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강의 계획서는 다 읽어봤나?”

예에― 하며 열 댓명 남짓의 목소리가 대답한다. 그다지 밝은 톤은 아니다.
벌써 소문을 들었나하며 남자는 팔짱을 끼고 미소 지었다. 명백한 고소(苦笑)였다.

“어이, 너.”

교탁 바로 앞의 남학생이 눈을 크게 뜨고 저요? 하고 묻는다.

“그래, 너. 신입생 대학생활 안내서 가지고 왔어?”
“네.”
“82페이지 펴서 연극과 교과목 개요 위에서 세 번째, 읽어봐.”

허둥거리며 남학생이 두껍지 않은 책자를 펼치고 페이지를 찾는 동안
남자는 종이컵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작품분석 일. …괄호, Script Analysis. 괄호 닫고…….”

남학생의 낭독에 왁자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괄호 같은 건 읽지 마.”

남자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아, 예… 하며 남학생이 다시 자세를 바로한다.

“고대에서 현대, 번역극에서 창작극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분석케 함으로써
극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배양하여 연극의 기본을 습득케 함.
특히 희곡의 구조, 형태 및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 희곡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학습한다.”
“…… 라는 건 헛소리고.”

남자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 있는 학생에게 앉아, 하고 짧게 명령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내 강의에 대해서 소문 들은 사람.”

절반 정도가 손을 든다. 절반이 손을 들었단 얘기는
결국 전원이 알고 있다는 소리다.

“뭐, 다 알고 왔겠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말해주지.
나는 출석체크 같은 건 안 한다. 출석부도 안 들고 다녀.”

학생들이 와아, 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좋아? 라고 물은 뒤 남자는 계속 말한다.

“딱 깨놓고 얘기하마. 작년에 나는 한 시간도 강의를 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학생들과 함께 작품분석인지 뭔지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소리야.
대신 매주 과제를 내 줬지. 희곡 읽고 감상문 써 오기. 분량은 상관없다.
100장이든 한 줄이든 무조건 써 내기만 하면 돼. 중간, 기말고사 모두 과제로
대체한다. 너희들이 낸 감상문으로. 이게 1학기 내 수업 진행 방식이다.
질문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남자는 나직하게 웃는다.

“월요일 1교시. 그것도 연극과 유일무이의 1학점짜리 수업이 가지는
의의가 뭔지 아는 사람?”

몇몇이 입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무시한 채, 남자는 말을 잇는다.

“수업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소리야. 대신 강의 계획서나 그럴싸하게
꾸미고 학생들 잘 구슬려서 강의 평가점수나 잘 받으란 소리지. 매년 그런
강의가 하나씩은 꼭 있어. 재작년부터는 내가 그걸 맡았지. 자세한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고 너희들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건너뛰자.
결론부터 말하지. 이건 일종의 거래다. 나는 너희에게 월요일 1교시의 자유를
주고 출석 100%라는 확인도장을 주고, 또 전원 A+라는 성적을 준다.
알고들 있겠지만 수강인원 20명 미만의 강의는 절대평가야.
전원이 A+일수도 있고 F 일수도 있다. 나는 전자를 택했어.
너희도 그걸 원하리라고 믿는다. 내가 틀렸나?”

아닙니다! 하고 강의실에 들어온 이례 가장 큰 소리로 학생들이 대답한다.

“좋아. 그럼 나는 너희들에게 A+를 주마.
대신에, 너희들도 나에게 줘야 할 것이 있다. 어이, 너.”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여학생이 벌떡 일어난다.

“그게 뭐라고 생각하지?”

조그만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큰 눈을 깜박이던 여학생이 작은 소리로 대답한다.

“과제물이요?”

다시 왁자한 웃음이 강의실 전체에 퍼진다. 남자도 함께 웃었다. 그리고,

“그것도 맞긴 해. 그 옆에.”

네! 하며 훤칠한 키에 매우 준수한 외모의 남학생이 벌떡 일어선다.

“뭐지?”
“백점 만점의 강의평가 점수입니다!”

씩씩한 대답에 학생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여학생은 그제야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백점까진 필요 없지만… 적어도 학교에서 원하는 만큼은 나와야지. 안 그래?”
“그래요!!”

처음 강의실에 들어 올 때와는 달리 얼굴에 화색들이 만연하다.
어차피 소문을 듣고 신청을 했을 터. 혹시나 교수의 마음이 바뀌어서
올해는 제대로 된 수업을 하겠다고 달려들면 어쩌나 걱정들을 했나보다.
하긴, 제대로 뭔가를 배울 마음이 있는 녀석들은 애초에 신청을 안 했겠지.
여기 모인 녀석들은 그것보단 월요일 아침의 꿈같은 늦잠의 시간을 원하는
놈들 일 테고.

“대신 과제는 꼭 내라. ‘참 재미있었다.’ 한 줄만 적은 것도 좋으니 꼭 내.
E-메일로는 안 받는다. 일단은 나도 과제 철이랍시고 묶어 둘 종이가 필요
하거든. 그리고 가끔씩 울적 할 때 뒤적이면 제법 기분 전환에 도움도 되고
말이야.”

다시 학생들이 웃는다.

하긴, 웃을 만도 하지.
남자는 백점 만점을 시원스레 대답하던 남학생을 다시 불렀다.

“네가 반장이다. 매주 과제물을 걷어서 조교실로 가져다 놔. 화요일에 걷든,  수요일에 걷든 상관없어. 하지만 월요일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 내가 그걸
가져 갈 수 있게 해. 수업을 하거나 말거나 제 시간에 출근은 꼭 하니까.”

그게 학교 측의 최소한의 요구였다.

“그 전까지는 걷어두는 게 편하겠지?”
“알겠습니다. 금요일 오후까지 모두 걷어서 조교님께 드리겠습니다.”

남학생은 흔쾌히 대답한다. 대답 하나는 참 마음에 들게 하는 타입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럼 계약 성립인가?”

다시 네에! 하는 우렁찬 대답이 들린다.

“좋아. 과제 열심히 해라. 가끔 학교에서 봐도 아는 척은 하지 말자.”

왁자한 웃음을 뒤로하고 남자는 강의실을 나섰다.
무거운 문의 손잡이를 잡고 옆으로 돌리는 순간,

“안됐다…… 저렇게 잘 생겼는데.”

누군가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강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 아니 고요해진다.
나름대로 작게 말한다는 게 그만 온 강의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남자가 입을 연다.

“어이.”

네…? 하며 좀 전의 반밖에 안 되는 조그만 목소리가 대답한다.

“내가 잘 생겨서 불쌍하다는 거야?”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어쩔 줄 몰라하는 여학생을 향해 살짝 미소 짓는다.
순간 화악하고 얼굴을 붉어진 여학생이 난 몰라,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아니면, 불쌍할 정도로 잘 생겼다는 뜻인가?”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지더니 이어 네! 맞아요! 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연극과 특유의 넉살과 뻔치로 학생들이 단숨에 분위기를 바꾼다.

“교수님 짱 멋져요!!”
“피부가 장난이 아니에요!”
“완전 좋아요! 김진희 교수님 최고!”

마지막으로 소리친 남학생의 얼굴을 확인하고
남자, 즉, 진희는 잠깐 미간을 좁혔다.

“이런, 반장… 내가 남자 좋아하는 걸 알고나 그런 소릴 한거야?”

잠시 벙찐 얼굴로 진희를 쳐다보던 남학생이
맙소사, 하며 자신의 머리를 친다.

“저도 남자가 좋거든요, 교수님. 이런걸 보고 천생연분이라고 하나요?”

아예 책상을 두드려가며 깔깔거리는 여학생들을 보며 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넌 아직 어리니까 세상 경험 더 해봐.
그래도 내가 좋으면 그 때 다시 와. 천천히 얘기 해 보자구.”
“아니, 교수님! 전 지금도 충분히…….”

남학생이 능글거리며 대답한다.
정말로 저 얼굴로 남자를 좋아했으면
이 학교 여학생들이 얼마나 가슴을 쳤을까.

진희는 웃으며 ‘나중에 보자.’ 라고 대답 한 뒤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철컥, 문이 열리고 몸이 빠져나온다. 닫혔다.
순간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완벽한 방음시설로 강의실을 문을 닫자마자 긴 복도는 침묵이 장악한다.
뚜벅, 뚜벅. 엇박자의 발소리만이 무겁게 울린다.  

3월이라고 창밖의 풍경은 아직 겨울이다.
당연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2월이었으니까.

추운 것 보단 따뜻한 게 차라리 낫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벌써 나이가 들었나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하던 진희는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본다.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야.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오리엔테이션은 끝났다.
이제 다시는 볼 일 없는 열댓 개의 얼굴을 뒤로하고 진희는 천천히 복도를 걷는다. 그리고 느린 동작으로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 MP3플레이어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전원을 넣고 볼륨을 올린다.
그 동안에도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댓글 '6'

리체

2004.04.12 22:06:42

아, 이런 암묵적인 계약 하에 대학생활이 가능하다는 자체가..판타스틱합니다.
뭔가 굉장히 염세적일 듯한 이런 쿨한 선생이라니..제 이.상.형 이람다..^^;
좀 다루긴 어렵겠지만서도..ㅡㅡa

더피용

2004.04.15 12:22:32

새로운 소재로군요. 눈이 번쩍 뜨입니다.

편애

2004.04.23 23:29:02

이 남자 멋진데요, 왠지 덕지덕지 쓸쓸함, 이라고 온 몸에 써있을 것 같기되 한!

리체

2004.04.24 11:10:36

현수랑 너무 잘 어울릴 거 같아..;;
가르쳐준댔는데..현수가 엉뚱한 소릴 해서 파토낼 가능성이 많긴 하지만..궁시렁궁시렁..;;

cadfael

2004.05.24 17:36:30

으아..저도 이런 강의듣고싶어요;;(라지만 이미 졸업을;;쿨럭~)

이뿐이

2004.06.19 13:52:57

어느 학교인가요?
저 교수님 따라 가고싶어라..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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