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매력적인 글입니다. 작가가 쉴틈없이 조여대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어느새 두권을 훌쩍 다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의 빡빡하고 상세한 사료들이 문장과 단어마다 넘쳐나고, 작가가 상상한 글 속의 인물들은 펄떡대며 살아 움직입니다. 많은 등장 인물을 등장시키면서도 어느 인물에게도 소홀하지 않고 끝까지 얽히고 섥힌 감정을 설득력 있게 갈무리시킵니다. 작가의 필력은 춤을 추듯, 월장 하듯 이훤이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무수히 많은 시와 사색을 읊습니다.

아마도 두 주인공의 로맨스보다 사건과 서술이 더 많은 것은 이훤이라는 인물에 집중된 작가의 시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왕이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세세하게 그려내고, 왕의 지혜로움과 영특함을 설명하는 세밀한 솜씨는 이훤의 생동감을 그대로 그려냈습니다. 근래에 이리도 귀여운 남자를 본 적이 없기에 거의 침을 흘리면서 봤더랬지요. 장난꾸러기 왕인 이훤과 절세가인 허염 주변을 아우르는 약간의 야오이적인 코드는 적절하게 가미된 재미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어서 몇자 적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천지이므로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첫째, 중요한 사건의 반전들이 전부 서술로만 이루어져서 원하는 효과를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1권에서는 그토록 오매불망하며 월을 기다리던 훤이 액받이 무녀로서 월과 재회하고, 갑자기 염이 등장하면서 자신의 유일한 정비라는 연우에 대한 과거를 회상합니다. 저는 사실 월과 연우가 동일 인물이라는 점을 밝히기 전까지는 모르고 읽어갔기 때문에 '아니, 왜 갑자기 연우 얘기를 이렇게 오래 꺼내나' 싶었어요. 그러면서도 재밌었기 때문에 작가가 이끄는대로 쭉 끌려갔습니다.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건 그들이 기억을 공유하는 싯구를 외울 때에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상당히 놀랐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둥절 했습니다.

서로 다른 개체로 생각되던 인물이 한 인물이라고 설정해서 보여줄 때는 독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복선을 보여주고, 나중에 그 합을 도출해서 어떤 사건과 함께 팡, 하고 터뜨리는 게 대부분입니다. 절정에서 터뜨리든, 결말 부분까지 이끌고 가서 독자들 뒤통수를 치든, 그것은 작품 전체의 맥락상 작가가 가장 효과적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선택해서 장치하는 부분입니다. 독자에게 효과적인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위한 복선을 심고, 독자가 추리하게 만든 다음에 뒤통수를 치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가요. 물론 그런 부분이 아무나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만큼 쉬운 장치는 결코 아니기에 말만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둘이 동일인물임을 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면 이런 장치도 필요없었겠지만, 작가가 월과 연우에 대한 정체를 감추고 싶어한 의도가 확실히 보였기에 이런 식으로 정체가 독자에게 드러나는 점은 어정쩡한 느낌이 들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이런 어정쩡한 아쉬움은 2권에서도 동일하게 두어번 반복됩니다.

둘째, 운이라는 캐릭터가 주는 역동적인 존재감이 아쉽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작가는 모든 캐릭터에게 공평하고 한치도 소홀하지 않습니다. 모든 등장 인물들에게는 각자의 애달픈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을 위해서 곧잘 플래시백이 사용되는데 이 횟수가 다소 지나친 감이 있었습니다. 1권 중간 정도 주인공의 과거를 설명했던 그 방식은 2권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각 등장 인물마다 시간을 돌려서 그들의 사연을 말해주는데, 그 방식이 한결같이 플래시백입니다. 나중에는 단조롭고 안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제가 '잦은 플래시백'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으나 작가분의 필력 덕분인지 재미없게 읽었거나 지루하게 여기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 작품에서 필요없는 부분도 아니었기에 매번 다른 인물들이 보여주는 과거 얘기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추어 변형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아니면 등장인물 중 몇몇은 사랑을 얘기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성상으로 봤을 때, 저는 '운'이 왜 '월'을 사랑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가장 불필요한 감정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 이 '운'이라는 캐릭터입니다. 월, 훤, 운이 삼각 관계를 이루었던 것도 아니고, 혼자 삭이다가 짝사랑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지요. 구성상 '운'은 왕인 '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는 호위무사입니다. 왕에게 절대 충성하는 존재이며 왕이 뼛속까지 신뢰하는 캐릭터죠. 이런 캐릭터에게 작가가 왕의 여자를 사모하는 마음을 줬을 때는 뭔가 의도하는 바가 분명히 있어야 설득력을 갖습니다. 왜 굳이 마음 어지럽혀가며 왕의 여자인 연우를 사모하는 역할을 맡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인 운과 양명군은 왕의 여자인 연우를 사모하며 피눈물을 흘립니다. 이 둘은 왕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며 왕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들이지만, 배신하면 왕위는 한순간에 날아갈 정도로 위험한 존재로 탈바꿈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에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배신한다던가, 하다못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위험한 캐릭터로 그려져야 더 박진감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운의 성격상 절대 왕을 배신할 리는 없고, 그렇다고 월에게 감정을 내비치는 캐릭터도 아니며, 그렇게 홀로 삭이다가 조마조마하게 하지도 못한채 끝납니다. 양명군도 한 여자를 갖고 싶은 마음에 역모를 꾀하는 척 하지만, 결국 악인도 아닌 존재로 왕을 돕고 끝날 뿐입니다. 그래서 양명군과 운은 월을 좋아하게 만들지 않았던 편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다른 인연을 만들어주는 게 훨씬 깔끔하지 않았을까요.

셋째, 염의 사랑과 용서에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민화 공주는 철부지지만 사랑스러운 캐릭터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염을 갖기 위해서 뭔지도 모른채 역모에 가담했고, 그 결과 그토록 사랑하는 염을 손에 넣었습니다. 어렸기에 천지 구분 못했던 민화의 행동은 철없음으로 이해가 간다 쳐도, 염이 나중에 민화를 용서하기 위한 장치에 대해서는 많은 생략이 된 것 같더군요. 염과 민화의 성품상 모든 정황과 사건을 다 알게 된 후에 둘 중 하나는 자결이라도 해야 말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던지라 작가가 어떻게 풀어나갈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사랑으로 모든 과거를 용서하는 장면을 위해서는 염이 정말 민화를 용서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읽어나갔는데 설득력 있는 장면을 만나진 못했습니다. 염이 민화를 사랑하게 된 심리가 단 한 장면만 들어가 있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그 부분조차 생략이 되어 있어 정말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맹목적으로 사랑한 이의 눈에서 생피를 흘리게 한 자신의 죄를 뼛속까지 알면서도 민화가 '갈 곳이 없어서, 오고 싶은 곳은 여기 뿐이어서...'라며 울먹거리며 결국 염의 용서를 받는 장면은 참 가슴 아프고 눈이 시릴 정도로 애틋했습니다. 어쩌면 뻔뻔하고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민화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던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그 장면 덕분에 많은 모순이 덮어지긴 하지만 아쉽고 섭섭한 건 역시 염의 확실한 성정이 민화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임은 어쩔 수가 없네요.

결론적으로는 좀더 치밀하고 완성도 있게 독자의 심장과 머리를 확 움켜쥘 수 있는 구성을 보완했더라면 좀더 밀도 있는 글이 되었을텐데 싶은 생각이 듭니다. 등장인물 간의 불필요한 감정선은 말끔하게 걷어내고, 사건과 서술을 분리한 적절한 복선의 사용으로 독자의 뒤통수를 치지 못한 절정과 사건이 아쉽습니다. 거대한 역사의 음모의 중심축인 왕 훤과 대결할만한 비중있는 악역이 고작 파평부원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부분은 조금 김이 빠지는 부분이었습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결말을 위해서 훤의 편으로 돌아선 느낌이었거든요. 나쁘진 않았지만 그동안 진행되어온 음모의 해결상 조금 싱거운 느낌이 들었달까요.

그러나 이런 아쉬움이 뭐 대수랴 싶게 재밌는 이야기 한편을 뚝딱 읽어낸 여운은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이 글의 가장 큰 매력은 작가의 생생한 글발로 살아난 캐릭터에 있으니까요.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보자면 작가가 그려내고 싶었던 건 이훤이라는 이상적인 왕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연우와의 로맨스는 이훤의 인간적인 성정을 그려내기 위한 부수적인 장치 정도밖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해가 달을 어떻게 품는가에 대한 해답은 바로 이 두 사람의 로맨스에서 비롯되기에 이 글이 완성이 됩니다. 연우와의 로맨스가 있었기에 훤이라는 인물이 빛을 낼 수가 있었으니까요. <해를 품은 달>이라는 제목은 '달'이면서 '월'이라는 이름도 함께 가진 연우를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훤이 만들어놓은 이상적인 태평성대에서 훤의 품에 안긴 연우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해보며 감상을 마칩니다.


댓글 '5'

편애

2006.01.24 03:47:16

하지만 리체님; 전 제가 눈치 빠르다고 전혀 생각치 않지만;
그 전에 이미 연우와 월이 동일인물이란 걸 눈치챘는걸요;;;;;;
복선은 어느 정도 깔려있다고 생각되는데;;;;;;
음 또 전 염과 민화의 단풍잎 씬이 참 맘에 들었는 걸요;;;

리체

2006.01.24 11:37:28

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둘이 동일 인물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봤습니다. 그 말씀을 드렸더니 모님이 굉장히 아연하면서 놀라시더군요-_-;; 웬만한 눈치 빠른 독자에는 제가 속하지 않나봅니다. (가스라기 때도 그랬거든요) 그래서 저는 편애님이 어떤 복선을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월이 왜 끊임없이 훤을 밀어내는지, 훤이 왜 갑자기 연우를 생각하며 과거 회상에 빠져드는지, 이 두 중간을 이을 연결 고리가 무엇이 되었든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읽은 바로는 그게 없었거든요. 제가 말씀드린 건 좀더 '효과적인' 복선이었습니다. 가스라기에서 사용된 복선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두 작품은 다르지만, 분명히 독자가 추리하게끔 만들다가 뒤통수를 치는 것과 작가가 스윽 내미는 느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읽기로 해를 품은 달에서는 후자였거든요.

그리고 염과 민화의 단풍 장면은 저도 물론 좋았습니다만 어느 장면이든 민화의 애절함만 보여서요. 민화가 염을 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염이 민화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심리가 조금 미진하다 보였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건가요? 작가분이 둘의 분량을 조금 축소시키셨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요. 잘 쓰여진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읽는 사람마다 조금씩 편차가 있으니 이런 바보가 읽고 쓴 리뷰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주세요.T_T

애플

2006.01.24 12:06:25

저도 이 책은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민화는 처한 죄에 비해 너무 고생이 적어서 좀 아쉬웠어요~염도 제가 생각한것보다는 쉽게 용서한것 같구요.

Kirie

2006.01.24 20:14:35

조선의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절대 아니었기에 부원군이 왕을 대적하는 인물로 나온 것에는 별 이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염과 민화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아쉬워요. 염의 성정상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는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

헤이로스

2006.01.24 22:58:42

저도,,,염의 성정으로 볼 떄, 자살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조금 흐지부지 끝난 면은 있는 듯해요..연우가 넘 일찍? 밝혀진 듯도 하고... 이런저런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최근에 본 최고의 역사로설..^^인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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