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더워도 너무 더웠다. 20년만의 폭염이라던가. 너무 더워 길바닥의 아스팔트가 녹아버렸다는 이야기도 들렸 다. 하긴 이렇게 더워서야 아스팔트가 아니라 아스팔트 할아버지라도 녹아버리겠다고 해명은 중얼거리며 반팔
티셔츠의 팔부분을 접어 올렸다. 축축하게 베어난 땀 때문에 쉽사리 올라가지 않는 것을 억지로 걷어 올리는데 점심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예비종 소리가 들려왔다. 농구를 끝내고 나무 그늘에 앉아 쉬던 녀석들이 어슬렁거리며 일어선다. 그나마 나무그늘 아래에는 바람도 제법 불고 그늘도 시원한데 에어컨 하나 없이 달랑 선풍기 3대 돌아가는 교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음이다. 해명 또한 발검을 저절로 뒤쳐지는 걸 느낀다. 들어가기 싫어, 라고 생각된다.하지만 어슬렁 어슬렁 운동장과 학교 본관을 잇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순간 제낄까, 하는 강렬한 생각이 든 건 거의 계단 마지막 부분에서였다. 제낄까, 말까, 제낄까, 말까. 하지만 이미 제낄까, 할까 하는 생각이 시작된 후부터 승산은 제낀다쪽으로 기운 상태이다. 다만 스스로 낯부끄럽지 않은 정도의 시간을 챙기는 것이다. 그래, 제낀다. 일단 생각했으면 그 후에 전속력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해명은 그 새 시작종이 울리기라도 할까 봐 후문으로 재빠르게 움직인다. 이왕 튈 바에야 조용하고 안전한 게 최우선.
조금 빠르게 걸었을 뿐인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이 쫘악 흘러내린다. 찌는 듯한 공기가 온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죄다 막아놓은 듯 답답하다. 덥다 덥다 너무 덥다, 이 놈의 여름. 해명은 여름이 너무 싫다. 덥고 짜증나고, 짜증이 나다 못해 원망할 대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망마저 든다. 서늘한 가을에 태어난 해명에게 여름이고 겨울이고 모두 쥐약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좋아지지 않는다.
이 시간엔 집에 아무도 없을테지. 그럼 샤워를 하고 낮잠이나 자야겠다. 해명은 방학동안 자르지 않아 눈을 찌르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에잇, 이 놈의 머리 하고 혼자 투덜거린다. 여름이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오해명은 불특정 다수의 고등학생이 그렇듯- 더구나 아직 고3도 아니므로-적당히 수업시간에 졸고 점심시간을 좋아라 하고 야자 제끼기를 즐긴다. 미래는 아직 불투명. 무언가 결정하기엔 어린 나이라고 생각.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다. 성적은 그냥 괜찮은 편. 무언가 급히 좇을 일도 없이 하루 하루 희희낙락, 혹은 일희일비.

죽을 듯 더워도 인생, 굴러가고 있다.

길거리의 나무들마저 숨을 헉헉대는 듯 윤희와 희명은 기어이 길가의 나무 그늘에 교복을 입은 채 주저않고 만다. 남색 프레아 치마가 풀썩, 날린다. 바람이 가끔씩 지날 때는 온 몸의 땀이 전부 식는 느낌인데 바람이 지나고 나면 사우나 불가마 옆에 앉은 듯 몸이 후끈거린다. 윤희와 해명이는 서로의 체온조차 부담스러워 한 발짝 떨어져 않는다. 25. 26. 30. 요즘은 그 날 그 날 올해 최고로 더운 날이라고 경신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32도라는데. 그래, 어디까지 올라가나 보자. 윤희는 더위에 몸을 맡긴 채 될대로 되라 하는 식이다.
더울 땐 정말 뭐 어쩔 수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홀랑 벗고 맨 몸으로 서 있어도 더우니 할 말이 없는 거다, 더는. 차라리 찢어질 듯한 추위가 좋다. 두 겹이고 세 겹이고 껴입는 것은 할 수 있으니. 하지만 그런 쨍, 하게 추운 날에 외출만은 절대 사절이라고나 할까. 뭐 한 마리로 말하자면 윤희는 좋아하는 계절이 없다는 말.
"난 나중에 이렇게 더울 때는 시원한 곳에서, 그리고 코끝이 날아갈 정도로 추운 날에는 따뜻한 곳에서 일하는 직업을 찾을거야."
더위에 헉헉 거리던 희명이가 더위로 인한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나느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희명이 역시 더위를 심하게 탄다. 더울 때는 시원하고 추울 때는 따뜻한 곳?
"은행에서 돈 세면 되겠다."
"음, 그런가?"
희명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은행원? 에이, 그건 아니다. 넌 내가 계산기 들고서 뚱땅 뚱땅 계산을 하는 게 상상이 가니?"
"크크크."
윤희는 계산기를 들고 쩔쩔 맬 희명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 웃고 만다. 다혈질의 희명이 삐질새라 웃음을 줄여보지만 한 번 터진 웃음은 진정이 되지 않는다.
"하하하."
은희는 결국 커다랗게 웃고 만다. 토라지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19의 신윤희. 미래의, 아니 몇 년후의 꿈은 소설가. 불확실하지만 갖고 싶은, 하고 싶은 것들 존재. 수학보다는 문학을 과학보다는 영어, 가 더 좋은 확실한 문과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과선택. 무모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덕분에 수학과 물리에 치여 죽도록 고생중. 덩달아 함께 이과를 온 희명에게 죽도록 욕먹는 중. 지금의 꿈이 이루어질지 아닐지 아니 당장 몇 분 후에라도 바뀔지 아닐지 확실할 순 없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현재를 걷는 지금.

더위속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인생 흘러가고 있다.



사랑, 내 인생과 네 인생이 겹치는 순간.
그래서 가끔은 스침, 혹은 함께 영원.
스쳐가는 사랑을 잡고 싶을 때,
네 인생에 그 사람의 인생을 겹쳐라.







아주 짧죠?
제가 쓴 3초라는 초단편의 주인공들이 처음에 만난 이야긴데요.
짧지만 올리고 싶어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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