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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김경미 소설을 이끌어가는 두 명의 캐릭터 중 한 명인 남주인공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의 친우들마저 여주인공을 젖히고 시선을 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출판사/신영미디어
태원의 후계자 류세진은 리조트 사업 진행을 위해 부지로 점찍어 둔 한겨울 을동의 산을 찾고 그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예경을 만나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이끌린 세진은 예경을 소유하겠다고 결심하지만, 세진을 따라 서울에 오게 된 예경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그런 그녀를 보며 세진은 풀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낀다. 한편, 세진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은 예경을 납치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세진은 강하게 분노하는데…….
로맨스소설 작가 중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이선미 씨이고, 가장 애정을 갖는 작가는 단연 김경미 이다.
지금에야 그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처음 그가 출간을 할 당시에만 해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로 인해 함께 울고 웃으며 몇 년이라는 세월을 지나고 나니, 이제 다 극복하고 하나둘 발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하면서도 자랑스러웠기에, 그의 작품에 대한 애착은 작가 본인 못지 않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매번 김경미 작가의 책이 출간 될 때마다 가장 혹독하게 평하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프로 작가는 본인의 글을 가장 냉정하게 볼 줄 알아야한다. 사람은 완전히 객관적이 될 수 없는 동물이고, 그것이 자신의 일일 경우에는 객관은커녕 오로지 주관에 근접해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작가라면 결코 자신의 작품을 냉정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냉정해지도록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 대한 애정과 훈육을 혼동하지 않아야만 하는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과 장단점을 파악하는 눈을 동시에 가져야만 한다는 거다.
김경미 작가에 대한 내 애정이 무한함을 앞서 언급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 밑으로 주르륵 쓰여질 글은 아마 작가 자신에게는 매우 혹독한 말이 될 것이므로.
이것을 볼지 안볼지는 오로지 작가의 마음이겠지만, 뭐 작가 본인에게 이미 공언한 바 있으니 어쨌든 마음 편히 오랜만의 독설을 내뱉어 보련다.
보통 로맨스소설에 있어서 독자의 시선이 머무는 것은 남주인공이지만, 독자들이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여주인공이다. 로맨스소설이 욕구의 장르라 칭해지는 이유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로맨스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상황 혹은 감정에 자신을 대입하여 소설을 읽기 때문이다.
<눈노을>은 로맨스소설로서 일단 독자들에게 몰입의 여지를 주어야할 캐릭터는 분명 여주인공 예경이다.
여주인공의 설정은 평범하지 않고, 또한 현재와 과거의 교차로 구성되어 있므로 독자가 여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해 읽어나갔을 경우, 막바지에 가 그 감동이 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눈노을>에서 여주인공 윤예경은 설정만으로 머물러 있다.
앞서 말했듯 예경의 설정은 평범하지 않다. 그 독특한 설정 때문에 예경은 결코 두드러져서는 안된다.
예경은 관조적인 캐릭터이다. 수동적이며, 정적이다. 이는 성격과 설정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조연인 지민과 대비되어 있다. 소설 본문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예경이 백합이라면 지민은 붉은 장미다. 이러한 극단적 대비는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눈노을>에서의 캐릭터적 대비는 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유는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예경이라는 여주인공의 '두드러지지 못함'에 있다.
소설 속에서 캐릭터가 두드러지기 위해서는 대사나 지문 혹은 행동 묘사 등에 있어 일단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만 한다. 지면을 할애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대사로서 인물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방법도 있다. 예경은 그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도 가지지 못했다.
여주인공이 눈에 띄이지 않는 대신 조연인 지민은 적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는 남주인공 세진과 그의 친우, 강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비에 쌓인 채 수동적이며 관조적인 캐릭터를 유지시키기 위해 오로지 여주인공만의 장면은 제한한 대신, 그 외의 인물들의 시각으로 예경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자면 그 외의 인물들 역시 독자들에게 각인을 시킬 수밖에 없을 테고, 또 그러자면 정적인 캐릭터와 동적인 캐릭터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주객전도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몇 장면에서는 예경이라는 여자만을 볼 수 있게끔 했음에도 예경에게 머무는 시각은 대단히 짧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문득 예전부터 김경미 작가의 장점이자 단점이라 지적했던 어떤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이 관조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다.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하는 것은 절망에 빠진 남주인공의 시점이다. 하지만 그 카타르시스에 이르기까지 감정을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주인공이다. 일명 '여주인공의 삽질 모드'에 열을 내면서도 로맨스소설에는 의례히 이러한 장면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때문이다.
<눈노을>에서는 수 많은 감정이 나온다. 복수심, 분노, 소유욕, 갈망, 애절함, 슬픔, 노여움 등등. 평온함이나 기쁨처럼 안온한 감정이 아닌 강렬한 감정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이것을 세밀하고도 빠르게, 조금은 큰 스케일로 그리고 깊게 묘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세진이 할머니인 이 씨에게 복수를 하고자 하는 이유, 그에 따른 아버지에 대한 증오, 배신감, 서글픔, 동질의식 등을 더 강렬하게 묘사했었더라면 말이다.
혹은 예경이 과거 배신 당한 남자에 대한 증오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을 때 느꼈을 깊은 분노와 절망감, 증오 등을 더 격렬하게 표현했었다면.
굳이 그들뿐이 아니라 스토리를 이끄는 중요 장면에서의 감정을 조금더 심도 깊게 묘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그랬더라면 예경이 되풀이된 상황에 처했을 때도, 세진이 예경을 잃어버렸을 때도 가슴 쥐어뜯는 슬픔을 더 크고 깊게 전달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눈노을'이라는 제목이 던져주는 여운처럼 <눈노을>은 복잡한 갈등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펼처지 못한 채 막을 내린 느낌이다. 마치 겉핡기를 하며 어영부영 건넌 느낌이랄까? 여주인공의 설정에서 오는 신비감을 내세울 목적에 모든 것을 너무 숨기고 숨기느라, 정작 휘몰아쳤어야할 감정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끝나버려 대단히 아쉬웠다.
이렇게 아쉽게 끝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작가 자신이 감정적 동요를 두려워한다는 거다.
한큐에 모든 것을 해소한 후 책을 덥고 만족을 얻는 로맨스소설의 주인공의 감정면에 있어서는 떨어질 땐 확실하게 떨어지고, 올라갈 때는 확실하게 올라가야한다. 절망할 때는 지옥에서 뒹구는 것이 느껴질 것처럼 묘사하고, 행복할 때는 하늘에 둥둥 떠다니고 있음이 느껴지듯이 설명해야한다. 그것이 지문을 통해서든 대사를 통해서든 상관없다. 어느쪽이든 강렬한 감정은 확실히 강렬하게, 평온한 감정은 확실히 평온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김경미 작가는 평온함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나, 강렬함에 있어서는 여전히 극 절제를 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소설을 씀에 있어서 스스로 어떠한 틀을 정해두고 그것을 깨트리려 하지 않기에, 소설 속에서 살아 숨쉬는 주인공들 역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나아졌다는 것을 반대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읽은 <눈노을>에서는 뭔가 변화하려는 미비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것이 아직 시도뿐이라 큰 반향은 던지지 못했더라도 앞으로 김경미라는 작가가 보여줄 탈피 후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일지, 기대감과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