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라운지
- 리뷰

-《시효경찰 6화》, 키리야마의 대사 중에서
TV화면에서 한 여자가 울부짖는다. "시효 따위가 왜 있는 겁니까? 시효만 없다면 범인은 언제까지라도 불안에 떨며 살텐데요!" 키리야마는 이제껏 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맥없고 괴로운 목소리로 쥬몽지에게 충고한다. "범인 좀 제대로 체포해주세요! 그게 당신 일이잖아요. 제가 범인을 찾아내기 전에 제대로 좀 해달란 말입니다. 저는 이제 취미로 시효 수사 하는 건 정말 질렸다구요!"
시효가 지난 사건들을 수사하는데 취미를 붙인 시효관리과 경찰 키리야마 슈이치로(오다기리 죠)는 추리가 끝나면 범인에게 "아무에게도 절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카드를 건네는 것으로 취미 수사를 마무리 짓는다. 경찰이 15년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단 며칠만에 해결하는 키리야마의 명석함은 그저 취미에 그치는 엉뚱함만큼이나 참으로 별볼일 없는 취급만 받는다. 6화에 와서는 시효가 여섯 시간밖에 남지 않은 사건과 맞닥뜨리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키리야마가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에피소드는 키리야마가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중심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효가 지나도록 범인 검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찰에 대한 뼈있는 질책을 담고 있다. 뭐, 그래도 버릇이 어디 가나. 엉뚱하면서도 기발하고 시시한 잡담은 여전히 낄낄대게 만들지만, 그게 또 묘한 페이소스를 남긴다.
<시효경찰>은 시시함을 모토로 진지함을 넘어서는데에 그 독특한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서는 키리야마가 추리를 완성해가는 과정이 대단히 비약적일 때가 많다. 이건 키리야마가 추리를 엉터리로 해서도 아니고, 사건의 논리가 허술해서도 아니다. 즉, 15년간 풀지 못했던 사건을 추리하는 키리야마가 대단해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은 적당히 힘을 주면 깨지는 트릭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엉뚱한 개연성을 적당히 인정해주는 구성을 허용하는 법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리하는 그 자체의 진지함을 살짝 걷어내고, 전혀 상관없는 장면이나 대사가 슥삭 들어왔다가 사라져도 극의 진행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처럼 만화적이고 뜬금없는 상황들은, 보고 있을 때보다 보고 난 후에 훨씬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생각날 정도로 인상적이고 기발하기까지 하다. 3화까지 보고 잠시 쉬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시효경찰은 뒤로 갈수록 재밌어지는데, 아무래도 이건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엽기적인 패턴에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쓸모없고 쓸데없는 인물들과 대사들 자체가, 그리고 <시효경찰>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무능한 경찰을 온몸으로 풍자한다. 사건이 일어난지 15년동안 해결하지 못해 시효가 종료되는 사건들은 천장을 뚫고 올라갈 정도로 잔뜩 쌓아놓고 정리하지만(1화), 시효 관리과 사람들은 그 사실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키리야마가 취미로 사건들을 수사해보겠다는 의지에 호기심만 잠깐 보여줄 뿐이다. 경찰복을 입고서 경찰다운 일은 단 한번도 하지 않는 게 목적인 듯한 캐릭터로 가득한 시효 관리과 사람들은 하나같이 본인들이 경찰이라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인물들이며 그래서 더 우스꽝스럽고 엉뚱하기만 하다.
마타라이에게는 어디선가 혼인증명서를 주워와서 매번 슈이치로에게 이름을 쓰게 하는 괴이쩍은 취미가 있으며, 키리야마를 좋아하는 교통관리과 미카즈키(아소 쿠미코)에게는 혼인 증명서를 훔쳐 옆에 자신의 이름을 써놓고 즐거워하는 귀여운 취미가 있다. 쓸모없는 형사 쥬몽지는 그나마 맡겨진 사건을 키리야마의 한 마디로 범인을 잡고서도 자신의 추리로 잡은 것인양 폼만 잡기 바쁘고, 감식반 모로사와는 매번 엉뚱한 걸 사진으로 찍어와서 혼자 흥분하는 오타쿠적인 취미가 있으며, 관리과장으로 보이는 쿠로사와(이와마츠 료 : 시효경찰 각본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매번 신이 나서 키리야마가 취미로 풀 사건들을 골라주는 취미가 있다.
본인의 좋은 머리를 그저 시효 지난 사건을 추리하는데밖에 쓰지 않는 키리야마의 취미는 앞서 얘기한 취미들과 그저 비슷한 취급이나 받을 뿐인데, 이것은 아마도 시효 지난 사건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역설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쓸데없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랍시고 등장하는 자체가 무능하고 시시한 경찰에 대한 질책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는 거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15년이라는 공소 시효가 지난 사건은 범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결국 시효 지난 사건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경찰들에 대한 비판을 돌려서 하고 있는 것이 <시효경찰>에서 진짜 말하고 싶어하는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훈계하다가 도리어 도둑으로 몰린 키리야마가 미카즈키에게 전화를 걸어 "살려줘!"라고 애원하는 얼굴에 커다란 반창고 두개가 붙어 있었던 만화같은 장면이나, 키리야마가 열심히 추리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틈을 타서 미카즈키가 방 구석에 놓여 있던 타임머신을 타고 슬쩍 사라졌다가 돌아온다거나, 유원지에서 서로 전화로 대화하는 쥬몽지와 키리야마가 서로 근처에서 통화하면서도 절대 서로 부딪치지 않는 장면이라든가, 키리야마와 똑같은 얼굴의 변태가 활개를 치고 돌아다닌다든가, 칠판에 추리하는 내용을 받아적던 미카즈키가 갑자기 키리야마에 대한 연심을 칠판 가득 적어놓는다든지, 갑작스런 마타라이의 아마데우스 가발, 단서가 숨어 있는 노래를 부르는 키리야마의 등 뒤로 갑자기 남성4인조 중창단이 등장하는 기발한 장면 등등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장 웃겼던 장면 중 하나는 한참 얘기를 하고 있던 여류 피아니스트의 안경에 뜬금없이 김이 서리던 모습. 그것을 본 키리야마는 "거짓말을 하면 긴장해서 땀이 나기 때문에 김이 서리는 것이니, 그 여자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황당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리고 갑자기 키리야마는 안경을 쓰면서, "미카즈키는 잘 보면 이쁘더라"라고 수줍게 고백한다. 그 말에 좋아 입이 벌어진 미카즈키. 하지만 돌아선 키리야마의 안경에 하얗게 서린 김이 진실을 말해준다. 이 장면 보다가 너무 웃어서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오다기리 죠의 엉뚱하면서도 어눌한 표정 연기는 <시효경찰>을 재밌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 <메종 드 히미코>에서처럼 원초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을 발산할 수도 있고, <사토라레>처럼 자신의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유순한 캐릭터가 잘 맞는 것 같으면서도, <시효경찰>과 같은 특이한 코믹물에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내고서도 튀지 않고 캐릭터 자체로 느낌이 남아 있을 수 있는 배우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이 배우가 연기한 작품을 보고 나면 전혀 다른 배우가 연기했었나 싶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본인이 어디선가 인터뷰한 것처럼, 배우로서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연기와 분위기를 파악한다음, 자신을 그 안에 맞추면서 녹이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그런 독특한 느낌을 각각 다르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현실에서야 시효가 지난 사건의 유류품을 들고 온 이상한 녀석이 "취미로 수사하고 싶으니 협조 좀..."이라고 부탁하는 일도 없겠지만, 잊혀질만큼 오랜 세월에 기대 잊혀지기를 바라는 범인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숨어 살고 있을까 생각하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가볍고 시시함을 지향하는 드라마 마인드 덕분에 자유롭게 낄낄거리며 즐길 수 있었던 에피소드들이었지만, 정작 너무 무겁지 않아서 다행스러웠던 드라마였다면 너무 이기적인 감상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