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14. 움직이는 시간




찬 공기를 뚫고 쏟아져내렸던 겨울비가 그치고 검은 구름 뒤에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영은 허름한 폐차장 창고에 홀로 앉아서 화살깃을 다듬고 있다. 그의 예민한 귀가 빗속을 가르는 자동차 소리를 잡아냈다. 잠시 후 차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고 질퍽한 땅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낮게 들렸다. 창영은 낮게 조소했다. 지나치게 조심하는군. 이윽고 창고의 문이 신중하게 열리고 닫혔다.
불도 켜지 않고 어둠속에 앉아있던 창영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가 계속되었다. 화살을 하나 하나 정성스레 다듬는 손길. 화살깃을 코끝에 대어보고 흐트러진 깃을 세심한 손가락으로 정리하는 창영은 어둠속의 그림자가 그의 앞에 다가와 서도 꿈쩍하지 않는다. 창고 벽 높은 곳에 난 작은 창문을 통해 달빛이 흘러들었고, 그림자 주인의 고급 수트가 달빛에 번쩍거렸다.


“당신이 마창영인가?”
무례하기 그지없는 오만한 목소리.
“무슨 일이쇼?”
“그것을 잡으면 나에게 넘겨줬으면 하는데. 얼마면 돼지?”
창영은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
“무엇을 원하는거냐?”
“그야 물론 전부 다.”

화살손질을 마친 창영은 급작스럽게 활을 들고 화살하나를 손님을 향해 겨눴다. 뾰족한 화살촉의 끝이 방문객의 한쪽 눈을 향했다. 방문객은 순간 움찔거리고 뒷걸음질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순간에도 창영의 화살 끝은 정확히 그의 오른쪽 눈을 향해 있었다.

“다섯 장. 물건을 넘길 때 받도록 하지.”

창영이 활의 시위를 풀고 화살을 떼어 놓았다. 방문객은 그제서야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한 쪽 끝이 올라간 입술사이로 흰 이가 반짝거린다.
“그럼. 잊지 말고 연락주시오.”

남자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과 선금이 들어있는 봉투를 꺼내 창영의 작업탁자 위에 올려놓고 빠르게 사라져갔다. 단 하나를 빼고는 그에게 넘겨줘도 상관없다. 오로지 붉은 구슬 하나면 된다. 창영은 봉투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려 창문 틈으로 흘러든 달빛을 쏘아보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달아, 어서 어서 숨어들거라.




강이 나간 지 이틀째.
미호는 계속 멍해있다. 미술관에서도 실장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해 핀잔을 들었다. 미술관을 찾아왔던 윤재하도 건성으로 대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와의 대화가 필름 끊긴 것처럼 드문드문 생각날 뿐이다.
동창인 정혜에게 물어서 찾아왔다는 그는 미술관의 작품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전문가수준의 지식을 늘어놓으며 찬사의 말을 했었다. 골동품을 보는 안목이 대단했다. 지난 고미술품경매에도 참가해 고려시대 청자향로를 낙찰 받았다고 자랑스레 말했던 듯 하다.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던가. 그는 욕심 많은 수집가타입이었다. 어쩐지 수다스러웠던 그가 돌아가고 나니 미호는 더욱 멍해져서 그대로 조퇴를 해버렸다.



그렇지만, 그가 없는 집에 깔깔거리며 TV를 보고 있는 이라가 있었다. 소파를 등지고 앉은 주위는 과자부스러기 등으로 어질러져 있다. 이라는 미호에게 잠시 눈길을 주며 ‘왔어?’라고 대답이 필요치 않은 말을 건네고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소파 곁 탁자위에는 와인 병이 반쯤 비워진 채로 놓여 있다. 이라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손을 뻗어 와인 잔을 든다. 왠지 낯익은 풍경.

그랬었다. 강이 며칠씩 하릴없이 집 안에만 있었을 때, 저랬었다. 어느새 익숙해졌었나보다.  미호는 혼자였을 때 보다 지금, 더 외로움을 느꼈다.

디리링-
TV 소리를 뚫고 전화음이 거실안으로 퍼졌다. 미호가 반응하기도 전에 이라가 늘 그래왔던 것 마냥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상대방과 몇 마디 주고 받더니, 팔을 쭉 뻗어 미호에게 무선전화기를 내밀었다.

- 네.
- 나야.
그리운 목소리.
- ! 어....
- 별일 없지?
- 쿡. 걱정되나봐.
미호가 작게 쿡쿡거렸다. 그렇지만,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진심에 고마웠다. 처음이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 이봐, 이봐. 이쁘게 좀 말할 수 없어? 사무실에 전화했더니, 아프다고 조퇴했다 그래서...
끝말을 흐리며 타박하지만,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안심하고 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강은 이런 저런 주변상황에 대해 한참을 늘어놓더니, ‘조심해’라며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에서는 아직 그의 음성이 들려올 것만 같아 미호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보고 싶어요?”
이라가 와인을 마시다말고 미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묻는다. 미호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서둘러 전화기를 제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얼굴에 너무 쓰여 있어.”

어린애에게 한방 맞은 기분이다. 미호는 소파위에 풀썩 앉아버렸다.
“그래... 그렇지만, 아무 것도 결정할 수가 없어. 어느 쪽으로도.”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너무 부러운걸. 우리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궁극의 목적은 뭐, 그거 아니겠어요.”
이라가 눈을 반짝이고 미소 지으며 축배하 듯 와인 잔을 들어올려 보였다.


몇 시간 뒤, 미호는 차갑게 얼어버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충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직 그가 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늦은 시간 움직이는 이유의 전부다. 이라는 혹시라도 혼자 남겨질까봐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앉아 흥미로운 눈으로 미호를 지켜보았다.

“나도 언젠가는 사랑에 빠질거에요.”
이라는 꿈꾸듯, 자신에게 주문을 걸 듯 다짐한다. 미호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도로 위로 차를 몰았다. 눈 속에서 보이지 않는 달은 더욱 깊이 숨기 위해 차근차근 움직여가고 있었다.





파사산(婆娑山)

산의 고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산의 봉우리는 낮은대로 날카롭다. 그 산 능선을 따라서 산성이 쌓아 올려진 형상이 보인다. 산봉우리를 따라서 축성된 파사산성은 원래의 형태를 오래전에 잃어버린 듯 긴 성벽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려 있었다. 눈이 내려앉기 시작한 그것은 마치 돌무덤처럼 처연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산성을 휘감듯 퍼져드는 귀곡(鬼曲).

눈발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곡성(曲聲)도 격렬해진다. 보통 사람이라면 귀를 에이는 듯한 이 소리를 듣고 발길을 돌렸을 테지만, 강은 곡성의 발원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그러다 강은 갑작스레 발을 멈추었다. 고막을 찢을 것처럼 위협하던 곡성이 일순간 끊겨 버렸다. 이어 바람소리와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던 산속에 비명이 퍼져 울렸다. 고통에 찬 울음소리가 뒤엉켜 빽빽한 나무사이를 뚫고 강의 귀를 때렸다. 강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성벽을 따라 움직이던 강은 산성의 끝, 성벽이 무너져 내려 산을 이룬 끝에서 인영(人影)을 보았다. 능선이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그 곳의 잔해는 소나무 군락으로 둘러 싸여져 있어 호위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돌무더기 위에서 칼을 내던지는 여자의 형상이 움직였다. 여인은 춤을 추는 듯 돌산 위에서 뛰어 내렸다. 긴 머리카락이 옷자락과 함께 나풀거렸다.

“....아직이야.”
여인은 강 앞에 서며 낮게 읊조린다. 강은 긴장을 풀며 빼어들었던 무혼을 거두어들였다.

“진혼(鎭魂) 아니었나?”
그렇지만 강은 날카로운 시선만은 풀지 않았다. 눈이 여자의 긴 흑발에 내려앉으며 녹아들어 머리카락이 젖어들었다. 청준은 풀어졌던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그녀의 무구(巫具)들을 챙겨 산을 내려갈 채비를 했다.
“쫓던 놈이 아니야. 왜란 때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지. 원혼들을 이용하다니....”
청준은 분노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로 간 거지?”
“도망치진 못했어. 산 전체에 진을 쳐놨거든.”
청준은 성큼성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은 한동안 아직도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산성을 돌아보고 청준을 따라 걸음을 산 아래로 향했다. 눈이 점점 더 쌓이기 시작했다.






-----------------------------
하도 띄엄띄엄이라 민망합니다.

저기 위에 나오는 파사산은 제 고향 집 앞산입니다.
'파사'는 신라시대왕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파사'는 무당, 제사장의 의미라네요.) 그 산에 실제로 있는 산성이구요, 요사이 아버지께서 아침마다 등산 다니시는 높지 않은 산입니다. 저도 올라가본 적이 있지요.
어렸을 때는 그 산에 승냥이도 있었다는 소문이 돌곤 했습니다.
(동네 개들이 죽거나, 없어지거나 했던 기억이..정확친않습니다만.)
정말이었을까, 여전히 궁금합니다.

댓글 '2'

Junk

2004.08.27 00:50:49

오랜만입니다. 심호흡 한 번 하고 읽으러 갑니다.

앨리스

2004.08.27 14:24:39

맘에 드는 문체에요. 멋져요~!!! +_+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5 Perfect Partner 2-2 [1] ciel 2004-10-03
24 Perfect Partner 2-1 [6] ciel 2004-09-30
23 흡혈족 연대기에 관련된 약간의 설명. [1] ciel 2004-09-13
22 Perfect Partner 1-3 [5] ciel 2004-09-13
21 Perfect Partner 1-2 [8] ciel 2004-09-07
20 Perfect Partner 1-1 [9] ciel 2004-09-03
19 Perfect Partner - Prologe [6] ciel 2004-09-03
» 미 호(美 狐) 14 [2] 홍랑 2004-08-26
17 미 호(美 狐) 외 전 홍랑 2004-07-19
16 미 호(美 狐) 12-13 [4] 홍랑 2004-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