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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후 몇 년
"혈액원 한국 지부가 습격 당했습니다."
"누구 짓이지?"
나른한 목소리로, 남자가 물었다.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짐작 가는 곳은 있습니다."
"과격 분자인가?"
"뭐. 그렇게 봐도 되겠죠."
여자가 빙긋 웃었다. 그녀의 입술은 마치 피를 머금은 듯 붉다.
"피해는?"
"혈액이 적어도 3만 리터 이상 도난당했습니다. 그리고 랑우와 비혈이 심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내가 가 봐야 하나?"
"아닙니다. 그 곳에는 혈루님이 가 계십니다."
남자가 눈썹을 치켜뜬다.
"어머님이?"
"노하기도 하셨을 테죠. 그 건물은 혈루님이 아끼시던 곳이 아니십니까?"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안전이 보장 되겠거니 했는데."
"권위에 도전하는 거지요. 수장님."
"젊은 것들은."
"나이 든 것들도 가끔은 그러고 싶을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난 어중간한 나이라 잘 모르겠군."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보고를 하던 여자 쪽이 피식 웃었다. 여자의 붉은 이 사이로 뭔가가 반쩍였다.
"농담이 아니야. 어중간한 나이란 말이야."
"적월님."
"응?"
"아무래도 '피가 모자라' 증후군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뭐가 말인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적월님이든, 아니면 적월님이 말씀하시는 것들 환청 처럼 잘못 듣고 있는 저든 둘 중 하나가 말입니다."
"지금 그거 농담인가?"
"글쎄요."
여자가 김 빠지는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것은 무시 못할 사안 중 하나일 겁니다. 분명 반대가 심했던 장로 몇이 얼마 후에 있을 일족 회의에서 들고 일어날 텐데요."
적월도 사실은 그게 걱정이었다. 별로 딱히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렵게 오른 수장의 자리였다. 일단 자리에 올라 자신이 맡고 있는 이상 다른 사람의 은근한 알력은 질색이었다. 하지만 어디든 트집거리는 있기 마련이고 그 트집거리는 알력의 조건이 되기 마련이다.
"혈루님도 약간 약이 오르신 듯 싶던데요. 어쨌든 전면 지지는 해 주시지 않으셨으니까요."
"하나 뿐인 아들 보다도 그 낡아서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이 좋으실게야 아마."
"글쎄요."
"보고는 그것이 끝인가?"
"예."
여자가 천천히 물러나 방을 나섰다.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혈액원은 단순한 건물이 아닌, 이제는 자리를 잡게 된 흡혈족들의 혈액 공급원이었다. 혈액원을 통해 잘 정제된 깨끗한 피들이 흡혈족들에게 공급이 된다.
세상은 변했다. 그것도 피를 주식으로 하고 있는 그들에게 불리하게 변했다. 왜 혈액을 통해서 번지는 병들이 그리도 많은 건지. 그리고 그렇게 병균으로 오염된 피들은 마시는 자에게 그렇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깨끗하고 단 내까지 풍기는 피들은 그렇지 않다. 요즘같이 한 방울의 피도 의심해야 하는 때에도 그런 순수하고 깨끗한 피는 존재한다.
그가 선택한 파트너의 피 처럼.
머리가 복잡하고, 사태 수습에 대한 안건으로 머리가 복잡한 이 때, 왜 그렇게 그녀가 보고싶은 걸까?
아니, 그녀의 그 정결하고 혀 끝을 대기만 해도 전율이 흐르는 피가 마시고 싶은 걸까?
혼 날 것은 뻔한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이 약속한 것 처럼, 그녀는 그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그 달고 순수한 피를 줄 의무가 있다.
반쯤 일그러진 인상으로 한 여자가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은 마우스에 고정되어 화면에 뜬 인터넷 화면 이것 저것을 클릭하며 더더욱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제기랄."
그녀의 입에서 욕설이 새어나온다.
"거기 서 있는 거, 다 알아."
"들켰나?"
"뭐야? 지난번에도 와 놓고선."
"미안해."
어둠 속에서, 어둠과 무척 잘 어울리는 남자가 나온다. 여자는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며 왼 손목을 내밀었다.
"내일 회의에 지장 없을 정도만 마셔. 말 해두지만 내일 회의에 지장 있을 때는 정말 이 손목 그어 버릴 거야."
남자는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걸까?
"유안."
"마실거야? 말거야?"
남자는 한숨을 쉬며 그녀가 내민 손목을 잡았다. 손목에 나 있는 작은 구멍 두 개. 그리고 마치 작은 점처럼 보이는 그 구멍 두 개를 향해서 그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 계약을 맺었을 때도, 그는 손목을 물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손목을 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때 그 자신이 남긴 흔적 위로 그는 고개를 숙여 다시 물었다.
곧장, 그의 입 안으로 달고 신선한 피가 흘러들어왔다.
달았다. 인간들이 꿀을 보고 달다고 하듯, 그녀의 피는 그렇게 달았다. 그리고 반쯤은 사람 미치게 만든다.
따뜻하지만 끈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어오지만 절대 부드럽지는 않다.
계속 들이키며, 그는 반쯤 미칠 것 같은 광기에 휘말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계속 그녀의 손목을 물고 매달리던 그는 그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만."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그가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죽겠어. 그만."
흥분했던 모양이다. 그 달콤함에, 그 청신함에 취해서.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미안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그리고 피곤한 미소가.
그는 그녀의 손목에서 입술을 떼고, 상처를 슬쩍 핥았다. 상처는 금새 아물어 버리고,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오밤중에 날아와서 남의 손목은 물어뜯고, 그것도 모자라서 혈액 부족으로 죽어갈 정도까지 만들어? 당신 제정신?"
그녀의 오만한, 그러나 초점없고 무관심한 눈이 그를 향해 닿았다. 그는 피식 웃었다.
"못 속인건가?"
"그래. 이 바보 빨갱이 달아."
빨갱이 달이라. 그는 피식 웃었다. 그의 이름이 적월이라는 것을 안 그 순간부터 유안은 그를 그 우스운 이름으로 불러댔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도 그렇게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 꺼져. 아까도 말했듯이 난 내일 회의 있어."
"얘기하고 싶다면?"
"줄줄이 주워섬겨 보든지."
적월은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이지만 밉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상태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차린다.
"실은."
그래서 그는 털어놓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