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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넘치는 유머 감각이 보통 이상입니다. 톡톡 튀는 대사와 눈에 그려지는 재밌는 상황 설정들이 정신없이 쏟아지고, 다혈질이면서도 도발적인 채영의 작업 기술에 태진이 쉴새없이 흔들려대는 그 모습이 어찌나 재밌고 유쾌한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책 되겠습니다.

욕망에 솔직하고 개방적인 여자를 그려내는데 있어서 작가분의 탁월한 센스가 엿보입니다. 공식, 혹은 상식을 비껴난 캐릭터를 그릴 때 설득력의 관건은 작가의 균형잡힌 마인드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김랑님의 글에는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그 근저에서 균형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채영의 가족을 그려내신 부분들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여조 진선유의 캐릭터를 마무리하신 방법도 좋았습니다. 캐릭터의 자유분방함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면면히 느껴져서요.

유혹에 능한 채영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농염한 색기가 철철 넘쳐나지만, 온갖 도발적인 상상이 들어 있는 머릿속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결코 가볍거나 값싼 여자로 느껴지지 않도록 확실한 선을 긋고 있습니다. 이것은 채영이 직접 섹스를 했느냐 상상만 했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작가가 기본적으로 부여한 마인드 자체가 균형이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어떤 면으로는 채영이 놀고 싶어하는 서른 셋이 아니라 결혼을 무지 하고 싶어하는 서른 셋이며, 놀이 상대가 아닌 결혼 상대로 남자를 찍고 대시한다는 내용이 일조를 하기도 합니다만) 이를테면, '상식에서 벗어날 때는 최소한 이것만은 지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 정도의 표준을 만들어도 좋을만한 미덕이 돋보인달까요.

캐릭터가 주는 긴장감을 유쾌하게 요리해서 쥐락펴락 만드는 작가의 기술은 대단히 노련하고 재기발랄합니다. 의도하신 그대로 구성상의 갈등은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두 남녀 캐릭터의 노골적인 성적 긴장감은 은밀한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힘이 있기에 굳이 갈등을 따로 만들어줄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남이 가르쳐준 세상이 아닌 작가가 직접 느낀 삶을 보여줄 줄 아는 필력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제가 채영을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마음 먹은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카리스마, 또 서른 셋이라는 나이를 농염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솔직담백한 모습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남자야 어찌 되었든 여자가 이 정도로 솔직하면서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자체야말로 모든 여성들의 로망이 아닌가 싶네요. 보통 남자와 별 다를 바 없이 채영에게 휘둘리기만 했는데도 태진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은 능력있는 여자 채영이 대시할만한 가치를 느낀 남자였기 때문일 겁니다. 로맨스에서는 여자를 휘두르는 카리스마를 가진 남자만큼이나, 여자에게 휘둘리는 남자도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간혹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대화 중간에 불쑥 튀어나오던 남자의 '하오체' 말투, 걸러내지 않은 약간의 속어 정도였습니다. 대사가 아닌 지문에서 '대가리'라는 표현이 뒷쪽에서 몇번 나오는데 눈에 좀 거슬리던걸요. 대사가 아닌 지문에 속어가 등장할 때는 조금은 정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대가리'라는 표현보다는 '머리통' 정도로만 순화되어도 좋았을 듯. 전체적으로 밀고 당기는 맛이 있는 쫄깃한 대화와 문체로 내용을 긴박하고 흡인력 있게 이끌어가고 있지만, 어떤 부분은 너무 직설적이라 튀는 부분들은 솔직함을 넘어서 여주의 상식적인 교양을 살짝 의심하게 만드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식사 자리에서 '응아' 관련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때 저는 그냥 웃고 넘어갔어야 하는 걸까요) 캐릭터에 따라서 직설적인 말투도 허용되는 최대한의 범위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뭐, 코믹물이니까요. 긍정적인 유머 감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는 부분들이니 만약 이 책을 손에 드신 분이 계시다면 제 깐죽대는 딴지 따위는 흘려 들으시고 책 자체에만 집중하여 읽으셔도 아무 문제 없겠습니다. 특히 결혼하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서른 부근의 여자분들이라면 더 공감하면서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Max Raabe의 Sex Bomb이라는 노래가 계속 생각나더군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예고편에서 쓰인 음악인데, 코믹한 창법도 그렇고 가사도 그렇고, 영화보다는 이 책의 분위기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댓글 '1'

하늘이

2006.04.09 23:42:12

리체님께서 말씀하신 음악은 못들어봤지만 꼭 찾아서 들어봐야겠네요. 근데 이 글에 대한 평이 아무래도 여주인공 때문에 많이 엇갈리는 듯하더라구요. 사실 전작인 유혹의 속삭임도 로설 공식을 그대로 따른 전형물이었는데도 여주인공이 다른 로설과는 달랐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편이었거든요. 뭐랄까... 페이지를 빨리 넘기게 하는 작가님을 대라고 하면 아마도 그 중 한분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주인공들의 로맨스가 두근거리게 다가오지 않고, 가끔은 너무 사실적이거나 무뚝뚝해서 허무하게 느껴지는 부분들, 쉽게 지나치려한 부분들 때문에 전작에 대해 썩 만족스러운 느낌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음.... 리체님의 리뷰를 접하고 나니 꼭 읽어야겠군욤^^

-쓰다보니 길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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