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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글 솜씨, 매력적인 대화체. 그리고 자로 잰 듯 정갈한 문장과 구성. 언뜻 보기에 슬리퍼는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 없는 소설로 보인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없던 시절에 이미 한 번의 경력을 갖고 있었던 작가였다는 것을 알고 아, 역시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슬리퍼는 리뷰하기가 어렵다. 분명 완성도를 갖춘 소설인데 책을 읽어나가면서 줄곧 묘한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분명 문장도 대화도 캐릭터도 잘 살아 있는데ㅡ 왜? 어째서?
그 고민을 하느라 사실 읽었으면서도 리뷰를 쓰지 못했다. 그리고 곰곰 생각해 본 결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사건을 주축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사실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전부 과거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문제는 그 과거가 이야기에서 너무나 적게 할애되어 있다는 점이다.
* 준희(여주)와 정우(남주)의 과거
4년 전 사건이 있었다. 현빈과 준희는 애인이었고, 정우는 그런 준희와 잤다가 준희의 기획사를 무너뜨리고 사라진다. 그 사건에 대해 나오기는 하지만 이 사건이 지금 현재 주인공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짐작할 만큼 상세하게 나와 주지는 않았다. 독자는 계속 짐작해야 한다. 이랬으니까, 이랬겠지.
심지어 여주이자 독자가 이입해야 할 준희의 감정에 대한 것조차도.
오히려 남주인 정우는 비교적 수월하게 짐작 가능했다. 그런데 여주인 준희는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설명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작가는 언급을 했다. 그런데 충분치가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만일 그 과거에 대해, 혹은 두 사람의 감정은 어땠던가에 대해 자세하게 나와 주었다면 현재 그들의 그 불안한 감정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또, 준희가 4년 만에 만난 정우를 왜 못 알아 봤는지에 대해서도.
준희는 똑똑한 여자다.
4년 만에 재회한 남자(그것도 잠자리까지 같이 한)을 못 알아볼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아니다. 이 경우에 몇 가지 신체상 특징이 바뀌었다고 해도 목소리,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볼 수 있는 쪽이 타당할 듯싶다.
그런데도 준희가 정우를 못 알아봤다. 왜일까?
처음엔 기다렸어. 해가 바뀌어도 오지 않길래, 잊는 게 더 편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길래 그렇게 하기로 했어. 그래도 막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 나는 이렇게 지옥 같은데, 너는 홀가분하게 도망쳐서 즐거울 거라고 생각하니까 억울하고 화가 나서 막 미칠 것처럼 네가 밉고 싫었어. 4년 동안 너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먹먹했던 거, 그게 대체 뭔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구.
이랬었던 여자가 말이다.
한 가지 있을 수 있다. 너무 괴로웠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기억이고 뭐고 무의식적으로, 자기 방어적으로 지웠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괴로움을 겪었다기에 준희는 지나치게 멀쩡한, 오히려 부서져본 적이라고는 없는 견고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 민준희란 여자의 건강함
준희는 외모도, 성격도 모두 아름답고 건강한 여자다. 그런데 그 건강함이 로맨스 독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안겨주었다(안다, 나만 그렇다. 예쁜 여자 밉다. 나랑은 거리가 머니까). 게다가 때려도 부서질 것 같지 않은 의지와 똑똑함까지 있다. 그런데 그게, 부서졌다가 자신을 재조립한 아름다움과 건강함, 의지와 똑똑함이 아니고 그냥 줄곧 자신만만하게 살아온 그런 여자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트라우마로 겉과 속이 다른 남주 정우에 비해 준희는 지극히 균형 잡힌 여자라는 말이다. 그런 준희에게 정우는 매력을 느꼈을 수 있다. 물론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슬리퍼’에서 진행되는 ‘현재’에서 두 사람은 처음 사랑한 게 아니었다. 그 전에 감정을 갖고 있던 사이였는데 헤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4년 후에 다시 만난 준희는 정우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키스당하는 순간까지.
그것도 태연하게, 여전히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성격을 하고 있는 여자. 거기서부터 위화감이 시작된다. 어쩌면 저렇게 이성적일 수가 있을까. 당당하잖아. 4년 전의 경험이 준희에게는 일말의 어떤 감정도 안겨주지 못했단 말인가? 하고. 설명은 되어 있지만 너무 담담해서. 게다가 조금은 경계심을 가질 만도 한데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마저 보여준다.
저 똑똑한 민준희가 말이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준희란 여자는 어떤 사람일지 나는 지금도 파악이 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똑똑했다가 어떤 때는 흐트러졌다가, 남들은 모두 가질법한 경계심은 없으면서 또 남들이 전혀 가지지 못한 이성과 지성은 갖고 있다.
독자들이 트라우마를 딛고 꿋꿋이 살아온 여조 홍녹연 쪽에 손을 들어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쪽이 감정이입하기 훨씬 쉬운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정우랑 같이 있을 때의 준희보다, 현빈과 같이 있을 때의 준희가 더 좋았다. 특히 보컬 트레이너 불러오라고 할 때의 그 거침없음이란 정말 매력적이었다. 장면마다 달라지는 준희는 정말 남자 홀릴 외모에 성격이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준희에게 감정이입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주인공 커플은 그냥 처음 만나서 부담 없이 친해진 사이 같았다.
4년 전의 과거 따위는 없는 것처럼.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정우가 준희를 좋아한 건 충분히 이해하는데 왜 준희는 정우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4년 전은 어땠을까. 지금 다시 헤어져서 4년이 지난다면 민준희란 여자, 정우를 잊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정우의 사랑에는 망설임과 그럼에도 우러나오는 충동, 설렘이 가득한데, 어째서 준희의 사랑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는 걸까.
성격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나오는 의문이다.
그에 비해 지면에 할애한 비중이 적은데도 녹연은 이해가 갔다. 그 당당함이, 상처가 하나같이 다 이해가 갔다.
* 촘촘한 구성, 안정된 문장
문장도 대사도 좋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챕터 구성.
내가 ‘헉’ 했던 부분에서 챕터를 끊어주길 바랐는데 바로 그 다음에 문단이 이어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서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리고 또 이 이야기는 철저하게 남주 중심으로 돌아간다. 여주에 비해 남주의 심리가 훨씬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 남주의 이미지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그런 이미지라고 나는 이해했다. 실제 그런 묘사도 있다.
그에 비해서는 문장이 지나치게 정갈했다. 게다가 모든 부분의 묘사가 다 섬세하다. 중독도 그런 편이었는데, 슬리퍼의 섬세함은 중독과는 조금 다르다. 전부 설명하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약간만 강약을 조절해주었으면 긴장감이 훨씬 살아나지 않았을까.
‘너와 나 사이에’는 차분한 여주가 메인이라 안정된 문장이 강점이었는데, ‘슬리퍼’는 불안정한 남주가 메인이라 문장이 좀 더 흐트러져도 좋았을 법했다는 생각이 든다.
억지로 지적할 거 짜내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작가가 엠에센에서 고칠 거 뭐냐고 매번 물어서 짜내서 씁니다. 솔직히 저더러 이 시놉으로 이 책보다 잘 쓸 수 있냐고 물으면 절대 대답 못하죠.
첫 ‘로맨스’로는 조금 복잡한 시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모든 토끼를 다 잡기에는 수정기간도 상당히 촉박했던 듯싶고요. 그래서 리뷰 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스타일과 소재와 구성 모두가 까다로웠거든요.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1. 정우야, 축하해. 이제 힘들지 않고 잘 살기를.
2. 지현빈, 너 정말 때려주고 싶었어. 근데 미워할 수 없어. 왜지?
3. 조연들도 궁금합니다. 특히 수진 씨(왠지 마늘 같은 여자였어요).
입니다.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한 마디. 이제 그만 쉬고 요가로 다진 몸매와 체력을 살려 글에 매진하시기를 애걸합니다.
댓글 '8'
토리아/오오, 잘 읽으셨어요?^^
Junk/꽤 좋아한 거 맞다니까.ㅎㅎ 현빈과 사귀던 도중에 마음이 흔들렸었던 건데 자각을 못하고 있었던 거고, 그게 4년 전 그 날 밤을 같이 보낸 뒤 정우가 훌쩍 떠난 후에 깨달은 감정이라 혼란스러워했던 거고, 그래서 기다리다가 혼자 삐친거지.-ㅁ-
본편에는 지겨워서; 안 썼지만 나중에 <4년 전 그 밤엔 무슨 일이 있었나>라든지, <준희는 정우를 왜 사랑하는가> 같은 건 외전으로 한번 써볼까 생각을 잠깐 했어.=_= 암튼 어렵게 리뷰 써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나도 애걸이요~ 나와너2는 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