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part III



12


이라(狔羅)



늦은 시간이다. 게다가 금요일 밤. 휘청이는 사람들, 고성을 지르는 사람들, 여기 저기 취한 밤의 흔적들이 널려있다. 강으로써는 드물게 모임이 있는 날이다. 퇴마사들의 모임인데도 그닥 참석해 본적이 없던 그였지만, 그래도 일년에 한 두 번 정도는 그간의 소식이랄지 정보들을 얻을 요량으로 참석하곤 했다. 나름대로 바쁜 존재들이기 때문에 전부가 모이는 것도 쉽지 않아서 모임의 어느 누구도 전체 회원 얼굴을 한 번에 다 본적이 없었다.

이런 모임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강은 역시나 심드렁한 얼굴로 대화에는 끼이지 않은 채 듣고만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는 뜻밖의 정보를 하나 입수했다. 어쩌다가 지난 번의 ‘명인 사건’이 흘러들어간 모양인데, 모임의 일원인 용주가 그에게 은글 슬쩍 미호의 얘기를 물었다.

“지난 소류산 사건 때, ‘그 여자’가 도와줬다며?”

여자라고? 용주의 질문에 다들 귀가 이쪽으로 쏠렸다. 몇몇은 눈치를 보며 곁눈질을 했고 몇몇은 노골적으로 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이런 류의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는 묻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다들 조금씩은,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반대편에 선 것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하기 때문에 본질을 흐리지 않는 한에서 그런 상황을 눈감아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미호의 존재는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만큼 충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나보다.

“어때요? 월광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홀리고 만다는데?”

연이어 쏟아지는 질문들, 강은 좀 귀찮아진다. 적당한 말을 찾기도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그리고,

“쉽지 않은 길을 가는군. 이제 곧 월식이 다가오는데, 사냥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어.”
한쪽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창백한 얼굴의 청준이 강의 주의를 끄는 말을 꺼냈다.  
그녀는 와인잔을 들어 붉은 액체를 목으로 넘긴다.

“무슨 사냥?”
“몰라? 월식의 여우사냥, 사냥꾼은 때를 기다리지. 구미호가 가장 약해지는 그 짧은 시간을.”

청준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와인을 한 번에 목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강을 똑바로 주시하며 한쪽 입가를 들어올렸다. 까맣다 못해 짙푸른 긴 머리카락이 불빛에 반들거린다.

“나도 전해들은 얘기야. 창영(昌影)의 화살이 가장 위험하다더군.”


월식. 사냥꾼. 화살. 창영이라?
이런 저런 생각으로 사람들 붐비던 곳을 빠져나와 한적한 길을 걷고 있던 그의 눈앞에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넥타이 아저씨 둘과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들어왔다. 팔을 뿌리치고 짜증 섞인 소리를 내고 있는 여학생과 계속해서 강제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끄는 사내들. 강으로써는 반갑지 않은 상황, 그냥 지나치자니 마음 한구석이 켕기고 끼어들자니 귀찮고. 그렇지만 약간의 취기 탓인지 그의 몸은 벌써 그들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봐요, 거기 학생! 도움이 필요해요?”

이미 술통에 반쯤은 들어갔다 나왔을 법한 아저씨 하나가 도끼눈을 하고 강을 쳐다봤다.

“너는 가던 길이나, 가라. 엉?”
“대체 뭐냐고, 어린 학생 상대로.”
“아저씨는 참견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

이것은 깜찍한 여학생의 발언이었다. 뭔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나? 분명 여학생은 강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다. 뽀얀 얼굴의 여학생은 찡그린 얼굴로 강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강의 눈에 잡힌 것은 여학생의 몸에 희미하게 겹쳐진 여우의 모습이었다!

“이런, 이런, 여우였잖아, 이거. 아저씨들, 구미호에게 잡아 뜯기지 말고 제 충고대로 집에나 들어가시죠. 네?!”

강은 한심하다는 투로 사내들에게 말했고, 여학생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 이봐요!”
“너도 곱게 가라, 지금 그냥 가면 해치진 않을테니.”
발끈하는 그녀의 말을 묵살하고 그대로 뒤돌아서버린 강은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째서, 주위에 여우들이 꼬이는 거야...”

그러나 정말 귀찮은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그가 미호의 빌라에 다달았을 무렵.
“아저씨 사냥꾼이에요?”
그의 뒤를 쫓았는지 여학생 구미호가 그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당돌한 질문을 했다.
“아니지. 사냥꾼이면 날 가만두지 않았겠지. 그럼 아저씬 뭐예요?”

오만상을 있는대로 찌푸린 그는 기가 찬 듯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라(狔羅)는 황당해 하는 아저씨들을 내버려두고 돌아서가는 강의 뒤를 쫓았었다. 그녀의 실체를 알아본 그가 흥미롭다.
이윽고 강은 입을 뗀다.

“이봐, 교복입은 구미호. 너 갈 길이나 가라고.”

그리고 짧게 내 뱉은 강은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멈춰 선 이라의 눈은 여전히 강의 뒤를 쫓는다. 인간이건 구미호건 귀찮다 정말. 그는 단 한가지 이외의 다른 건 생각할 여력이 없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아! 저기 걷고 있는 그녀 외에는 어떤 것도 그의 머릿속에 들어올 수 없다.

회색 더플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천천히 발을 옮기다가 멈춰서 문득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한 손을 빼내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그녀. 강은 미호를 향해 가볍게 뛰었다.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강을 발견해낸 미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그녀가 웃는다.


“왜 나왔어, 날도 찬대.”
“으응.”
“대답이 왜 그래? 응 이라니.”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냥, 산책. 공기가 시원하다.”
강은 가만히 미호를 본다.
“당신이 그렇게 웃으니까 나도 웃어버리게 돼. 흠... 확실히 전염병이야.”

자못 심각한 얼굴로 미호를 전염병 보균자로 규정지어버린 강은 미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걷기 시작했다. 가볍게 투덜거리는 그녀와 그의 뒤를 아직도 저만치에 서있던 이라의 눈이 놓치지 않고 쫓았다. 이라의 눈에 호기심이 증폭된다.





13





“일찍 올께”
외투를 챙겨 입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그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가 건넨 말이다.
그 말에 미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두 뺨이 붉어진 것은 보나마나. 뭐, 남편 배웅하는 새댁같잖아. 나쁘지 않아.

그렇지만 늦도록 그는 돌아오질 않는다. 시계만 바라보던 미호는 결국 집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리고 막상 그를 마중하게 되었을 때는 가슴이 너무 벅차서 대답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이 기운의 정체는.... 그의 뒤 저만치서 그와 나를 관찰하고 있는 존재였다. 짧게 올려 입은 교복 치마 아래로, 쭉 뻗은 각선미 좋아 뵈는 다리가 눈에 띈다. 미호의 붉은 시선을 그대로 받아낸 그녀는 갑자기 싱긋 웃어 보이더니 그들을 향해 가볍게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야?! 너, 아직 안 갔냐?”
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아는 체를 했다.
그들에게로 다가온 그녀는 강과 미호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금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음... 그런 거였군요. 우와! 멋져요! 둘, 사랑에 빠진거죠?! 그쵸?!”




  
“맛있어!”
이라가 입술 양 끝에 남은 붉은 흔적을 혀끝으로 핥으며 감탄하며 와인이 담긴 글래스를 양손으로 잡은 채 식탁위에 내려놓았다.
“야, 여기가 너네 집이냐? 염치가 없어.”
강이 기가 찬 듯 이라에게 핀잔을 준다. 그리고 미호는 그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와인에 다시 입을 대는 이라와 본인의 과거는 잊었는지 생각도 못하고 그녀를 타박하는 강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여기가 지나던 객이 머물다가는 곳이냐고.
계속해서 투닥거리는 강과 이라를 남겨두고 미호가 식탁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섰다. 그 마찰음탓에 앉은 둘의 눈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갑작스런 시선집중에 미호는 몇 초간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강의 시선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에 아직 머물러있다.

“이봐, 월식엔 너희들 어떻게 하지?”
강이 시선을 바로하고 이라에게 물었다. 여전히 와인에 심취해있는 그녀가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월식이라......뭐, 간단히 말하면 사냥당하지 않게 조심해야죠.”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고?!”
그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나도 몰라요.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피하는 것 밖에 없죠! 흥-”
“왜 신경질이야?!”
“그럼, 내 목숨 오락가락하는 데, 잘 피하는 것 수밖에 없다는데 어쩌라구요! 아저씨가 지켜주면 되겠네! 언니는, 그럴꺼 아니에요?! 잘 지키라구요. 그 김에 나두 좀 살아보자구요.”
“너, 그래서 여기 있겠다는 거야?”
“그럼 내가 갈 데가 없어서 여기 있겠다는 줄 알았어요?!”
이라는 뾰루퉁해져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아아. 모든 것이 난감해. 그녀, 어쩌면 좋은거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밤의 침묵을 작게 깨뜨리고 있다. 스탠드의 형광 불빛이 읽고 있는 책을 반사시켜 준다. 작은 노크소리에 이어 딸깍하고 문이 열렸다.

“....”
그는 미호를 바라볼 뿐 말이 없다. 아니, 사실 그는 할말을 잊었다.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늘어뜨리고 가벼운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하의를 입은 미호는 영락없이 공부하는 학생. 책에서 시선을 떼고 강을 바라다보는 그녀는 그렇지만, 너무 예뻤다.

“무슨?”
당연한 의문부호.
“아!...아니, 저...음...나 나가봐야할 것 같아서.”
“이 시간에?”
책상 한 켠에 놓아둔 탁상용 시계는 한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음..갑자기 연락이 왔어.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걱정되어 어쩐지 그냥 갈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같이 가지 않을래?’ 하지만  말이 입안에서 맴돈다. 괜한 걱정인가싶기도 하다.

“저기..금방 올게. 나 간다.”
강은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휙 뒤돌아 나가버렸다. 이어 현관문 닫히는 소리. 그리고 공백. 미호는 멍하니 강이 나가버린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나간 자리에 대신 불안감이 엄습한다. 다들 웃겠지만, 미호는 지금 무섭다. 두렵다. 혼자이지 않은 때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가 떠나서 두렵고 무섭다. 팔 위로 소름이 돋아난다. 빨리 돌아와야 해. 제발.








****
죄송스럽게도.

근 일년만에 수정도 없이 올리는 거라( 것도 달랑 짧게 한 편 쓴거가지고..), 망설였지만. 그래도 끝이 내야겠기에..ㅠㅠ 진짜 얘내들 빨리 어떻게 해주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강, 이 녀석은 미호를 두고 어딜가는건지..대체...쯧쯧.




댓글 '4'

릴리

2004.07.19 17:16:12

그러게요. 위험한 날에 미호만 두고..ㅡㅡ^
정말로 얘네들 빨리 어케(?) 좀 해주세요. 흐흐..

Miney

2004.07.20 02:20:52

네네... 빨리 어뜨케 좀 해주시와요. 미호랑 합궁;하면 설마 기가 빨리거나 하는 건 아니겠죠? 모...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강이는 괜찮을 거에요. 터프한 녀석... ^^;;

Lian

2004.07.20 13:59:29

정파가 소설 싸이트가 되긴 됐군요! 바로 전날 올리신 글이 메인 화면에 뜨지 않을 걸 보면요. -0- 올리신 것도 모르고 있다가, 수룡님의 러브 인 메이저리그 업데이트 된 거 보고 들어왔다가 발견! 그리고 감격. ㅠ_ㅠ
kbs에서 구미호외전 어제 시작했답니다. (자극 받으셨나요? -_-)

앨리스

2004.07.20 15:50:58

미호 넘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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