너로서는."
"그래도 어머님이 아끼셨던 건물인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실 그 건물에 대해서 왜 그렇게까지 혈루가 집착하는지 적월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수많은 건물 중 하나, 그것도 가장 낡은 건물일 뿐이다. 그런데 고작 그런 건물에.
수많은 건물 중 그가 그 건물을 굳이 골랐던 이유는 어머니 혈루가 집착하는 건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부정하지 못했다. 애초에 어머니가 감정을 갖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것이었던 그 건물. 그리고 지금 그는 어머니의 노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팔이라도 잘라놓을 수 있도록, 사람을 풀면 좋겠구나."
혈루가 말했다. 적월이 어머니를 마주보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넌 어차피 내가 왜 그랬는지도 이해하지 못할테니까. 그냥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녀석들을 내 앞에 대령시키기만 하면 돼.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로 괴롭혀 줄 테니까."
혈루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잡혔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야수의 미소다. 적월은 묵묵히 그 눈빛을 마주했다.
"알겠습니다."
"재미없는 녀석."
혈루가 적월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적월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서 예의를 표하고 방을 나갔다. 방을 나서는 적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혈루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아들은 제 아버지가 아닌 자신을 닮은 듯 하다. 벌써 기억조차 가물가물했지만 그녀의 하나뿐인 짝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저렇게 묵묵하고 저렇게 꼿꼿했었던 것 같다. 그랬던 그녀에 비한다면 한참 어린 죽은 적월의 아버지는 훨씬 부드럽고 유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그녀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맥을 못추기도 하고 그녀의 시니컬한 성격을 많이 다독여주곤 했다. 자신의 성격이 극도로 까다롭고 제멋대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혈루는 하나뿐인 아들만은 제발 남편을 닮아주길 바랬었으나, 인연이 맺어진 지 무려 400년 만에 태어난 아들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닮았다.
"융통성 없는 녀석."
그런 점이 처음부터 불만이었다. 약하다면 감싸주는 맛도 있고, 아이가 조금씩 자라는 것을 즐기는 맛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저 아이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무슨 일이건 척척이었고 능력을 제어하는 제어력도 일찍부터 갖췄다.
뭐 그런 면을 보고 비어있는 수장 자리에 적극 추천한 거지만.
"내 배로 낳고 내 손으로 키웠지만 정이 안 가. 저런 걸 낳고 닭 피를 한 양동이나 마셨다니."
조금은 실수도 하고, 조금은 덜떨어진 면이 있었으면 했다. 감정을 아주 모르는 흡혈족이면 모르되, 이미 감정을 알아버린 다음의 혈루는 아이 키우는 맛이랄까 하는 것을 일찍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된달까 하는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벗을 만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벗이 있다면 조금은 누군가에게 신경 쓰는 것을 배울지도 몰랐다. 책임감도 배우는 속도도 빠른 녀석이니 어쩌면 시늉 정도는 배울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지? 저런 덜 떨어진 얼음덩이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큰일이네."
가끔 오는 지하 카페에서 끝내주는 카페라떼를 마시며, 제이가 중얼거렸다.
"더 이상 생각 불가능이야. 노출을 시키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겠지. 경비는?"
"일류급들이 서고 있지만 역부족이야. 내부에 배신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있는 중이야."
적월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지금 적월은 전 (前) 흡혈족 - 정확히 말하면 브리튼 일족의 수장까지 했던 - 제이를 찾아와 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600년 정도 흡혈족이었던 제이는 얼마 전 우연찮게도 헌터의 심장을 먹고 정말로 인간이 되어서 인간인 부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러나 옛날의 그 차분하고 독특한 사고방식은 거의 변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있을 때 마다 좋은 의논상대가 되어 주곤 했다.
"그게 아니면 이야기가 되지 않겠지. 그건 그렇고 간도 크고 생각도 부족한 녀석인데. 어떤 납작 오징어가 되려고 혈루님 건물을 건드린 거지?"
"나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려."
"마음에 걸린다면 좀 더 파헤쳐 봐."
제이는 언뜻 스친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면 실제로 이루어지기 쉬운 법. 그는 다른 곳으로 말을 돌렸다.
"전속 모델 계약을 맺고 광고를 찍었어."
인간이 된 제이가 흡혈족 특유의 매혹 능력을 살려 모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언뜻 들은 듯 했다. 그리고 가끔 광고에 나오는 것도 본 듯 했고. 말을 돌리려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적월은 응해주기로 했다.
"어디야?"
"K&Y Intercope."
"거기가 어딘데?"
어딘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한국과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야. 미령이도 임신했고, 해외로 나가는 일을 줄일까 생각했는데 마침 그 쪽에서 제안이 들어와서."
"흠."
생각이 났다. 유안이 물려받았다는 회사가 아마 그거였던 듯 했다. 굉장히 귀찮은 듯 이야기 하면서도 회사 이야기를 일단 시작하면 끝가는 줄 모르고 열중하는 유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네, 혹시 짝을 찾은 거 아니야?"
"응?"
적월이 되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이가 그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런 일은 없어."
짝을 찾는다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알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흡혈족의 억누를 수 없는 본능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껏 짝을 찾았다는 그 어떤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자네가 멍하게 있는 것을 처음 봐서 그래."
제이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흡혈족 수장들 사이에서 떠도는 적월의 별명은 엘리트 황태자였다. 흡혈족 최고의 어른인 혈루를 어머니로 두었다는 것 외에도, 젊은 나이에 수장에 올랐으며 그 일 처리 능력이 최고라는 것은 정평이 난 바다. 게다가 수장 회의를 비롯한 몇몇 공적인 자리에서 만난 적월은 그야말로 '빠릿빠릿' 이라는 말 말고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닦여 있었다.
"요즘 좀 피곤하니까."
적월이 얼버무렸다. 부지 문제도 그렇고, 슬슬 들고 일어나는 장로들도 그렇고 눈 앞에서 눈처럼 불어나는 일들이 피로를 만들고 있었다.
다시 유안이, 그리고 그녀의 맑고 따스한 피가 그리워졌지만 참았다. 고작 며칠 전에 찾아갔었는데 지금 다시 찾아간다면 유안의 존재를 들키는 것은 둘째 치고 귀찮게 군다는 이유로 유안이 손목을 그어버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가지로 곤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