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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공간이고, 공간은 우주고, 그 우주 안에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 중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여러 사랑들 중에 사랑 하나가 있다.
‘카페 땅’의 작가인 서누 님은 ‘비차’때부터 글은 매우 잘 쓰지만 로맨스 요소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분이다. ‘비차’는 아직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작가와 작품에 대한 신뢰는 '비차'에 대한 높은 기대감과 읽고 싶은 욕구를 마구마구 부추긴다) 실제 그러한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카페 땅’이 로맨스 요소가 부족해서 일반소설에 가깝다는 말에는 썩 동의할 수 없다.
로맨스 요소가 약하다는 건 무얼 말하는 건가.
언제나 그러했듯 일반소설과 장르문학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또다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장르문학이든 일반소설이든 ‘愛’가 드러나지 않는 글은 없기 때문이다. 일반소설에서 드러나는 사랑이 남녀 간의 사랑에서부터 범인류적인 사랑에까지 확대되어 있다면, 장르문학은 오로지 남녀 간의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차이 외에 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또 일반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남녀 간의 사랑과 장르문학에서 이야기하는 남녀 간의 사랑은 뭐가 다를까.
로맨스 요소가 약하다고 할 때, 그 요소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다. 빼어난 외모와 학벌, 경제적인 부를 가진 자들의 오해와 갈등이 버무려진 격정적인 감정의 폭발, 그리고 자극적인 내용을 말하는 건가. 만약에 이게 아니라면? 난 로맨스 요소가 약하다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평가를 듣고 싶다. 그렇지 않고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카페 땅’이 로맨스 같지 않다고 하는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
‘카페 땅’을 읽다 보면 구체적인 묘사는 없지만 남자주인공이 외모와 학력과 경제적인 부를 두루 갖추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 이러한 것들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외적인 것을 거의 대부분 생략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카페 땅’은 과거의 큰 상처로 인해 왜곡된 기억을 가진 송주희라는 여자의 상처 치유의 과정과 사랑을 이루어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왜곡되고 차단된 기억 속에서 풀 한포기 나지 않을 것 같은 척박한 땅 위에 홀로 서 있는 주희에게 다가선 이들. ‘빌딩들 사이에, 상점들 사이에, 집들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자리 하나를 버젓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아련한 기억 속에서만 시리게 아름다운 고향의 시골집처럼 버려져 있었던’ 마치 소외되고 격리된 도피처와 같은 카페 ‘땅’ 위에서 만난 이들은 제각기 나름의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는 사람들이다. 입양의 문제와 중동에서의 아픈 기억을 가진 창한을 비롯해 현우, 도현, 봉기, 윤주, 지현, 보아 모두가 그러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치유가 아니라 함께 웃고 울고 보듬고 치유하면서 각자의 틀을 깨고 나와 사랑을 한다. 주희와 창한, 현우와 윤주, 도현과 지현, 봉기와 보아. 그리고 석환과 혜숙까지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천국과도 같은 쉼을 얻는 곳, 카페 ‘땅’.
그래서 외적인 것들 대신 이 글에서는 직함이나 관계, 장소를 강조한다. 각각의 인물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는지, 각자의 인물들이 어떻게 맺어진 관계인지를 매번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직함과 관계의 긴밀성, 등장인물들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와 같은 것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에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목재 가구들만 가득하던 어두운 카페 ‘땅’의 커튼이 걷히는 순간 하얗고 푸른빛이 들어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그림자까지도 똑바로 대면하고 이겨나갈 수 있게 한 관계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하얀 호텔, 푸른 출판사, 빛과 그림자, 문 라이트’ 등의 고유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작가가 색감과 빛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게 아닐까 싶다.
‘카페 땅’은 간결한 문체와 요소요소에 배치된 철학적인 이야기 때문에 다소 어렵다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마치 3인칭 관찰자 시점인 듯 작가의 개입을 철저히 자제하고 있으며, 문체가 여느 로맨스와 비교해 봤을 때 감정이 절제된 건조한 문체이면서 때로는 나른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의 철학은 철학을 위해 사랑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그렇다면 인문학 서적이 되었을 거다) 사랑과 치유의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철학의 부분을 끌어들인 것이며,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는 강간을 당한 이후에 상처 입은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오는 이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기 위한 최선의 문체가 아니었을까.
다만 원서를 번역한 것 같은 투의 지문이나 대화가 있었다는 점이 너무 아쉽지만 말이다.
‘카페 땅’은 여자주인공이 왜곡된 과거의 기억을 갖게 된 것이 강간의 경험이었지만 강간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러한 끔찍한 일을 당한 상처가 있는 사람도 현실로 걸어 나와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카페 ‘땅’의 커피향처럼 진하고 깊은 이해와 용서, 사랑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글이다.
얽히고설킨 관계의 복잡함과 연속되는 오해, 격정적인 사랑의 표출이 없다고 해서 로맨스가 아닌 것은 아니다.
진심 어린 관심과 이해, 그리고 끈기 있는 지극한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가를 알게 해 준 글이라는 의미에서 ‘카페 땅’은 매우 아름다운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주희의 치유와 사랑이야기이기 때문에 남자주인공인 창한(주로 주희와의 대화에서 그 과거와 상처가 드러나는데, 서로에 대해서 조급해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하나씩 알아나가는 과정을 의미있게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워서 과함이나 부족함이 없게 느껴진다)과 그 외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약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 여러 사랑들 중에 하나이면서 중심이 되는 주희의 이야기와 곁줄기처럼 뻗어있는 그들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색함이나 비약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딘가 사람들 사는 공간, 그 공간의 우주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카페 ‘땅’의 커플 마스터의 이야기와 그곳에 머무르는 이들의 이야기가 숨 쉬는 곳. 그 언제까지고 지속될 이야기에 오래오래 귀 기울이고 싶다.
그런데 윤보경님께서 홀릭-공감지대님이셨군요. 이 리뷰보고야 알았다는...
좋은 리뷰들 잘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