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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오후.
늦은 점심을 먹던 미호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이제사 일어나 방을 나오는 강을 쳐다봤다.
제멋대로 뻗친 머리칼.
두 눈에서 잠을 쫓느라 부비적 거리는 손가락.
들어올린 손목에서 팔꿈치에 이르는 멋지게 분리되고 발달한 팔근육.
(보통은 팔꿈치에서 어깨사이가 더 눈에 띄게 마련인데)
미호 앞자리에 털썩하고 앉아서도 미어져 나오는 하품을 손등으로 누르는 강의 미간이 틀어져 올라가 팔(八)자가 되어버렸다.
뺨으로 흐르던 눈물을 훔치는 강의 모습은 어린 아이와 다를 바 없다. 미호는 그런 강의 모습에 주던 시선을 거둬버렸다. 그러나 그는 오래도록 미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미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도 역시 그의 눈은 미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오늘 오후엔 유난히 더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그 시선을 받은 미호의 두 뺨에 살짝 붉은 기운이 번졌다. 그녀는 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계속해서 미호를 바라봐 줄까? 언제까지고 그녀 앞에 이렇게 앉아 있어줄 수 있을까? 만약, 만약,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정말로 사람이 된다면 그는 그녀 곁에 머무를까, 아니면 그녀에게서 떠나버릴까?
그대로 붉은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는 강의 행동 하나 하나는 미호를 자극한다. 강이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미호는 혹시나 그가 그녀의 감정을 알아챘을까 라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나두 밥 줘-."
미호의 눈이 비죽 치켜 올라간다. 순간을 깨는 소리. 마치 얼음 땡 소리처럼, 정지되었던 시계를 다시 돌게 만들 듯. 미호는 한 순간 허탈함을 느꼈다. 바보, 뭘 기대한 거야.
"너 손 없냐? 니가 퍼 먹어."
멈추었던 젓가락질이 계속된다.
"귀찮아."
미호는 들은 듯 만 듯 밥먹기에 열중한다.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중인 미호를 멀뚱한 눈으로 보던 강이 던진 말이란...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켁. 켁.
목으로 넘어가던 밥알이 그대로 걸려버렸다.
"호오~ 밥 먹는구나? 무슨 반찬~?"
강은 리듬까지 타면서 계속 묻는다.
사레가 들어버린 미호의 눈에선 눈물이 찔끔거린다.
"흐음...개구리 반찬~~??"
서둘러 물을 마시는 미호를 보며 입술 양끝을 들어올리며 알겠다는 얼굴의 그는 어쩌면 '악랄'하기도 하다.
"살았니~? 죽었니~?"
"미치겠다, 정말!!"
약이 바짝 오른 미호와 그녀가 내려놓은 젓가락을 들어 이것저것 반찬을 집어먹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강이 만든 비 오는 오후의 풍경.
딩동~
인터폰 화면에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은 주저없이 그리고 당당하게-마치 주인인양- 현관문을 열어 젖친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환영의 미소까지 덤으로 얹어.
누나가 보고싶다고 졸라대던 여진을 데리고 와 미호의 빌라 현관문 앞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경은은 낯선 남자와 마주서자, 벨을 잘못 눌렀나 싶어 고개를 뒤로 돌려 빌라의 호수를 확인했다.
경은의 손을 잡은 채로 누이를 기다리던 여진은 까맣고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강을 보았다.
"여기, 은미호..."
경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 지금 샤워중인 것 같은데...들어오시죠."
만면에 웃음 가득.
경은은 의심에 찬 눈초리로 강을 훑어보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누구?"
경은이 물어야할 질문을 되려 강이 던졌다.
"난, 미호 이몬데,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어! 이모도 있었네? 그럼, 이모도 여우..??"
강의 되물음에 경은은 여진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 그를 쏘아보았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난, 여기 사는 사람. 암....난 그냥 사람이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여진의 물음에 대답하는 그에게 경은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고개를 높이 들어 강을 보던 여진은 신기하다는 듯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니까-, 뭐 하는 사람인데요?”
“아, 뭐, 이런 거 얘기하면 안되는데.....”
일급비밀을 얘기하는 것처럼 강은 자못 심각한 표정-여진이 보기에는, 그러나 경은이 보기에는 장난기 다분한-으로 여진의 한쪽 귀에 대고, 손으로 살짝 가리면서 속삭였다.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아저씨는 말이야, 귀신 잡으러 다녀.”
여진은 진지하고 신중하게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는지 강을 찬찬히 다시 살폈다. 경은은 기가 막혔다. 여진이 뭐라 말하려고 하자, 강은 손가락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침묵을 강조했다.
“쉿! 너만 알고 있으라니까, 비밀이야. 알았지? 아저씨랑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침묵의 약속을 강요하는 강과 그것에 동조하는 여진의 모습은 정말로 정말로 진지했다. 언제 나왔는지 젖은 머리인 채로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입술에 걸고 그들을 지켜보던 미호를 경은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꿍짝이 맞아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겠다고 부산스럽게 나간 두 남자, 강과 여진이 사라지자 경은과 미호는 그제서야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경은은 말없이 미호를 바라보기만 했다.
경은에게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위험하군...”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시는 경은은 허탈함을 느꼈다. 위험해. 목표 달성을 코 앞에 둔 구미호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사람이다. 그것도 마음을 줘버린 남자. 감정 때문에 이성이 흐려지고 냉정함을 잃는다. 인간이건 여우건 간에 사랑에 빠지면 균형을 잃고 중심을 잃고 판단이란 것은 저 멀리로 내던져버리고 바닷물에 휩쓸리듯 사랑에 모든 것을 맞춰버리는 부류의 여자가 있다. 인간의 감정을 알게 된 여우의 경우는 그 정도가 물론 더 심각하다. 미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무리 해도 그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미호를 힐끗거리던 경은은 혀를 찼다.
위험해...
방법이 없다.
결론도 없다.
경은은 다만 ‘인연’이란 것에 희망을 걸어볼 뿐이다.
굳이 배웅을 하겠다며 빌라 밖까지 따라나선 강이 떠나가는 차 뒤꽁무니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남들이 보면 강의 손님인 듯 보였을 그의 이모와 사촌동생을 보내고 들어서는 미호는 엉뚱한 강의 행동에 좀 어이없어했다.
“내가 아니라 네 이모구 네 사촌동생같다?”
갈증을 느끼는지 들어서자마자 부엌으로 직행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키던 강이 미호의 주문에 걸린 듯 동작을 멈추었다.
“.......”
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묵한다. 뭔가 잘못 말한 건가? 그러나 그는 다시 싱긋 웃는다.
“그래, 그렇지? 난 가족이구 친척이구 그런 거 없으니까....”
물을 다시 들이키는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미호의 반문은 또 의외여서, 왜냐면 보통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을 꺼낸다는 것에 대해 불편하니까, 강은 물을 마시며 눈동자만 그녀에게로 향한다. 꿀꺽 꿀꺽 천천히 생수병 하나를 다 비우고 나서 강은 미호에게로 돌아선다.
“절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거기에 버렸다는군, 아기 때.”
무심한 어조. 무심한 눈동자.
“그래서 부모님은 안 찾아봤어?”
당연한 의문, 당연한 질문인데 역시나 보통은 잘 묻지 않는다.
“없어. 난 부모가 없어요.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니까. 크크.”
큭큭거리며 농담을 던지고 냉장고 문을 열어 뭔가를 뒤적거리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쓸쓸해. 이상해. 미호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어쨌든 이상한 일. 구미호인 그녀에겐 가족이 있는데, 강에게는 누구하나 없다. 미호의 마음이 찌릿거린다. 그는 정말 하늘에서 떨어졌나??
8
휴가
올림픽 대로를 달리고 있는 차들은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많지 않다. 가로등 불빛이 빠른 속 도로 휙휙- 지나쳐간다. 보라색...초록색...붉은 색...노란 색...파란 색....형형색색의 조명을 쏘아 놓은 아름다운 다리들이 그들이 탄 차 뒤로 차례차례 물러나 앉는다. 강 저편에 점점이 빛나는 서울의 밤 풍경은 그대로 그림이다. 곡선을 따라 흐르는 한강이 서울의 빛을 받아 한들한들 반짝거린다.
미호는 서울 강변의 야경에 감탄하고 있다.
강은 감동중인 그녀 곁에서 속으로 웃음을 감추며 운전하고 있다.
차 안엔 조용하게 음악이 퍼지고 있다.
그도 그녀도..... 오랜만의 여유, 편안한 상대.
그리고 처음 느끼는 두근거림 또 설레임.
"거봐 오길 잘했지?"
커피를 건내며 그가 싱긋거렸다.
"응... 좋네...오늘..."
그녀 역시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강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잘한 선택이다.
모처럼의 휴가임에도 집안에만 있던 미호를 타박하던 강이 무슨 생각인지 밤 10시가 넘어 들어와서는 차 키를 들고, 나가자며 미호를 밖으로 잡아끌었다. 망설여하는 그녀를 조수석에 밀어 넣고 강은 싱글거리는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빌라 단지를 빠져나갔다.
서울을 빠져 나와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택해 가던 그들은 두 세 시간쯤 달린 후, 국도변
작은 휴게소에 잠시 차를 세웠다. 아무래도 늦은 시간이라 휴게소에 사람도 차도 많지 않았
다.
먼저 내렸던 그를 기다리다 차에서 내려선 미호는 약간의 한기를 느끼고 손으로 두 팔을 가
볍게 문질렀다. 여름이라도 산에 가까워져서인지 기온은 내려간 듯 싶었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더욱 차게 느껴졌다.
휴게소 매점에서 두 손에 커피를 한 잔씩 나눠 들고 오는 그가 보였다. 휴게소의 불빛을 등지고 그가 그녀에게로 걸어오고 있다. 한 발자국....또 한 발자국.... 그의 모습이 점점 커져온다. 어느 새 그녀 앞에 선 그는 그녀 마음에서 그만큼 커다랗게 자라 있었다.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처음 그 만남 후로 그녀 안에 짙게 뿌려졌던 그는 이제 화선지를 모두 적시듯 그렇게 온통 그녀 마음을 물들이고 있었다.
씨익하는 미소와 함께 커피를 건네는 그의 따뜻한 손과 그녀의 손이 스쳤다. 미호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잔의 온기가 손을 지나 팔을 타고 마음에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마주 웃는 그들 머리 위로 짙은 구름 뒤에 숨었던 달이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 사라져갔다.
미명이 밝아오는 새벽.
그러나 해는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분무기로 뿜어대는 물처럼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바닷물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다.
하늘과 바다의 불분명한 경계
푸르게 넘실거리며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바다가 부서지며 내는 소리만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젖은 모래가 버석거리며 발 밑에서 무너져간다. 위태롭게 모래 위를 걷던 미호가 허리를 숙여 샌들을 벗어 든다. 발가락을 죄어오던 것으로부터 벗어나자 순간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서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모래가 움직여 들어와 마르고 지친 그녀의 두 발을 조금씩 조금씩 모래알 속에 숨겨준다. 신기한 듯 움직이는 미호의 긴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어깨 아래로 커튼처럼 흘러 떨어졌다. 그녀의 하는 양을 보던 강의 꽂힐 듯한 시선에 언뜻 다정함이 묻어난다.
방심했다. 그래, 그는 방심하고 있었다. 사람에게 정을 주지 말자는 그의 신념이 무너졌다.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언제고 갈 목숨,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험천만한 생을 살고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그가 상처입고 힘들어해도 아파할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죽더라도 그를 아쉬워하거나 그리워할 누군가를 만들지 않는 것, 그 자신이 외롭다할지라도 그를 위해 울어줄 사람을 남겨두지 않는 것이 그가 해야할 선택이었고 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적당한 만큼의 교분을 쌓는 것이 그에게 배분된 생이라고 여겼다. 어차피 혼자 가는 인생이라고 결론지었었다.
그런데, 이 여자, 미호에게 그는 방심했었나보다. 어쩌면 그보다 무방비상태였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고 서서히 익숙해지고 이제는 어느 한 부분,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지치고 외로워 그녀에게라도 위안을 얻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녀, 미호는 이제 강에게 위안과 위로를 주는 존재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강에게 안식이 허락된 단 하나의 존재.
강은 공기를 감싸안는 것처럼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하늘로 향해 눈을 감으며 내리는 비를 느낀다. 어렴풋이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옅게 뿌려지는 비가 어느 샌가 그의 흰 셔츠를 흠뻑 적셨다. 바람과 함께 머리 속 가득히 청량함이 밀려들었다.
“고마워. 늦게라도 바다에 다 와보고... 정말 새벽 바다는 좋은 거구나.”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든 미호가 감동한 얼굴이 되어 감사의 인사를 건네자 강은 왠지 머쓱해졌다.
“아아-, 아니 뭘, 나도 고맙지.. 심심하지 않게 와서.”
자랑스럽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 잰 채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에 미호는 웃어버렸다.
“쿡쿡. 고백하는데...나 정말이지,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여유롭게 어딘가로 휴가를 떠난 적 없었거든. 난 정말 사는데 바빴거든.”
“마찬가지.”
되돌아 온 것은 한 마디의 동의, 한 모금의 미소.
그리고 그는 발을 옮기다 휘청거리는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그녀를 향해 뻗어지는 다정한 손. 한동안 말없이 강의 내민 손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한쪽 손에 샌들을 그러쥐고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는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녀의 손가락이 얽혀든다. 어색하게 쥐어진 그녀의 손을 강이 가만히 힘주어 잡았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 늦여름을 막 지난 낙산 해변 한 켠 습윤한 공기 속에 손을 잡고 느린 걸음을 옮기는 그들이 그림처럼 채우며 있었다.
end of the part I
part II
9
자장가
자장자장 우리아가
자장자장 잘도잔다
......
한 여자가 당집 앞에 주저앉아 자장가를 부르며 울고 있다. 포대기를 등에서부터 허리로 감고 있는 여자는 정말 슬피 슬피 울며 노래를 부른다. 머리는 산발. 지저분한 얼굴엔 눈물 마른 자국과 흐르는 자국이 여럿 겹쳐져있고, 사람의 발길조차 뜸한 그 곳을 지나는 동네 사람들 몇은 혀를 끌끌 차며 안됐다는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고 간다. 해도 뉘엿뉘엿 모습을 감추고 발걸음이 끊겨도 자장가는 멈추질 않는다. 아이를 잃은 젊은 무당 명인은 당집 고목나무 아래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몸을 서서히 감싸는 것도 모른 채 구슬픈 자장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고 있다.
“형이 더 좋아? 누나가 더 좋아? 엉???”
아이스크림 콘를 한손에 쥐고 놀리듯 흔들면서 다른 한손으로 흘러내리는 크림을 낼름낼름 핥아먹는 그는 지금 여진을 약올리고 있다. 게다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니!
첫 만남 이후로, 서로가 마음에 든 두 남자는 지금은 꽤 친해져서(아무리 봐도 강의 정신연령은 여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고 강의 강요에 힘입어 ‘아저씨’였던 호칭은 ‘형’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강은 모르는 채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핥기에 열중한다. 큰 키의 그를 올려다보느라 고개를 뒤로 한참 젖힌 여진은 정말 간절한 얼굴로 강의 손에 쥐어진 아이스크림을 넋을 잃을 것처럼 보고 있다. 이것은 영락없이 또래 아이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을 강요하다니. 형을 선택하면 분명 아이스크림을 얻게 되겠지만, 그러면 자신의 핏줄인 누나를 볼 낯이 없을 것이고-비록 아이라지만!-, 누나를 선택하자면 여진이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 여진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머뭇거리기만 하던 여진이 쓰윽 뒤를 돌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미호를 본다. 분명 미안한 얼굴이다. 아아-, 이런 미호는 아이스크림만도 못하단 말인가?!
“엉?! 누구야? 누구?”
못됐다. 저 인간은!
“.....혀-엉.....”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형’이라고 선택한 여진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강은 흐뭇한 얼굴이 되어 콘을 여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나, 여진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는다. 웬일??
조금 전 울 것 같았던 얼굴은 이제 한계수위에 도달해 있었다. 곧이어 터져버린 울음.
“우왕-, 앙- 앙--나는 누나도 좋아-. 엉- 엉-”
미안한 마음에 먹지도 못하고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음을 터뜨린 여진. 소파 한 쪽에서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미호가 얼른 여진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래, 여진이는 누나를 좋아해, 누나도 알아, 누나도 여진이 사랑해!”
“앙- 앙-”
“괜찮아, 여진아. 형이 장난치느라 그런거야. 여진아, 아이스크림 녹는다. 얼른 먹어!”
“엉-, 정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 듯, 여진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아이스크림을 핥작이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똑같은 포즈로 핥작이고 있는 강의 수준이 정말 의심스럽다.
미호는 티슈를 뽑아 여진의 얼굴을 닦아준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
그런데, 콘을 과자까지 꼭꼭 다 먹고 난 여진은 영악하기도 하지. 뿌루퉁한 얼굴이 되어 하는 말인즉슨,
“형아! 세상에서 제일 미워!”
귀여운 복수를 하고는 쪼르르 미호의 방으로 도망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간 강은 그대로 여진의 뒤를 쫓아 들어간다. 꺄르르-, 여진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숨박꼭질을 하며 이 방 저 방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둘 때문에 미호는 오늘도 온전히 독서에 집중할 수가 없다.
자장 자장 우리 여진이
자장 자장 잘도 잔다
자장...자장...
한참을 놀던 여진은 어린아이답게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잠이 들었고 자장가를 부르며 여진의 배를 토닥여주던 미호도 나른한 졸음을 느낀다. 거실바닥에 펴놓은 담요 위에서 세상모르고 잠이 든 여진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평화.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자장가를 읊조렸던 미호의 손이 잦아 들었다. 여진을 사이에 두고 곁에서 오래된 책을 읽고 있던 강이 잠든 여진과 졸리운 미호를 힐끗거렸다.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던 미호는 잠이 확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뭐냐고, 그렇게 쳐다보면 어쩌란 말이야. 그런 다정한 눈빛이라니...
“너, 꼭 엄마같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책으로 다시 눈을 돌리는 강과 그의 말에 얼굴을 살짝 붉히고 마는 미호였다.
“우리 아들, 아주 꿈나라에 빠지셨네! 으이구, 내 새끼.”
경은이 잠이 든 여진을 투닥거려 깨운다. 잘만큼 잔 듯 잠투성 없이 깨어난 여진이 눈을 부비적거리고 여진의 부드럽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남녀의 손이 목표에 닿기도 전에 충돌한다. 멈칫, 한다기 보다 더한 정전기가 일 듯 깜짝 놀라 움찔거리는 강과 미호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 빠른 경은은 잡아채고 말았다. 손이 부딪치고 그 충돌에 놀란 얼굴이, 눈이 마주쳤다. 호오, 이것 봐라, 스파크가 이제야 이는 건가? 경은은 모르는 척 알만한 웃음을 입에 걸고는 여진을 데리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맑은 밤하늘에 불러가는 달이 환하게 떠있었다.
경은과 여진을 배웅하고 들어서던 강과 미호는 현관문 앞에서 마주보고 몸을 뒤로 트는 바람에 다시 충돌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서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느라 둘 사이의 간격이란 좁은 현관에서 아주 작을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충돌이 많은 날이 있다. 그것이 달의 인력 탓인지 남녀사이에 작용하는 어떤 법칙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지난 휴가 이후로 둘 사이 부딪침은 예전보다 잦아졌고 더해서 서로를 의식하게 되는 빈도수도 또한 높아졌다. 서로 실 끝을 잡고 당기는 것처럼 둘 사이의 기류는 이상한 긴장감으로 점점 팽팽해져 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자장가 소리가 들리고 나면 아이가 없어진다는 거야.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전부 동네 무당인 여자를 의심하고 있나봐. 그 무당이 얼마 전에 아이를 잃었나봐. 그 이후에 그 여자가 반쯤은 미쳐서 당집 앞에서 허구헌날 자장가를 불렀대. 첨에는 사람들도 불쌍하다 여겼는데, 아이들이 자꾸 없어지니까, 아무래도.... ”
윤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댄다. 그는 발굴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나가는 말처럼 전하고 있었다.
발굴관계로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온 윤영과 강, 어쩌다 보니 같이 하게 된 미호가 슬슬 찬기운이 돌기 시작한 야외 카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백교수님이 부탁한 고문 해석일로 학교를 찾았던 강이 윤영의 전화를 받고 카페에 도착해보니 미호가 윤영과 즐거운 듯이 얘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보다 먼저 윤영이 그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어주었다.
“둘이 어떻게 된거야? 데이트라도 하는 거야?”
털썩 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나머지 빈 좌석에 던져놓는다.
“데이트라니..무슨..”
“데이트라면 데이트죠. 둘만 있으면...쿡쿡...왜 질투하냐?”
미호가 과장된 액션으로 부정을 하는 반면, 윤영은 짖궂은 발언으로 강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대화는 서버가 날라온 물잔과 메뉴판으로 인해 끊겨 버렸다.
“여기 안쪽 서점에서 발견했지. 방해한 건 아니죠? 미호씨.”
“아니에요. 그렇잖아도 커피 한 잔 마셨으면 했는걸요. 호호-”
뭐야, 저 여자 뭘 그렇게 웃는 거야. 참, 사근사근하게도 구는군. 몇 마디 말을 연이어 주고받는-즉, 강은 안중에도 없이- 둘의 대화를 경청(?)하는 강은 적잖이 심기가 불편해진 얼굴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미술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카페 안쪽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던 미호를 강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때우러 들어온 윤영이 발견하고는 먼저 아는 척 했다. 윤영은 대화속에 은근히 강과 잘 되가고 있는지 하는 물음을 섞으며 강의 칭찬을 가득히 펼쳐놓았고, 강이 등장했을 무렵에는 미호는 서툴게 응수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있는 중이었다.
윤영의 은근한 놀림과 강의 툴툴거림 사이에서 적당한 말을 힘들게 찾아 꺼내놓던 미호앞으로 갑자기 그림자가 졌다.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한 남자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너무나 멀끔하게 잘 생겼고 피트니스로 키웠을법한 만들어진 몸매를 고가의 수트에 감싸고 있는 그는 존재감이 확실했으며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거기다 저 사람 좋아 보이는 입술의 멋진 굴곡이라니!
“은미호씨, 미호씨 맞군요?!”
“어....아!...안녕하세요?”
누군지 기억하기 위해 머뭇거리던 미호가 그를 생각해내고는 인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동시에 동석해있던 한 남자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고 또 다른 남자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노려보는 강의 표정은 말그대로 살벌하다.
“오랜만이네요. 갤러리에 좀 들르시나요?”
“네, 정혜 보러 가끔 가죠.”
너무나 반갑다는 듯 힘차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그는 미호의 과동기인 정혜의 사촌이었다. 정혜가 일하는 갤러리에서 우연찮게 마주쳐 이름만 소개하고 가벼운 목례만으로 인사했었던 기억을 간신히 끄집어냈다. 스쳐지나가면서 힐끗 본 것만으로도 알아보다니 대단한 기억력이다.
“저두 가는데...한번도 못 만나서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다음에 정혜랑 같이 제가 식사한번 대접하겠습니다.”
“아, 예...”
“그럼.”
미호와 동석한 두 남자를 힐끗거리던 그가 마찬가지로 자신 있는 걸음으로 사라지자 미호는 약간 의아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 번 인사만 나눴을 뿐인데 정혜의 사촌이 왜 이렇게 반갑게 아는 체 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 뒤를 돌아가는 그 남자를 의심가득하고 조금쯤은 살기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그, 그리고 윤영은 그런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자장가?”
“응, 정황증거가 맞아떨어지잖아. 아이를 잃은 무당, 여자가 부르는 자장가, 자장가가 들리고 발생하는 실종 사건......”
“거기가 어딘데?”
“청룡사에서 멀지 않아. 소류산 근처 어디라고 하더라고. 암튼 소름끼쳐, 자장가도 함부로 못 부르겠어, 그 동네 사람들은.”
윤영은 정말 소름끼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며 커피를 마셨고 강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미호는 그들의 대화를 무심히 흘려들었다. 그러나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없었던 그 일은 얼마 후 엄청나게 관련 있는 일이 되어 미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리게 된다..
10
홀림
자장자장 우리아기 잘도잔다 우리아기
꼬꼬닭아 울지마라 멍멍개야 짖지마라
잘도잔다 우리아기 새근새근 잘도잘다
나라에는 충신둥이 부모에겐 효자둥이
앞동산의 뻐꾸기야 뒷동산의 꾀꼬리야
우리아기 잠자는데 가만가만 노래해라
우리아기 예쁜아기 우리아기 착한아기
자장자장 잘자거라 소록소록 잘자거라
여진은 낮게 들리는 자장가소리에 잠을 깼다. 할머니가 불러주시는 노래인가 했지만, 자장가는 집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엄마인가 싶었지만, 엄마는 아까 서울 집으로 올라갔었다. 그럼 누구지...할머니는 저기 쌕쌕 소리를 내며 주무시고 있고 할아버지도 그 곁에서 드렁드렁 코를 고시며 잠들어 계시다. 아! 미호누나! 누나가 자장가를 불러줬었지. 누나가 왔나보다.
여진은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밤의 침묵을 깨우는 시끄러운 전화의 울림에 미호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귀청을 때리는 경은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송화리로 가는 차안에서 경은은 거의 실신할 지경이 되었다.
읍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여진의 친가는 조용한 마을 송화리 한 구석에 있었다. 여진은 한달에 한번정도 이곳 송화리 조부모님 댁에 내려와 있곤 했다.
경은을 맞는 여진의 조부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경은의 얼굴을 바로 보질 못했다. 몇 가구 안되는 송화리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여기 저기서 이 소란에 잠이 깬 마을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웅성거렸고 자기들끼리 신호를 하듯 연이어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냄새. 개들이 짖는 소리. 사람들의 웅성임. 그리고 미호의 귀가 잡아낸 것은 ‘실종사건이 여기서도...’라는 말, ‘자장가소리가 들려...’라는 말이었다. 미호의 눈이 산과 산 사이에 모습을 감춘 험악한 소류산을 찾아냈다. 그들의 웅성거림에 며칠 전 흘려들었던 윤영과 강의 대화가 섞여들었다. 소류산, 자장가, 무당, 아이들의 실종.
미호는 현관 앞에서 마을 밖으로 이어진 여진의 체취를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마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그리고 흔적이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한다. 미호의 피가 분노로 맹렬히 그리고 아주 차갑게 끓어오른다. 게다가 오늘은 보름밤이다. 밤을 지배할 힘이 최고조에 오르는 시간. 달빛에 반사된 한줄기 은빛 물체가 소류산을 향해 치달았다.
이미 사람이 아닌 저 불쌍한 여자의 얼굴은 마주대하기 곤란할 정도로 흉물스럽다. 뭉그러진 불분명한 얼굴. 조화를 무너뜨린 눈, 코, 입의 위치는 할 수 있는 최대의 불균형과 부조화를 보여주는 것 같다. 분명 저 여자의 영혼은 이미 그녀 자신에게는 없을 것이다. 검은 기운이 여자의 몸 전체를 뒤덮고 여자의 몸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납작하고 둥그러진 칼이 쭉 뻗어져 강의 왼쪽 어깨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삼색의 술이 칼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요동을 쳤다. 다시 무혼이 칼을 받아내고 밀어냈다. 무혼의 힘에 의해 밀려난 여자의 몸은 당집 앞 한쪽 구석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바로 몸을 바로잡는다. 도무지 지치질 않는 마귀(魔鬼). 거친 호흡을 내뱉던 강의 눈에 순간 아이의 실체가 들어왔다.
손바닥만큼 열려진 당집 문틈 사이로 보이는 아이의 얼굴이 스치듯 보였다. 납치되어온 아이는 신위(神位)가 올려진 탁자 아래에 뉘어져 있었고 잠이 든 것 같았다. 아이는 여진이었다.
“내 아이다.”
알아듣기 힘든 불분명한 울림이었다.
“내 아기야..내 아기...”
흐느낌 비슷한 소리. 명인의 뭉그러진 얼굴에 눈물같은 것이 번진다. 높이가 다른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
“쳇! 잘도 그런 거짓말을.”
짧은 비웃음에 이어 무혼이 빠른 속도로 명인에게로 향했다. 내게 동정심 따윈 없어. 빤히 보이는 거짓에는 더더욱. 단지 분노만 배가될 뿐이다. 거짓을 보였던 명인을 둘러쓴 마귀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지고 찌르렁 거리는 방울소리와 함께 삼색의 비단천이 길게 뻗어져 나왔다.
마을은 쥐죽은 듯 그 어떤 소리도 쏟아내질 않는다. 마을 전체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아니 어쩌면 누군가의 힘으로 온 마을이 의식을 잃은 것처럼 진한 적막 속에 있다. 사람소리도 개 짖는 소리도 벌레우는 소리마저도 이 곳에는 없었다.
흔적을 따라 거침없이 내달려가던 미호의 시야에 온통 회색빛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미호의 존재감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난히 부리부리한 눈과 하늘로 뻗쳐올라갈 듯한 드문드문 흰색인 눈썹과 꾹 다문 입 언저리. 그의 눈초리에 미호는 움찔거리며 멈춰섰다. 그들 사이에 일순 정적이 흐르고.
“또 어느 인간을 잡으려 이곳에 왔느냐?”
현각은 낮게 그렇지만 엄한 목소리로 미호를 나무라듯 말했다.
“그 사람, 이 곳에 있지요?”
미호는 산기슭 어딘가를 매서운 눈으로 응시했다. 미호의 귀에 엷은 방울의 울림이 들려온다. 그리고 현각이 미처 잡을 틈도 없이 미호는 다시 빠르게 전진해나갔다. 그의 존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당집 앞에 도달했을 때 강은 이미 없었다. 잠시 후 산 깊은 곳에서 신호처럼 연이어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진은 어디에? 미약하게나마 밝혀주던 촛불도 이미 꺼져버리고 스산한 바람마저 당집을 휘감아 돌았다. 미호는 제단 아래 뉘어져있는 여진을 발견하고 여진을 감싸 안아 여기저기 상한 데가 없는 지 살폈다. 다행이다. 검은 기운의 흔적은 보이질 않는다. 그제서야 잠에서 풀려난 여진이 눈을 부비적 거리며 깨어났다.
“누나? 누나구나..누나가 노래불러...”
“응..그래. 여진이 졸렵지?”
“이런 요망한 것. 이제 어린 아이를 탐하느냐?”
미호의 뒤를 쫓아 뒤늦게 도착한 현각이 여진을 안고있는 미호를 보고 호통을 친다. 당연한 오해겠지. 미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현각스님의 호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여진아, 여기 스님께서 할머니댁에 데려다 줄거야. 누나는 할 일이 있어서 여기 있어야 하거든. 엄마도 할머니댁에 있으니까, 스님 손 꼭 붙잡고 데려다주세요-해. 알았지?”
“응. 근데 누나는 왜 여깄어?”
여진의 물음에 미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리고 여진의 손을 잡아 현각에게로 이끌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송화리 조부모님댁에 데려다주세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낯선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에 현각은 당황스럽다. 엉겁결에 여진의 손을 잡았고, 어쩔 수 없이 아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내렸다.
“여진이구나. 송화리에 이 할아버지가 데려다 줄게.”
“네.”
“여진아, 스님, 업어주세요-해. 저는 아직 어려서 산길은 무서워요. 해봐? 응?”
미호의 짖꿎은 채근에 현각은 약간은 황당해하면서도 역시 큰 등을 여진에게로 향해 돌려앉았다.
그렇게 여진을 업은 현각이 뒷모습을 보이며 산길 속으로 사라지자 미호는 예민한 귀를 가동했다. 동물들의 으르렁거림이 점점 거세어 지고 있었다. 산의 깊은 어둠속으로 미호의 단호한 움직임이 빨려들 듯 그어졌다.
무참히 뜯긴 어깨에서 피가 솟아 흘러 손가락 끝을 타고 젖은 풀섶 위로 떨어졌다. 가뿐 숨을 내쉬는 강의 눈은 미호에게로 고정되었다. 물어뜯으며 달려들던 승냥이떼들도 그녀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소류산 정상 위로 휘영청한 보름달이 때맞춰 등장한 미호를 비추었다.
긴 머리가 월광에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촉촉하게 물기어린 눈동자가 한없는 그윽함으로 그를 응시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도자기 같은 흰 뺨에 손을 댄다면, 그 부드러움은 아기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동그랗고 도톰한 입술은 더 할 수 없이 붉다. 도나 카란의 수트를 입은 그녀의 자태는 고혹적이다. 받쳐입은 앞섶이 길게 파진 금빛 니트가 늘어져 둥근 가슴선을 드러내어 줬다. 지금 강은 여우에게 홀렸다. 아아, 정말 여우에게 홀린다는 것인가? 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미호는 강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심장을 원한다면 내어줄 수도 있다. 유혹적으로 천천히 교태 섞인 캣워크를 하는 그녀 주위로 승냥이떼들이 으르렁거리며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은빛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러나 한 마리의 들짐승 그대로였다. 길게 찢어진 눈의 한가운데가 고양이 눈처럼 바늘모양으로 가느다래졌다. 돋아난 날카로운 손톱이 승냥이떼를 훑고 지나갔다. 컥컥거리는 눌린 비명을 거칠게 내지르며 쓰러진 짐승들이 그녀 주위로 늘어나 쌓였다. 일말의 여지를 두지 않는 망설임 없는 움직임. 아이보리색의 수트위로 검은 피가 튀었다. 한 마리가 그녀의 어깨를 향해 달려들자 그보다 빠른 그녀의 손이 짐승의 목을 관통했다. 또 한 마리의 짐승이 이빨을 번득이며 미호의 목을 물려하자 그녀가 먼저 짐승의 목을 물었다. 마지막 승냥이 한 마리가 거품을 물고 혀를 축 늘어뜨린 채 땅위로 떨어졌고 그녀의 입가엔 짐승의 피가 묻어 있었다. 희게 빛나는 옷 위로 번진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그 피만큼이나 붉은 기운를 띠었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본 강은 섬뜩함을 느꼈다.
짐작하고 있던 일이고 머릿속으로 그려봤던 일이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경험하는 것과 상상하는 것과의 차이는 너무도 극명하다. 아무리 예상했었다하더라도 그 충격이 줄어드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구미호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선뜩한 기운이 강의 머릿속에 휘몰아친다. 그는 혼란의 한 가운데 있었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순간 그들은 적막 속에 있는 듯 했다. 고개를 들고 가벼운 한숨을 몰아쉬며 그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씁쓸한 눈물이 어른거렸다. 그러다 그녀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다래졌다.
한 곳에서 승냥이떼들을 조종하던 명인이 일어나 넋을 잃고 바라보는 강의 뒤로 달려들었다. 미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강이 마(魔)가 낀 흉한 얼굴의 명인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나 명인의 모습은 다시금 감춰졌다. 악에 받쳐서 휘두른 명인의 칼을 막아 선 것은 미호였다.
살을 가르는 날카로운 칼의 너무도 명확한 느낌. 그것은 미호로써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것이었다. 언제나 위험으로부터 최대한 몸을 피해왔던 그녀였었다.
강을 감싸안은 미호의 두 팔이 늘어졌다. 고통으로 팽창되었던 눈이 감기고 미호가 무너졌다. 다시금 칼을 휘두르는 명인의 몸을 본능으로 움직인 무혼이 관통했다. 한 순간 주었던 연민마저도 거두게 만들었다. 분노에 찬 강의 검이 서슴없이 명인을 휘몰아쳤다. 삼색의 비단천이 방울소리에 따라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강을 공격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곧 조각조각 내어져 산 기슭에 흩날려졌다. 방울이 땅에 떨어지고, 무혼을 감은 명인의 손에서 칼이 힘없이 떨어졌다. 피를 먹어 기세등등한 무혼이 명인 위로 그어졌다.
상황이 종료되고 뒤늦게 그들을 찾아내며 숨차게 달려온 현각스님이 발견한 것은 피에 절어 늘어진 미호를 안아든 강의 모습이었다.
11
순정
그를 밀쳐낸다거나 반대로 명인을 공격한다거나 하는 당연한 생각은 그 순간에 미호의 머릿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었나보다. 아니 어쩌면 만에 하나 그를 밀쳐내지 못해서, 혹은 명인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해서 그가 조금이라도 다치게 될 백만분의 일의 확률 쪽으로 몸이 움직였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미호는 그가 상처입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낮게 들썩이는 고르지 못한 숨소리. 엎드려 있는 몸을 고쳐주고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주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상의를 벗겨내는 강의 손길이 약하게 떨렸다. 상처가 그리 깊지 않다하지만, 감아 놓은 붕대에는 벌써 피가 축축히 배어 있다. 붕대를 가위로 신중히 잘라내고 제거해나가자 드러난 흰 등위에 오른쪽 어깨 아래에서부터 왼쪽 옆구리로 향한 긴 자상(刺傷)의 흔적이 선명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다행히 피는 멈추었다. 강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하얀 얼굴이 더 희고 창백하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찡그렸다. 침대가장자리에 앉았던 강이 문득 일어나 방을 나갔다 돌아온다. 그의 손에는 무혼이 잡혀져 있었다.
차릉-
검 집에서 반쯤 빠져나온 무혼이 소리를 질렀다. 다시 무혼을 집어넣고 엄지손가락을 자루중간 부분에 대고 힘을 주었다. 포박되어있던 홍주가 ‘툭’하고 떨어져 무혼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다. 힘을 잃었었던 붉은 기운이 선명해졌다.
강은 차갑게 불타오르는 그 구슬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려 미호의 조그맣게 벌어진 입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호의 입술을 훑었다. 입안에 걸린 채 그대로인 홍주를 쳐다만 보던 강이 손을 거두고 허리를 구부렸다.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고 그의 얼굴과 미호의 얼굴이 가장 가깝게 마주했다. 그리고, 그는 혀로 구슬을 더 안으로, 그녀의 입 안 가장 깊이까지 밀어 넣었다. 강은 본래의 목적은 잊고 잠시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지만, 그렇지만, 그가 허리를 세우고 나서도, 미호는 여전히 잠이 든 채였다.
‘반칙이야, 미호. 당신도 나도 반칙이야.’
“넌!.....도대체가...제 정신인거냐?”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해서 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저런 타박을 들을 만큼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미호는 뾰루퉁해져서 입술을 비죽거렸다. 등을 보이고 앉은 그녀의 얼굴 표정이 보일리 없지만, 강은 미호가 삐쳐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 강은 붕대와 소독약을 옆에 가져다놓고 미호의 웃옷을 벗기려 손을 뻗었다.
“미안하군.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
상의를 벗기자 칭칭 감은 붕대에 싸인 등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조심조심 붕대를 풀자 그녀의 흰 등이 완전히 강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리게 하얗다. 등위의 상흔이 강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래서 침을 꿀꺽 삼켰다.
“빚을 졌다......고마워..”
그가 힘들게 꺼낸 말이다.
“빚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갚아. 꼭 갚아.”
“그래 꼭 갚을게.”
강은 신중하게 소독을 하고 깨끗한 붕대를 다시 감는다. 강의 손길이 지날 때마다 서늘하게 소름이 돋았던 미호의 살갗에 온기가 감돌았다.
“바보같아......”
시무룩한 소리에 마지막 반창고를 붙이던 강은 또 울컥할 것 같았다. 작은 등이 단단한 붕대에 감춰졌다. 드러난 마른 어깨에 강은 고개를 숙여 이마를 대었다. 무게감에 미호가 잠시 움찔거렸지만, 그는 그대로 눈을 감고,
“미안해. 너 때문에 심장이 한 참 내려앉았었어.”
그리고, 두 팔을 둘러 미호를 감싸 안았다. 등 뒤에서 온기가 가득 느껴졌다. 가까워진 그의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등을 타고 전해졌다. 따뜻해....따뜻해서 정말....눈물날 것 같잖아..
생각 같은 건, 이미 없었다.
서로에게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는 심장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
지금 이 순간,
여자와 남자 그대로 일뿐.
그의 서늘한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겨드랑이 아래로, 단단한 늑골의 옆선으로... 움푹 들어간 부드러운 허리에로...그리고 더 아래로 천천히 흐르듯 미끄러지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그녀의 감각이 인다. 무릎까지 내려갔던 손이 다시 옆선을 타고 올라온다.
그의 손가락 끝이 그 어떤 것보다 자극적이다.
그녀의 한 쪽 팔이 그의 목을 깊게 감싸며 끌어당긴다.
그리고 순간!
그의 귓가를 울리는, 벌어진 입술사이로 새어나온 그녀의 약한 흐느낌.
안는다는 것. 안긴다는 것. 맨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 태어났던 순간으로.
아아, 그들은 '안도'하고 있다. 그리고 아늑하다라고... 온기....너무나 그리웠던 온기가 온몸으로 밀려든다.
end of part II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오후.
늦은 점심을 먹던 미호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이제사 일어나 방을 나오는 강을 쳐다봤다.
제멋대로 뻗친 머리칼.
두 눈에서 잠을 쫓느라 부비적 거리는 손가락.
들어올린 손목에서 팔꿈치에 이르는 멋지게 분리되고 발달한 팔근육.
(보통은 팔꿈치에서 어깨사이가 더 눈에 띄게 마련인데)
미호 앞자리에 털썩하고 앉아서도 미어져 나오는 하품을 손등으로 누르는 강의 미간이 틀어져 올라가 팔(八)자가 되어버렸다.
뺨으로 흐르던 눈물을 훔치는 강의 모습은 어린 아이와 다를 바 없다. 미호는 그런 강의 모습에 주던 시선을 거둬버렸다. 그러나 그는 오래도록 미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미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도 역시 그의 눈은 미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오늘 오후엔 유난히 더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그 시선을 받은 미호의 두 뺨에 살짝 붉은 기운이 번졌다. 그녀는 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계속해서 미호를 바라봐 줄까? 언제까지고 그녀 앞에 이렇게 앉아 있어줄 수 있을까? 만약, 만약,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정말로 사람이 된다면 그는 그녀 곁에 머무를까, 아니면 그녀에게서 떠나버릴까?
그대로 붉은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는 강의 행동 하나 하나는 미호를 자극한다. 강이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미호는 혹시나 그가 그녀의 감정을 알아챘을까 라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나두 밥 줘-."
미호의 눈이 비죽 치켜 올라간다. 순간을 깨는 소리. 마치 얼음 땡 소리처럼, 정지되었던 시계를 다시 돌게 만들 듯. 미호는 한 순간 허탈함을 느꼈다. 바보, 뭘 기대한 거야.
"너 손 없냐? 니가 퍼 먹어."
멈추었던 젓가락질이 계속된다.
"귀찮아."
미호는 들은 듯 만 듯 밥먹기에 열중한다.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중인 미호를 멀뚱한 눈으로 보던 강이 던진 말이란...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켁. 켁.
목으로 넘어가던 밥알이 그대로 걸려버렸다.
"호오~ 밥 먹는구나? 무슨 반찬~?"
강은 리듬까지 타면서 계속 묻는다.
사레가 들어버린 미호의 눈에선 눈물이 찔끔거린다.
"흐음...개구리 반찬~~??"
서둘러 물을 마시는 미호를 보며 입술 양끝을 들어올리며 알겠다는 얼굴의 그는 어쩌면 '악랄'하기도 하다.
"살았니~? 죽었니~?"
"미치겠다, 정말!!"
약이 바짝 오른 미호와 그녀가 내려놓은 젓가락을 들어 이것저것 반찬을 집어먹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강이 만든 비 오는 오후의 풍경.
딩동~
인터폰 화면에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은 주저없이 그리고 당당하게-마치 주인인양- 현관문을 열어 젖친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환영의 미소까지 덤으로 얹어.
누나가 보고싶다고 졸라대던 여진을 데리고 와 미호의 빌라 현관문 앞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경은은 낯선 남자와 마주서자, 벨을 잘못 눌렀나 싶어 고개를 뒤로 돌려 빌라의 호수를 확인했다.
경은의 손을 잡은 채로 누이를 기다리던 여진은 까맣고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강을 보았다.
"여기, 은미호..."
경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 지금 샤워중인 것 같은데...들어오시죠."
만면에 웃음 가득.
경은은 의심에 찬 눈초리로 강을 훑어보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누구?"
경은이 물어야할 질문을 되려 강이 던졌다.
"난, 미호 이몬데,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어! 이모도 있었네? 그럼, 이모도 여우..??"
강의 되물음에 경은은 여진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 그를 쏘아보았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난, 여기 사는 사람. 암....난 그냥 사람이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여진의 물음에 대답하는 그에게 경은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고개를 높이 들어 강을 보던 여진은 신기하다는 듯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니까-, 뭐 하는 사람인데요?”
“아, 뭐, 이런 거 얘기하면 안되는데.....”
일급비밀을 얘기하는 것처럼 강은 자못 심각한 표정-여진이 보기에는, 그러나 경은이 보기에는 장난기 다분한-으로 여진의 한쪽 귀에 대고, 손으로 살짝 가리면서 속삭였다.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아저씨는 말이야, 귀신 잡으러 다녀.”
여진은 진지하고 신중하게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는지 강을 찬찬히 다시 살폈다. 경은은 기가 막혔다. 여진이 뭐라 말하려고 하자, 강은 손가락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침묵을 강조했다.
“쉿! 너만 알고 있으라니까, 비밀이야. 알았지? 아저씨랑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침묵의 약속을 강요하는 강과 그것에 동조하는 여진의 모습은 정말로 정말로 진지했다. 언제 나왔는지 젖은 머리인 채로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입술에 걸고 그들을 지켜보던 미호를 경은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꿍짝이 맞아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겠다고 부산스럽게 나간 두 남자, 강과 여진이 사라지자 경은과 미호는 그제서야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경은은 말없이 미호를 바라보기만 했다.
경은에게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위험하군...”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시는 경은은 허탈함을 느꼈다. 위험해. 목표 달성을 코 앞에 둔 구미호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사람이다. 그것도 마음을 줘버린 남자. 감정 때문에 이성이 흐려지고 냉정함을 잃는다. 인간이건 여우건 간에 사랑에 빠지면 균형을 잃고 중심을 잃고 판단이란 것은 저 멀리로 내던져버리고 바닷물에 휩쓸리듯 사랑에 모든 것을 맞춰버리는 부류의 여자가 있다. 인간의 감정을 알게 된 여우의 경우는 그 정도가 물론 더 심각하다. 미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무리 해도 그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미호를 힐끗거리던 경은은 혀를 찼다.
위험해...
방법이 없다.
결론도 없다.
경은은 다만 ‘인연’이란 것에 희망을 걸어볼 뿐이다.
굳이 배웅을 하겠다며 빌라 밖까지 따라나선 강이 떠나가는 차 뒤꽁무니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남들이 보면 강의 손님인 듯 보였을 그의 이모와 사촌동생을 보내고 들어서는 미호는 엉뚱한 강의 행동에 좀 어이없어했다.
“내가 아니라 네 이모구 네 사촌동생같다?”
갈증을 느끼는지 들어서자마자 부엌으로 직행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키던 강이 미호의 주문에 걸린 듯 동작을 멈추었다.
“.......”
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묵한다. 뭔가 잘못 말한 건가? 그러나 그는 다시 싱긋 웃는다.
“그래, 그렇지? 난 가족이구 친척이구 그런 거 없으니까....”
물을 다시 들이키는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미호의 반문은 또 의외여서, 왜냐면 보통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을 꺼낸다는 것에 대해 불편하니까, 강은 물을 마시며 눈동자만 그녀에게로 향한다. 꿀꺽 꿀꺽 천천히 생수병 하나를 다 비우고 나서 강은 미호에게로 돌아선다.
“절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거기에 버렸다는군, 아기 때.”
무심한 어조. 무심한 눈동자.
“그래서 부모님은 안 찾아봤어?”
당연한 의문, 당연한 질문인데 역시나 보통은 잘 묻지 않는다.
“없어. 난 부모가 없어요.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니까. 크크.”
큭큭거리며 농담을 던지고 냉장고 문을 열어 뭔가를 뒤적거리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쓸쓸해. 이상해. 미호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어쨌든 이상한 일. 구미호인 그녀에겐 가족이 있는데, 강에게는 누구하나 없다. 미호의 마음이 찌릿거린다. 그는 정말 하늘에서 떨어졌나??
8
휴가
올림픽 대로를 달리고 있는 차들은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많지 않다. 가로등 불빛이 빠른 속 도로 휙휙- 지나쳐간다. 보라색...초록색...붉은 색...노란 색...파란 색....형형색색의 조명을 쏘아 놓은 아름다운 다리들이 그들이 탄 차 뒤로 차례차례 물러나 앉는다. 강 저편에 점점이 빛나는 서울의 밤 풍경은 그대로 그림이다. 곡선을 따라 흐르는 한강이 서울의 빛을 받아 한들한들 반짝거린다.
미호는 서울 강변의 야경에 감탄하고 있다.
강은 감동중인 그녀 곁에서 속으로 웃음을 감추며 운전하고 있다.
차 안엔 조용하게 음악이 퍼지고 있다.
그도 그녀도..... 오랜만의 여유, 편안한 상대.
그리고 처음 느끼는 두근거림 또 설레임.
"거봐 오길 잘했지?"
커피를 건내며 그가 싱긋거렸다.
"응... 좋네...오늘..."
그녀 역시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강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잘한 선택이다.
모처럼의 휴가임에도 집안에만 있던 미호를 타박하던 강이 무슨 생각인지 밤 10시가 넘어 들어와서는 차 키를 들고, 나가자며 미호를 밖으로 잡아끌었다. 망설여하는 그녀를 조수석에 밀어 넣고 강은 싱글거리는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빌라 단지를 빠져나갔다.
서울을 빠져 나와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택해 가던 그들은 두 세 시간쯤 달린 후, 국도변
작은 휴게소에 잠시 차를 세웠다. 아무래도 늦은 시간이라 휴게소에 사람도 차도 많지 않았
다.
먼저 내렸던 그를 기다리다 차에서 내려선 미호는 약간의 한기를 느끼고 손으로 두 팔을 가
볍게 문질렀다. 여름이라도 산에 가까워져서인지 기온은 내려간 듯 싶었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더욱 차게 느껴졌다.
휴게소 매점에서 두 손에 커피를 한 잔씩 나눠 들고 오는 그가 보였다. 휴게소의 불빛을 등지고 그가 그녀에게로 걸어오고 있다. 한 발자국....또 한 발자국.... 그의 모습이 점점 커져온다. 어느 새 그녀 앞에 선 그는 그녀 마음에서 그만큼 커다랗게 자라 있었다.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처음 그 만남 후로 그녀 안에 짙게 뿌려졌던 그는 이제 화선지를 모두 적시듯 그렇게 온통 그녀 마음을 물들이고 있었다.
씨익하는 미소와 함께 커피를 건네는 그의 따뜻한 손과 그녀의 손이 스쳤다. 미호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잔의 온기가 손을 지나 팔을 타고 마음에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마주 웃는 그들 머리 위로 짙은 구름 뒤에 숨었던 달이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 사라져갔다.
미명이 밝아오는 새벽.
그러나 해는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분무기로 뿜어대는 물처럼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바닷물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다.
하늘과 바다의 불분명한 경계
푸르게 넘실거리며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바다가 부서지며 내는 소리만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젖은 모래가 버석거리며 발 밑에서 무너져간다. 위태롭게 모래 위를 걷던 미호가 허리를 숙여 샌들을 벗어 든다. 발가락을 죄어오던 것으로부터 벗어나자 순간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서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모래가 움직여 들어와 마르고 지친 그녀의 두 발을 조금씩 조금씩 모래알 속에 숨겨준다. 신기한 듯 움직이는 미호의 긴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어깨 아래로 커튼처럼 흘러 떨어졌다. 그녀의 하는 양을 보던 강의 꽂힐 듯한 시선에 언뜻 다정함이 묻어난다.
방심했다. 그래, 그는 방심하고 있었다. 사람에게 정을 주지 말자는 그의 신념이 무너졌다.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언제고 갈 목숨,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험천만한 생을 살고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그가 상처입고 힘들어해도 아파할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죽더라도 그를 아쉬워하거나 그리워할 누군가를 만들지 않는 것, 그 자신이 외롭다할지라도 그를 위해 울어줄 사람을 남겨두지 않는 것이 그가 해야할 선택이었고 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적당한 만큼의 교분을 쌓는 것이 그에게 배분된 생이라고 여겼다. 어차피 혼자 가는 인생이라고 결론지었었다.
그런데, 이 여자, 미호에게 그는 방심했었나보다. 어쩌면 그보다 무방비상태였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고 서서히 익숙해지고 이제는 어느 한 부분,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지치고 외로워 그녀에게라도 위안을 얻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녀, 미호는 이제 강에게 위안과 위로를 주는 존재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강에게 안식이 허락된 단 하나의 존재.
강은 공기를 감싸안는 것처럼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하늘로 향해 눈을 감으며 내리는 비를 느낀다. 어렴풋이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옅게 뿌려지는 비가 어느 샌가 그의 흰 셔츠를 흠뻑 적셨다. 바람과 함께 머리 속 가득히 청량함이 밀려들었다.
“고마워. 늦게라도 바다에 다 와보고... 정말 새벽 바다는 좋은 거구나.”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든 미호가 감동한 얼굴이 되어 감사의 인사를 건네자 강은 왠지 머쓱해졌다.
“아아-, 아니 뭘, 나도 고맙지.. 심심하지 않게 와서.”
자랑스럽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 잰 채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에 미호는 웃어버렸다.
“쿡쿡. 고백하는데...나 정말이지,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여유롭게 어딘가로 휴가를 떠난 적 없었거든. 난 정말 사는데 바빴거든.”
“마찬가지.”
되돌아 온 것은 한 마디의 동의, 한 모금의 미소.
그리고 그는 발을 옮기다 휘청거리는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그녀를 향해 뻗어지는 다정한 손. 한동안 말없이 강의 내민 손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한쪽 손에 샌들을 그러쥐고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는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녀의 손가락이 얽혀든다. 어색하게 쥐어진 그녀의 손을 강이 가만히 힘주어 잡았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 늦여름을 막 지난 낙산 해변 한 켠 습윤한 공기 속에 손을 잡고 느린 걸음을 옮기는 그들이 그림처럼 채우며 있었다.
end of the part I
part II
9
자장가
자장자장 우리아가
자장자장 잘도잔다
......
한 여자가 당집 앞에 주저앉아 자장가를 부르며 울고 있다. 포대기를 등에서부터 허리로 감고 있는 여자는 정말 슬피 슬피 울며 노래를 부른다. 머리는 산발. 지저분한 얼굴엔 눈물 마른 자국과 흐르는 자국이 여럿 겹쳐져있고, 사람의 발길조차 뜸한 그 곳을 지나는 동네 사람들 몇은 혀를 끌끌 차며 안됐다는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고 간다. 해도 뉘엿뉘엿 모습을 감추고 발걸음이 끊겨도 자장가는 멈추질 않는다. 아이를 잃은 젊은 무당 명인은 당집 고목나무 아래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몸을 서서히 감싸는 것도 모른 채 구슬픈 자장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고 있다.
“형이 더 좋아? 누나가 더 좋아? 엉???”
아이스크림 콘를 한손에 쥐고 놀리듯 흔들면서 다른 한손으로 흘러내리는 크림을 낼름낼름 핥아먹는 그는 지금 여진을 약올리고 있다. 게다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니!
첫 만남 이후로, 서로가 마음에 든 두 남자는 지금은 꽤 친해져서(아무리 봐도 강의 정신연령은 여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고 강의 강요에 힘입어 ‘아저씨’였던 호칭은 ‘형’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강은 모르는 채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핥기에 열중한다. 큰 키의 그를 올려다보느라 고개를 뒤로 한참 젖힌 여진은 정말 간절한 얼굴로 강의 손에 쥐어진 아이스크림을 넋을 잃을 것처럼 보고 있다. 이것은 영락없이 또래 아이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을 강요하다니. 형을 선택하면 분명 아이스크림을 얻게 되겠지만, 그러면 자신의 핏줄인 누나를 볼 낯이 없을 것이고-비록 아이라지만!-, 누나를 선택하자면 여진이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 여진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머뭇거리기만 하던 여진이 쓰윽 뒤를 돌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미호를 본다. 분명 미안한 얼굴이다. 아아-, 이런 미호는 아이스크림만도 못하단 말인가?!
“엉?! 누구야? 누구?”
못됐다. 저 인간은!
“.....혀-엉.....”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형’이라고 선택한 여진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강은 흐뭇한 얼굴이 되어 콘을 여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나, 여진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는다. 웬일??
조금 전 울 것 같았던 얼굴은 이제 한계수위에 도달해 있었다. 곧이어 터져버린 울음.
“우왕-, 앙- 앙--나는 누나도 좋아-. 엉- 엉-”
미안한 마음에 먹지도 못하고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음을 터뜨린 여진. 소파 한 쪽에서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미호가 얼른 여진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래, 여진이는 누나를 좋아해, 누나도 알아, 누나도 여진이 사랑해!”
“앙- 앙-”
“괜찮아, 여진아. 형이 장난치느라 그런거야. 여진아, 아이스크림 녹는다. 얼른 먹어!”
“엉-, 정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 듯, 여진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아이스크림을 핥작이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똑같은 포즈로 핥작이고 있는 강의 수준이 정말 의심스럽다.
미호는 티슈를 뽑아 여진의 얼굴을 닦아준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
그런데, 콘을 과자까지 꼭꼭 다 먹고 난 여진은 영악하기도 하지. 뿌루퉁한 얼굴이 되어 하는 말인즉슨,
“형아! 세상에서 제일 미워!”
귀여운 복수를 하고는 쪼르르 미호의 방으로 도망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간 강은 그대로 여진의 뒤를 쫓아 들어간다. 꺄르르-, 여진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숨박꼭질을 하며 이 방 저 방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둘 때문에 미호는 오늘도 온전히 독서에 집중할 수가 없다.
자장 자장 우리 여진이
자장 자장 잘도 잔다
자장...자장...
한참을 놀던 여진은 어린아이답게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잠이 들었고 자장가를 부르며 여진의 배를 토닥여주던 미호도 나른한 졸음을 느낀다. 거실바닥에 펴놓은 담요 위에서 세상모르고 잠이 든 여진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평화.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자장가를 읊조렸던 미호의 손이 잦아 들었다. 여진을 사이에 두고 곁에서 오래된 책을 읽고 있던 강이 잠든 여진과 졸리운 미호를 힐끗거렸다.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던 미호는 잠이 확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뭐냐고, 그렇게 쳐다보면 어쩌란 말이야. 그런 다정한 눈빛이라니...
“너, 꼭 엄마같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책으로 다시 눈을 돌리는 강과 그의 말에 얼굴을 살짝 붉히고 마는 미호였다.
“우리 아들, 아주 꿈나라에 빠지셨네! 으이구, 내 새끼.”
경은이 잠이 든 여진을 투닥거려 깨운다. 잘만큼 잔 듯 잠투성 없이 깨어난 여진이 눈을 부비적거리고 여진의 부드럽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남녀의 손이 목표에 닿기도 전에 충돌한다. 멈칫, 한다기 보다 더한 정전기가 일 듯 깜짝 놀라 움찔거리는 강과 미호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 빠른 경은은 잡아채고 말았다. 손이 부딪치고 그 충돌에 놀란 얼굴이, 눈이 마주쳤다. 호오, 이것 봐라, 스파크가 이제야 이는 건가? 경은은 모르는 척 알만한 웃음을 입에 걸고는 여진을 데리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맑은 밤하늘에 불러가는 달이 환하게 떠있었다.
경은과 여진을 배웅하고 들어서던 강과 미호는 현관문 앞에서 마주보고 몸을 뒤로 트는 바람에 다시 충돌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서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느라 둘 사이의 간격이란 좁은 현관에서 아주 작을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충돌이 많은 날이 있다. 그것이 달의 인력 탓인지 남녀사이에 작용하는 어떤 법칙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지난 휴가 이후로 둘 사이 부딪침은 예전보다 잦아졌고 더해서 서로를 의식하게 되는 빈도수도 또한 높아졌다. 서로 실 끝을 잡고 당기는 것처럼 둘 사이의 기류는 이상한 긴장감으로 점점 팽팽해져 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자장가 소리가 들리고 나면 아이가 없어진다는 거야.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전부 동네 무당인 여자를 의심하고 있나봐. 그 무당이 얼마 전에 아이를 잃었나봐. 그 이후에 그 여자가 반쯤은 미쳐서 당집 앞에서 허구헌날 자장가를 불렀대. 첨에는 사람들도 불쌍하다 여겼는데, 아이들이 자꾸 없어지니까, 아무래도.... ”
윤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댄다. 그는 발굴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나가는 말처럼 전하고 있었다.
발굴관계로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온 윤영과 강, 어쩌다 보니 같이 하게 된 미호가 슬슬 찬기운이 돌기 시작한 야외 카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백교수님이 부탁한 고문 해석일로 학교를 찾았던 강이 윤영의 전화를 받고 카페에 도착해보니 미호가 윤영과 즐거운 듯이 얘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보다 먼저 윤영이 그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어주었다.
“둘이 어떻게 된거야? 데이트라도 하는 거야?”
털썩 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나머지 빈 좌석에 던져놓는다.
“데이트라니..무슨..”
“데이트라면 데이트죠. 둘만 있으면...쿡쿡...왜 질투하냐?”
미호가 과장된 액션으로 부정을 하는 반면, 윤영은 짖궂은 발언으로 강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대화는 서버가 날라온 물잔과 메뉴판으로 인해 끊겨 버렸다.
“여기 안쪽 서점에서 발견했지. 방해한 건 아니죠? 미호씨.”
“아니에요. 그렇잖아도 커피 한 잔 마셨으면 했는걸요. 호호-”
뭐야, 저 여자 뭘 그렇게 웃는 거야. 참, 사근사근하게도 구는군. 몇 마디 말을 연이어 주고받는-즉, 강은 안중에도 없이- 둘의 대화를 경청(?)하는 강은 적잖이 심기가 불편해진 얼굴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미술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카페 안쪽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던 미호를 강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때우러 들어온 윤영이 발견하고는 먼저 아는 척 했다. 윤영은 대화속에 은근히 강과 잘 되가고 있는지 하는 물음을 섞으며 강의 칭찬을 가득히 펼쳐놓았고, 강이 등장했을 무렵에는 미호는 서툴게 응수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있는 중이었다.
윤영의 은근한 놀림과 강의 툴툴거림 사이에서 적당한 말을 힘들게 찾아 꺼내놓던 미호앞으로 갑자기 그림자가 졌다.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한 남자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너무나 멀끔하게 잘 생겼고 피트니스로 키웠을법한 만들어진 몸매를 고가의 수트에 감싸고 있는 그는 존재감이 확실했으며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거기다 저 사람 좋아 보이는 입술의 멋진 굴곡이라니!
“은미호씨, 미호씨 맞군요?!”
“어....아!...안녕하세요?”
누군지 기억하기 위해 머뭇거리던 미호가 그를 생각해내고는 인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동시에 동석해있던 한 남자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고 또 다른 남자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노려보는 강의 표정은 말그대로 살벌하다.
“오랜만이네요. 갤러리에 좀 들르시나요?”
“네, 정혜 보러 가끔 가죠.”
너무나 반갑다는 듯 힘차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그는 미호의 과동기인 정혜의 사촌이었다. 정혜가 일하는 갤러리에서 우연찮게 마주쳐 이름만 소개하고 가벼운 목례만으로 인사했었던 기억을 간신히 끄집어냈다. 스쳐지나가면서 힐끗 본 것만으로도 알아보다니 대단한 기억력이다.
“저두 가는데...한번도 못 만나서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다음에 정혜랑 같이 제가 식사한번 대접하겠습니다.”
“아, 예...”
“그럼.”
미호와 동석한 두 남자를 힐끗거리던 그가 마찬가지로 자신 있는 걸음으로 사라지자 미호는 약간 의아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 번 인사만 나눴을 뿐인데 정혜의 사촌이 왜 이렇게 반갑게 아는 체 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 뒤를 돌아가는 그 남자를 의심가득하고 조금쯤은 살기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그, 그리고 윤영은 그런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자장가?”
“응, 정황증거가 맞아떨어지잖아. 아이를 잃은 무당, 여자가 부르는 자장가, 자장가가 들리고 발생하는 실종 사건......”
“거기가 어딘데?”
“청룡사에서 멀지 않아. 소류산 근처 어디라고 하더라고. 암튼 소름끼쳐, 자장가도 함부로 못 부르겠어, 그 동네 사람들은.”
윤영은 정말 소름끼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며 커피를 마셨고 강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미호는 그들의 대화를 무심히 흘려들었다. 그러나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없었던 그 일은 얼마 후 엄청나게 관련 있는 일이 되어 미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리게 된다..
10
홀림
자장자장 우리아기 잘도잔다 우리아기
꼬꼬닭아 울지마라 멍멍개야 짖지마라
잘도잔다 우리아기 새근새근 잘도잘다
나라에는 충신둥이 부모에겐 효자둥이
앞동산의 뻐꾸기야 뒷동산의 꾀꼬리야
우리아기 잠자는데 가만가만 노래해라
우리아기 예쁜아기 우리아기 착한아기
자장자장 잘자거라 소록소록 잘자거라
여진은 낮게 들리는 자장가소리에 잠을 깼다. 할머니가 불러주시는 노래인가 했지만, 자장가는 집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엄마인가 싶었지만, 엄마는 아까 서울 집으로 올라갔었다. 그럼 누구지...할머니는 저기 쌕쌕 소리를 내며 주무시고 있고 할아버지도 그 곁에서 드렁드렁 코를 고시며 잠들어 계시다. 아! 미호누나! 누나가 자장가를 불러줬었지. 누나가 왔나보다.
여진은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밤의 침묵을 깨우는 시끄러운 전화의 울림에 미호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귀청을 때리는 경은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송화리로 가는 차안에서 경은은 거의 실신할 지경이 되었다.
읍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여진의 친가는 조용한 마을 송화리 한 구석에 있었다. 여진은 한달에 한번정도 이곳 송화리 조부모님 댁에 내려와 있곤 했다.
경은을 맞는 여진의 조부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경은의 얼굴을 바로 보질 못했다. 몇 가구 안되는 송화리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여기 저기서 이 소란에 잠이 깬 마을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웅성거렸고 자기들끼리 신호를 하듯 연이어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냄새. 개들이 짖는 소리. 사람들의 웅성임. 그리고 미호의 귀가 잡아낸 것은 ‘실종사건이 여기서도...’라는 말, ‘자장가소리가 들려...’라는 말이었다. 미호의 눈이 산과 산 사이에 모습을 감춘 험악한 소류산을 찾아냈다. 그들의 웅성거림에 며칠 전 흘려들었던 윤영과 강의 대화가 섞여들었다. 소류산, 자장가, 무당, 아이들의 실종.
미호는 현관 앞에서 마을 밖으로 이어진 여진의 체취를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마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그리고 흔적이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한다. 미호의 피가 분노로 맹렬히 그리고 아주 차갑게 끓어오른다. 게다가 오늘은 보름밤이다. 밤을 지배할 힘이 최고조에 오르는 시간. 달빛에 반사된 한줄기 은빛 물체가 소류산을 향해 치달았다.
이미 사람이 아닌 저 불쌍한 여자의 얼굴은 마주대하기 곤란할 정도로 흉물스럽다. 뭉그러진 불분명한 얼굴. 조화를 무너뜨린 눈, 코, 입의 위치는 할 수 있는 최대의 불균형과 부조화를 보여주는 것 같다. 분명 저 여자의 영혼은 이미 그녀 자신에게는 없을 것이다. 검은 기운이 여자의 몸 전체를 뒤덮고 여자의 몸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납작하고 둥그러진 칼이 쭉 뻗어져 강의 왼쪽 어깨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삼색의 술이 칼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요동을 쳤다. 다시 무혼이 칼을 받아내고 밀어냈다. 무혼의 힘에 의해 밀려난 여자의 몸은 당집 앞 한쪽 구석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바로 몸을 바로잡는다. 도무지 지치질 않는 마귀(魔鬼). 거친 호흡을 내뱉던 강의 눈에 순간 아이의 실체가 들어왔다.
손바닥만큼 열려진 당집 문틈 사이로 보이는 아이의 얼굴이 스치듯 보였다. 납치되어온 아이는 신위(神位)가 올려진 탁자 아래에 뉘어져 있었고 잠이 든 것 같았다. 아이는 여진이었다.
“내 아이다.”
알아듣기 힘든 불분명한 울림이었다.
“내 아기야..내 아기...”
흐느낌 비슷한 소리. 명인의 뭉그러진 얼굴에 눈물같은 것이 번진다. 높이가 다른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
“쳇! 잘도 그런 거짓말을.”
짧은 비웃음에 이어 무혼이 빠른 속도로 명인에게로 향했다. 내게 동정심 따윈 없어. 빤히 보이는 거짓에는 더더욱. 단지 분노만 배가될 뿐이다. 거짓을 보였던 명인을 둘러쓴 마귀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지고 찌르렁 거리는 방울소리와 함께 삼색의 비단천이 길게 뻗어져 나왔다.
마을은 쥐죽은 듯 그 어떤 소리도 쏟아내질 않는다. 마을 전체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아니 어쩌면 누군가의 힘으로 온 마을이 의식을 잃은 것처럼 진한 적막 속에 있다. 사람소리도 개 짖는 소리도 벌레우는 소리마저도 이 곳에는 없었다.
흔적을 따라 거침없이 내달려가던 미호의 시야에 온통 회색빛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미호의 존재감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난히 부리부리한 눈과 하늘로 뻗쳐올라갈 듯한 드문드문 흰색인 눈썹과 꾹 다문 입 언저리. 그의 눈초리에 미호는 움찔거리며 멈춰섰다. 그들 사이에 일순 정적이 흐르고.
“또 어느 인간을 잡으려 이곳에 왔느냐?”
현각은 낮게 그렇지만 엄한 목소리로 미호를 나무라듯 말했다.
“그 사람, 이 곳에 있지요?”
미호는 산기슭 어딘가를 매서운 눈으로 응시했다. 미호의 귀에 엷은 방울의 울림이 들려온다. 그리고 현각이 미처 잡을 틈도 없이 미호는 다시 빠르게 전진해나갔다. 그의 존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당집 앞에 도달했을 때 강은 이미 없었다. 잠시 후 산 깊은 곳에서 신호처럼 연이어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진은 어디에? 미약하게나마 밝혀주던 촛불도 이미 꺼져버리고 스산한 바람마저 당집을 휘감아 돌았다. 미호는 제단 아래 뉘어져있는 여진을 발견하고 여진을 감싸 안아 여기저기 상한 데가 없는 지 살폈다. 다행이다. 검은 기운의 흔적은 보이질 않는다. 그제서야 잠에서 풀려난 여진이 눈을 부비적 거리며 깨어났다.
“누나? 누나구나..누나가 노래불러...”
“응..그래. 여진이 졸렵지?”
“이런 요망한 것. 이제 어린 아이를 탐하느냐?”
미호의 뒤를 쫓아 뒤늦게 도착한 현각이 여진을 안고있는 미호를 보고 호통을 친다. 당연한 오해겠지. 미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현각스님의 호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여진아, 여기 스님께서 할머니댁에 데려다 줄거야. 누나는 할 일이 있어서 여기 있어야 하거든. 엄마도 할머니댁에 있으니까, 스님 손 꼭 붙잡고 데려다주세요-해. 알았지?”
“응. 근데 누나는 왜 여깄어?”
여진의 물음에 미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리고 여진의 손을 잡아 현각에게로 이끌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송화리 조부모님댁에 데려다주세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낯선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에 현각은 당황스럽다. 엉겁결에 여진의 손을 잡았고, 어쩔 수 없이 아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내렸다.
“여진이구나. 송화리에 이 할아버지가 데려다 줄게.”
“네.”
“여진아, 스님, 업어주세요-해. 저는 아직 어려서 산길은 무서워요. 해봐? 응?”
미호의 짖꿎은 채근에 현각은 약간은 황당해하면서도 역시 큰 등을 여진에게로 향해 돌려앉았다.
그렇게 여진을 업은 현각이 뒷모습을 보이며 산길 속으로 사라지자 미호는 예민한 귀를 가동했다. 동물들의 으르렁거림이 점점 거세어 지고 있었다. 산의 깊은 어둠속으로 미호의 단호한 움직임이 빨려들 듯 그어졌다.
무참히 뜯긴 어깨에서 피가 솟아 흘러 손가락 끝을 타고 젖은 풀섶 위로 떨어졌다. 가뿐 숨을 내쉬는 강의 눈은 미호에게로 고정되었다. 물어뜯으며 달려들던 승냥이떼들도 그녀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소류산 정상 위로 휘영청한 보름달이 때맞춰 등장한 미호를 비추었다.
긴 머리가 월광에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촉촉하게 물기어린 눈동자가 한없는 그윽함으로 그를 응시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도자기 같은 흰 뺨에 손을 댄다면, 그 부드러움은 아기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동그랗고 도톰한 입술은 더 할 수 없이 붉다. 도나 카란의 수트를 입은 그녀의 자태는 고혹적이다. 받쳐입은 앞섶이 길게 파진 금빛 니트가 늘어져 둥근 가슴선을 드러내어 줬다. 지금 강은 여우에게 홀렸다. 아아, 정말 여우에게 홀린다는 것인가? 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미호는 강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심장을 원한다면 내어줄 수도 있다. 유혹적으로 천천히 교태 섞인 캣워크를 하는 그녀 주위로 승냥이떼들이 으르렁거리며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은빛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러나 한 마리의 들짐승 그대로였다. 길게 찢어진 눈의 한가운데가 고양이 눈처럼 바늘모양으로 가느다래졌다. 돋아난 날카로운 손톱이 승냥이떼를 훑고 지나갔다. 컥컥거리는 눌린 비명을 거칠게 내지르며 쓰러진 짐승들이 그녀 주위로 늘어나 쌓였다. 일말의 여지를 두지 않는 망설임 없는 움직임. 아이보리색의 수트위로 검은 피가 튀었다. 한 마리가 그녀의 어깨를 향해 달려들자 그보다 빠른 그녀의 손이 짐승의 목을 관통했다. 또 한 마리의 짐승이 이빨을 번득이며 미호의 목을 물려하자 그녀가 먼저 짐승의 목을 물었다. 마지막 승냥이 한 마리가 거품을 물고 혀를 축 늘어뜨린 채 땅위로 떨어졌고 그녀의 입가엔 짐승의 피가 묻어 있었다. 희게 빛나는 옷 위로 번진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그 피만큼이나 붉은 기운를 띠었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본 강은 섬뜩함을 느꼈다.
짐작하고 있던 일이고 머릿속으로 그려봤던 일이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경험하는 것과 상상하는 것과의 차이는 너무도 극명하다. 아무리 예상했었다하더라도 그 충격이 줄어드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구미호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선뜩한 기운이 강의 머릿속에 휘몰아친다. 그는 혼란의 한 가운데 있었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순간 그들은 적막 속에 있는 듯 했다. 고개를 들고 가벼운 한숨을 몰아쉬며 그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씁쓸한 눈물이 어른거렸다. 그러다 그녀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다래졌다.
한 곳에서 승냥이떼들을 조종하던 명인이 일어나 넋을 잃고 바라보는 강의 뒤로 달려들었다. 미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강이 마(魔)가 낀 흉한 얼굴의 명인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나 명인의 모습은 다시금 감춰졌다. 악에 받쳐서 휘두른 명인의 칼을 막아 선 것은 미호였다.
살을 가르는 날카로운 칼의 너무도 명확한 느낌. 그것은 미호로써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것이었다. 언제나 위험으로부터 최대한 몸을 피해왔던 그녀였었다.
강을 감싸안은 미호의 두 팔이 늘어졌다. 고통으로 팽창되었던 눈이 감기고 미호가 무너졌다. 다시금 칼을 휘두르는 명인의 몸을 본능으로 움직인 무혼이 관통했다. 한 순간 주었던 연민마저도 거두게 만들었다. 분노에 찬 강의 검이 서슴없이 명인을 휘몰아쳤다. 삼색의 비단천이 방울소리에 따라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강을 공격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곧 조각조각 내어져 산 기슭에 흩날려졌다. 방울이 땅에 떨어지고, 무혼을 감은 명인의 손에서 칼이 힘없이 떨어졌다. 피를 먹어 기세등등한 무혼이 명인 위로 그어졌다.
상황이 종료되고 뒤늦게 그들을 찾아내며 숨차게 달려온 현각스님이 발견한 것은 피에 절어 늘어진 미호를 안아든 강의 모습이었다.
11
순정
그를 밀쳐낸다거나 반대로 명인을 공격한다거나 하는 당연한 생각은 그 순간에 미호의 머릿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었나보다. 아니 어쩌면 만에 하나 그를 밀쳐내지 못해서, 혹은 명인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해서 그가 조금이라도 다치게 될 백만분의 일의 확률 쪽으로 몸이 움직였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미호는 그가 상처입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낮게 들썩이는 고르지 못한 숨소리. 엎드려 있는 몸을 고쳐주고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주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상의를 벗겨내는 강의 손길이 약하게 떨렸다. 상처가 그리 깊지 않다하지만, 감아 놓은 붕대에는 벌써 피가 축축히 배어 있다. 붕대를 가위로 신중히 잘라내고 제거해나가자 드러난 흰 등위에 오른쪽 어깨 아래에서부터 왼쪽 옆구리로 향한 긴 자상(刺傷)의 흔적이 선명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다행히 피는 멈추었다. 강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하얀 얼굴이 더 희고 창백하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찡그렸다. 침대가장자리에 앉았던 강이 문득 일어나 방을 나갔다 돌아온다. 그의 손에는 무혼이 잡혀져 있었다.
차릉-
검 집에서 반쯤 빠져나온 무혼이 소리를 질렀다. 다시 무혼을 집어넣고 엄지손가락을 자루중간 부분에 대고 힘을 주었다. 포박되어있던 홍주가 ‘툭’하고 떨어져 무혼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다. 힘을 잃었었던 붉은 기운이 선명해졌다.
강은 차갑게 불타오르는 그 구슬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려 미호의 조그맣게 벌어진 입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호의 입술을 훑었다. 입안에 걸린 채 그대로인 홍주를 쳐다만 보던 강이 손을 거두고 허리를 구부렸다.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고 그의 얼굴과 미호의 얼굴이 가장 가깝게 마주했다. 그리고, 그는 혀로 구슬을 더 안으로, 그녀의 입 안 가장 깊이까지 밀어 넣었다. 강은 본래의 목적은 잊고 잠시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지만, 그렇지만, 그가 허리를 세우고 나서도, 미호는 여전히 잠이 든 채였다.
‘반칙이야, 미호. 당신도 나도 반칙이야.’
“넌!.....도대체가...제 정신인거냐?”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해서 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저런 타박을 들을 만큼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미호는 뾰루퉁해져서 입술을 비죽거렸다. 등을 보이고 앉은 그녀의 얼굴 표정이 보일리 없지만, 강은 미호가 삐쳐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 강은 붕대와 소독약을 옆에 가져다놓고 미호의 웃옷을 벗기려 손을 뻗었다.
“미안하군.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
상의를 벗기자 칭칭 감은 붕대에 싸인 등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조심조심 붕대를 풀자 그녀의 흰 등이 완전히 강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리게 하얗다. 등위의 상흔이 강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래서 침을 꿀꺽 삼켰다.
“빚을 졌다......고마워..”
그가 힘들게 꺼낸 말이다.
“빚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갚아. 꼭 갚아.”
“그래 꼭 갚을게.”
강은 신중하게 소독을 하고 깨끗한 붕대를 다시 감는다. 강의 손길이 지날 때마다 서늘하게 소름이 돋았던 미호의 살갗에 온기가 감돌았다.
“바보같아......”
시무룩한 소리에 마지막 반창고를 붙이던 강은 또 울컥할 것 같았다. 작은 등이 단단한 붕대에 감춰졌다. 드러난 마른 어깨에 강은 고개를 숙여 이마를 대었다. 무게감에 미호가 잠시 움찔거렸지만, 그는 그대로 눈을 감고,
“미안해. 너 때문에 심장이 한 참 내려앉았었어.”
그리고, 두 팔을 둘러 미호를 감싸 안았다. 등 뒤에서 온기가 가득 느껴졌다. 가까워진 그의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등을 타고 전해졌다. 따뜻해....따뜻해서 정말....눈물날 것 같잖아..
생각 같은 건, 이미 없었다.
서로에게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는 심장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
지금 이 순간,
여자와 남자 그대로 일뿐.
그의 서늘한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겨드랑이 아래로, 단단한 늑골의 옆선으로... 움푹 들어간 부드러운 허리에로...그리고 더 아래로 천천히 흐르듯 미끄러지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그녀의 감각이 인다. 무릎까지 내려갔던 손이 다시 옆선을 타고 올라온다.
그의 손가락 끝이 그 어떤 것보다 자극적이다.
그녀의 한 쪽 팔이 그의 목을 깊게 감싸며 끌어당긴다.
그리고 순간!
그의 귓가를 울리는, 벌어진 입술사이로 새어나온 그녀의 약한 흐느낌.
안는다는 것. 안긴다는 것. 맨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 태어났던 순간으로.
아아, 그들은 '안도'하고 있다. 그리고 아늑하다라고... 온기....너무나 그리웠던 온기가 온몸으로 밀려든다.
end of part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