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연재소설
글 수 395
맙소사. 내가 정신이 나갔지.
현수는 속상함에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열심히 언덕길을 달렸다.
언덕이라고 해도 경사가 완만한 둔턱이지만
제법 그 길이가 길어 걷다보면 숨이 찬다.
하물며 달리고 있자니 아직 쌀쌀한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그 바람에 긴 생머리가
철썩 이마에 들러붙어 자주 눈앞을 가린다.
이놈의 머리를 자르던가 해야지!
씩씩거리며 머리카락을 떼어내는 현수에겐
차라리 머리를 묶으면 된다는 지극히 간단한 처방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첫 수업은 결석, 두 번째 수업은 지각이라는 찬란한 기록의 달성이 바로 눈앞에 있다.
아니, 이미 지나쳤다. 벌써 9시 15분. 강의실에 도착하면 20분…… 끝장이다.
내가 왜 어제 영화를 끝까지 봤을까, 하는 생각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잠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미쳤지. 뭐하러 그걸 다시 봤을까.
야, 권현수. 이 바보. 너 그거 열 번도 더 봤잖아.
열 번이 뭐야, 스무 번도 넘었겠다.
아아… 바보야, 너 비디오 테잎까지 가지고 있잖아!
마음 같아선 머리라도 쥐어박아 주고 싶지만 그럴 때가 아니다.
팔을 몸 앞뒤로 흔들어 조금이라도 더 속력내기에 도움을 줘야한다.
하나, 둘, 하나, 둘…… 열심히 팔을 흔들며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주머니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바빠 죽겠는데 누구야하며 핸드폰을 열었더니 액정에 뜬 이름은
어이없게도 ‘Hello, my Baby♡’다.
생전 처음 보는 이름이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애초에 이런 기괴한 이름 따위 저장 해 놓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군지는 굳이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여보세요.”
「 Hello, Baby. 수업 중이야? 」
이 어이없는 놈아. 수업 중이면 내가 어떻게 전화를 받어.
아니, 그 전에. 수업 중 인거 알면 왜 전화한거야.
하고 싶은 말이 굴뚝같지만 참았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로 가뜩이나 늦은 수업, 더 늦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너 레터링 그만 좀 바꿔. 바꾸려면 좀 멀쩡한 걸로나 하든가.
헬로우 마이 베이비가 뭐야. 그 옆에 하트표는 또 뭔데?
아침부터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 놔야 속이 시원해?”
헐떡거리며 쏘아붙이자
전화기 너머에서 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 너 왜 이렇게 헐떡거려? 」
“궁금해?”
의도한 건 아니지만 다다닥 한 번 쏘아붙였더니
가슴이 터질 정도로 숨이 가쁘다.
자연히 헐떡이는 소리가 더욱 커졌지만 현수는 굳이 숨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저 능구렁이 같은 놈, 한 번 놀려나 보자는 심산으로
그렇게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묻는다.
「 …너 지금 어디야. 」
“어디 일 거 같은데?”
「 까불지 말고 말해. 너 지금 어디야? 뭐해? 누구랑 있어? 」
현수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말했다.
“정말로 말해? 그냥 모르는 게 더 좋을텐데?”
「 야…… 너 지금 어디야. 」
목소리가 단숨에 저 바닥까지 떨어진다.
현수는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틀어막고 한참이나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하아, 하아 숨을 가다듬은 뒤 다시 전화기를 붙잡았다.
“지호야, 미안. 실은 나…… 어제 외박했어. 그리고 여기….”
「 야, 말하지 마. 」
무거운 목소리가 말을 가로막는다.
“아니, 들어 줘. 나 그냥 솔직하게 말 할래. 실은 여기,”
「 됐어. 말하지 마. 말 안 해도 알아. 그만해. 」
심각이 뚝뚝 흐르다 못해 철철 넘치는 목소리에
현수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콱 틀어막았다.
자식아…… 니가 알긴 뭘 알아?
“지호야, 여기.”
「 안다니까? 벚나무 언덕인거 다 알아. 」
잉?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며 눈을 크게 뜨기도 전에,
“어이구, 임마!”
누군가가 퍽, 아프지 않게 등을 친다.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를 틈도 안 주고
언제부터 따라붙었는지 자전거 위의 지호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찬다.
“지각 한 주제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 할 여유가 되냐?”
“으윽…… 너 언제부터 따라온 거야.”
핸드폰을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눈을 흘기는 현수에게
지호는 발랄하게 대답한다.
“따라 온 거 아냐. 올라오다 보니 뒤통수가 너랑 똑같이 생긴 애가 있길래
혹시나 하고 전화한 거야. 아니나다를까 헐떡거리며 전화 받길래 맞구나하고
속도를 맞춘 거지. 그럼 그렇지, 세상에 누가 또 그런 뒤통수를 가지고 있겠어?”
제기랄, 이 능구렁이 같은 놈. 한 번도 져 주는 꼴을 못 봐요.
헐떡거리며 걸음을 멈춘 현수가 뻐근하게 저려오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야, 하고 힘겹게 입을 열자
자전거의 브레이크를 잡은 지호가 응? 하며 몸을 기울여
현수의 얼굴 바로 앞으로 귀를 가져간다.
“태워줘.”
“어디까지?”
“나동.”
으음… 하고 미간을 좁힌 지호가 다시 묻는다.
“수업, 들어 갈 거냐?”
“그럼 가야지!”
“지금 벌써 이십분이 넘었는데?”
너랑 쓸데없는 말장난 하다가 그렇게 됐잖아! 라고 소리 칠 형편도 못 되는 게
먼저 시작한 건 지호도 아닌 자신이다. 스스로가 싫어지려는 시점에서
현수는 조용히 말했다.
“나 지난주에도 결석했어.”
“지난주는 어차피 전부 다 오리엔테이션이었어. 출석체크도 안 했으니까 걱정 마.
거기다 지난 금요일까지 수강 정정 기간이어서, 아마 교수들 출석부도 안 들고
다녔을거다.”
“그러니까 더더욱 가야지! 오늘이 실질적인 첫날 아냐.”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자전거의 뒷자리에 올라타자 지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자취를 하면 뭐 하나.
혼자서는 제시간에 일어나지를 못하는데.”
“시끄러워. 빨리 가.”
“그냥 우리 같이 살 걸 그랬나? 어차피 같이 살 거 몇 년 당긴다고
생각하면 되는 걸.”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현수는 지호의 등을 쿡, 하고 찔렀다.
“덜 깼냐? 제대로 깨워줘?”
“내가 너냐. 새벽같이 깨서 약수터에도 다녀온 몸이시다.”
그렇게 말하며 폐달을 밟자 오르막길, 거기다 두명을 태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는 아주 가볍게 앞으로 나간다.
MTB가 좋긴 좋구나.
지호의 등에 머리를 기댄 현수는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등이 넓어졌을까를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뭐야.”
라고 물으면 학생입니다! 라고 큰 소리로 대답해야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빈자리로 가서 앉자. 권현수 파이팅!!
-을 몇 번이나 속으로 외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 학생… 입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한 것 까지는 좋다 이거야.
그런데 이거… 뭐야. 빈자리가 너무 많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왜 아무도 없어요…?”
여전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교탁 바로 앞의 책상에 걸터앉아있던 남자가 탁 소리 나게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1학년인가?”
대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던지는 그 목소리가
끔찍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현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네.”
“작품 분석, 들어?”
“네…….”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피식, 입가를 들어올리더니,
“첫 시간은 결석, 두 번째는 지각. 참 어지간한 녀석이군.”
다시 책을 펼쳐들며 냉랭한 목소리로 내뱉는데 순간,
헉,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지독하다! 첫 시간에도 출석을 불렀단 말이야?
아니, 그런데 어떻게 내가 지난 시간에 결석 한 걸 알지?
설마 나 빼고 전원 출석이었나? 아우아우…
하긴 첫 시간, 그것도 1학년 1학기 개강 첫 시간에 결석하는 녀석이
나 말고 누가 있겠어. 맙소사, 난 완전히 찍혔어……
등등의 생각으로 금방이라도 꺾어질 듯한 모양새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현수는
남자의 다음 말에 번쩍, 저도 모르게 그 고개를 쳐들었다.
“나가.”
“네??”
어찌나 순식간에 쳐들었던지 으득, 하고 뭔가가 어긋나는 소리가 목에서 났다.
“악!!!”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삐긋한 목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남자는 이쪽으로 고개도 안 돌린다. 오히려,
“시끄러워. 나가서 떠들어.”
여전히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내뱉는데
너무 기가 찬 나머지 눈물이 날 뻔 했다.
아니, 아무리 첫 시간 결석, 두 번째 시간에 지각한 녀석이라도 그렇지.
그래도 지 학생인데 이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거야? 목이 부러졌을지도 모르는…
아니, 부러지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우드득하는 소리가 크게 났는데,
놀래서 달려와 주기는커녕, 뭐? 나가서 떠들어? 인간이 뭐가 이래?
너무 억울해서 목이 아픈 것도 잊고 현수는 소리 질렀다.
“수업 들을래요!”
남자는 여전히 현수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수업 없어.”
다시 기분이 상했다.
없기는 뭐가 없어. 단체로 OHP사용 가능한 교실로 VTR자료라도 보러 갔겠지.
치사한 인간. 아무리 학생이 밉기로, 세상에, 저런 말도 안 되는 뻥을 다 치냐?
니가 교수면 다야?
잔뜩 열이 오른 현수는 앞뒤 가릴 겨를도 없이 무작정 남자를 불렀다.
“교수님!!!!”
그러나 대꾸도 없이 남자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한번만 봐 주세요….”
저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그런데 기가 죽은 이유도 참 어이가 없는게,
'……맙소사, 뭐가 저렇게 잘 생겼대… 정말 교수 맞아?'
ㅡ정면으로 부딪힌 남자의 외모였다.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아직 서른도 안 돼 보이는 얼굴이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이 요 몇 년간 본 중에 가장 지적인 눈매다.
살짝 버선코가 되려다 말았지만 오히려 곧게 뻗은 콧대가
더욱 조각 같은 인상을 주고… 거기다 저 피부…… 남자 피부가 뭐가 저래……
아무리 봐도 교수보다는 연예인에 어울리는 얼굴이다.
혹시 우리 과 선배인가? 하지만 신입생 환영회라든가, 입학식이라든가…
저런 사람 못 봤는데… 복학생인가…… 그래, 다들 다른 강의실로
뭐라도 보러 갔겠지. 그리고 교수님이 저 선배를 여기 남겨 둔 거야.
지각생들이 오면 어디 어디 강의실로 가라, 하고 일러주라고… 그래, 분명히……
멋대로 펼쳐지던 현수의 상상의 나래는 그러나 다음 순간,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학생에 의해 박살이 나 버렸다.
“교수님. 과제 때문에 여쭤 볼 게 있어서 왔는데요,
혹시 이번 주부터……어라, 권현수.”
문 앞에 서 있던 현수를 발견하고 남학생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여기서 뭐해? 라는 표정이었지만 현수는 그런 표정 따위 눈에도 안 들어온다.
“교수…….”
“엉?”
“교수님…….”
현수의 중얼거림에 남학생이 멋대로 엉… 하고 대답한다.
맙소사.
현수는 멍하니 강의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자와 남학생의 대화는 이어진다.
“이번 주부터야. 오리엔테이션에 과제를 내 주지는 않아.”
“아, 다행이네요. 그것 때문에 애들이 지금 난리가 났어요.”
“다음 주 거나 제대로 내라고 해.”
네, 하며 꾸벅 인사한 남학생이 강의실 문을 닫고 나가려는 순간 남자가,
어이, 하고 그를 불렀다.
그리고,
“쟤도 데리고 나가. 가서, 이 수업 진행 방식에 대해 설명 해 줘.”
특유의 툭, 내뱉는 말투로 내던지고는 다시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
제목이 너무 야해서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