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차에 타 둘만이 있게 되자 그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똑같은 영화를 보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 당신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엔 관심이 없고, 나는 당신이 고른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거든. 우리 둘 다 성인이잖아?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애초에 데이트라는 게 시간을 같이 보내는 거 아니었어?”

그가 악다문 잇새로 말했다.

“나와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면 집에 있어도 되는 거잖아!”

“난 「결혼 계약서」를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나중에 봤어도 되잖아. 어차피 몇 달 후면 텔레비전에서 해 줄 텐데.”
“그건 당신 영화도 마찬가지잖아. 볼 맘이 없다면 굳이 볼 필요 없었잖아? 나와 같이「결혼 계약서」를 볼 수도 있었어.”
“그깟 계집애 같은 영화 보다가 지루해서 죽으라고?”

짜증이 났다.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나와 계집애 같은 영화를 보기 싫은 건 괜찮고, 내가 당신과 마초 영화를 보기 싫은 건 안 괜찮아?”

“그러니까, 뭐든지 당신 맘대로만 해야 한다는 거야?”
“은근슬쩍 말 바꾸지 마. 난 혼자 영화 보는 거 아무 상관없어. 내가 당신보고「결혼 계약서」를 보자고 강요했어? 우리 둘 중에 자기 맘대로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야.” 

그가 이를 뽀드득 갈았다.


린다 하워드 저/송연수 역, 《죽어도 GO?! (원제:To Die For)》 p.342

 


출간작 소개란에 맛보기로도 올라와 있는 내용입니다만, 본문을 읽다가 바로 이 장면에 홀딱 넘어갔습니다. 제멋대로 구는 천방지축 여주인공에게 제가 사랑을 느낀 순간이었어요. 어찌나 재밌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홀딱 다 읽어버렸네요. 여주인공 블레어 맬러리의 1인칭으로 진행되는 스릴러물인데, 이전 린다 여사의 글과는 180도 전혀 다릅니다. 유쾌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힙니다.

칙릿(Chick-lit)이라고, 2,30대 여성을 타겟으로 해서 출간되는 장르가 있습니다. 브리짓존스의 일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쇼퍼홀릭 등이 그런 장르로 분류되는데, 여성의 사랑과 일, 혹은 삶에 대한 관점이 부각되는 면이 강해서, 장르 로맨스의 전형적인 패턴과는 좀 다릅니다. 

이 소설은 여주가 1인칭으로 나레이션하듯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글발덕분인지 그런 분위기를 풍기기는 합니다만, 칙릿은 아니구요. 린다 여사의 신들린 글발과 만난 이 캐릭터들은 또 하나의 서브 장르를 개척한 마냥 색다른 패턴을 선보입니다. 미스터리 플롯상으로도 대단히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완벽한 외모를 갖고도 모자라 똑똑한 체 하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여주 블레어는 다소 자의적이긴 하나 페미니스트(!)로서도 손색이 없고, 남성적인 매력을 사정없이 흩날리는 형사 와이어트는 어찌나 섹시하신지, 읽기만 해도 페로몬이 풀풀 풍겨나오는 남성적인 캐릭터입니다.

블레어와 와이어트, 이 두 주인공은 각각 서로의 영역을 한치도 양보하기 싫어하는 극과 극의 캐릭터인지라 성적 긴장감에서 시작된 갈등은 물론, 끌리는 과정부터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격 상으로도 들어맞는 구석조차 없고, 둘 다 고집이 엄청 세기 때문에 상대에게 호락호락 주도권을 내어줄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린다 하워드는 균형잡힌 노련한 로맨스 작가죠. 여주 1인칭을 선택한만큼 철저하게 여주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진행시켜나가는데도, 그다지 편파적이거나 불공정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뭐랄까, 그냥 남자가 여자에게 지고 사는 게 살기 편하지 않겠는가 싶은 기분이랄까. 읽는 사람이 여자라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말이에요.

여주의 심리 상태가 1인칭 시점에서 그대로 보여지기 때문에 내숭떠는 것마저 사랑스러워보입니다. 극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미스터리 플롯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시켜주면서 끝까지 즐거움을 선사하고, 중간중간을 이어주는 유머러스한 글발, 여주의 독특하고 재치있는 머릿속을 구경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가 됩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저 이기적인 남녀의 대화를 보세요. 와이어트는 블레어의 저 말발에 말려들어가서 저렇게 이를 갈고 내내 씨근덕거리기만 할 뿐입니다. 저 장면은 영화를 보러 가자고 동의하는 앞 부분부터 읽어야 재미가 있어요. 간지러운 로맨틱 코미디를 보기 싫다는 와이어트, 전형적인 폭력물을 혐오하는 블레어, 그럼에도 블레어는 영화보러 가자는 말에 흔쾌히 동의하며 자신이 표를 끊겠다고 하죠. 그리고 같이 영화 보러 간 매표소 앞에서 블레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각각 보고 싶은 영화를 한장씩 끊는 겁니다. 블레어는 천연덕스럽게도 자신이 보고 싶었던 영화를 재밌게 보고 나오지만, 와이어트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영화고 뭐고 제대로 봤을 리가 없지요.

무엇보다 여주는 남자를 골탕먹이려는 의도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저렇게 싸운다는 겁니다. 그게 여주인공의 매력이지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주어진 풍족한 조건을 거리낌없이 누릴 줄 알고,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며 가꾸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고 당당해보였거든요. 현실에서 저런 여주라면 굉장히 까다롭고 골치 아파 손을 내젓겠지만, 블레어는 그저 외모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영리하게 재단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여자일 뿐입니다. 제 생각에는 번역하시는데도 꽤나 고심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린다 하워드의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글발에 뒤쳐지지 않는 감각적인 번역이 군데군데 빛이 났기에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연작 시리즈로 블레어를 주인공으로 계속 쓰실 모양입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번역되어 나와줬으면 좋겠네요. 로맨스파크에서 출간되었으므로 읽으시려면 홈페이지에서 직접 구매해서 읽는 방법이 유일합니다.
  


댓글 '4'

phoenix

2006.12.15 00:08:50

번역본 제목에 허걱!!했습니다.
번역가가 누구인가요? 원서보다 훨 재밌어보이네요.
남주가 여주와 연락끊은 어처구니 없는 이유에 한동안 어처구니 없어했더랬죠. 범인의 정체도 그렇고..확실히 기존 하워드여사와는 많~~이 다른책이였죠.

노리코

2006.12.15 07:51:10

오, 최근 외서를 읽지 않았었는데, 참고합니다. ㅎㅎㅎ

파수꾼

2006.12.15 11:36:47

읽고 싶은 욕구가 샘솟구칩니다~~

이경화

2007.03.22 18:23:18

정말 재밌어요..
간만에 재밌게 봤습니다.
내가 알던 린다 아지매가 맞는건지 싶을정도로 글의 느낌이 화~악 바꼈습니다. 톡톡 튀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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