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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순서대로 나가면, 제우스-포세이돈-하데스부터 먼저 언급해야 할 겁니다. 그들은 아버지 세대의 신들이고, 실제 로맨스 소설에 더 많이 등장하는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보다 희귀한 원형인 디오니소스가 어떤 로맨스 소설에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를 먼저 말하고 싶었습니다.
남자주인공에게 디오니소스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투영시킨 소설이 있습니다. 상당히 논란이 많았던 이선미 님의 「광란의 귀공자」죠.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독자들이 불평한 부분은 남자주인공의 성격이었습니다. ‘부잣집 망나니’라는 말로 대변되는 그는, 형식상으로나마 ‘자기 직업에 충실한 것’으로 설정되는 여타의 남자주인공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죠. 어딘가 거북살스럽게 튀는 인물로 여과 없이 그려져 있습니다.
디오니소스 원형 역시도 그러합니다.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는 종종 ‘환영받지 못하는 방해요소’, 곧 갈등과 광란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선미 님이 의도하고 이러한 제목을 지으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디오니소스 원형을 거의 그대로 구현했다고 할 수 있는 남자주인공 민석이 바로 「광란의 귀공자」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디오니소스는 술과 황홀경(엑스터시)의 신입니다. 제우스와 인간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질투에 불탄 헤라의 저주로 인해 정신착란과 폭력 등을 저지르고 다니다가, 나중에 정화된 후 인간인 아리아드네와 결혼하여 테세우스에게 버림 받은 그녀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이런 디오니소스 원형의 이미지는, 신동, 영원한 사춘기 소년, 어머니의 아들,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무당, 이중인격, 박해받는 떠돌이, 해체된 원형 등입니다. 또한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기도 합니다. ‘광란의 귀공자’인 차민석은 어딘가 불안정한, 덜 자란 남자이며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인물이었죠.
놀기 좋아하고 순간적으로 살아가며 출세에 관심이 없는 것은 디오니소스의 본질입니다. 차민석은 ‘의지박약’에 ‘현실도피’형인 디오니소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차민석의 성장과정은 디오니소스의 그것과 아주 흡사한 데가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인물이죠.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인간여성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제우스가 벼락의 신으로 변신한 모습을 보게 된 세멜레가 죽는 탓에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불안정한 남신이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지옥에까지 어머니를 찾으러 갑니다. 이런 디오니소스의 모습을 현대에서 재구성한다면 다른 여자에서 모성을 찾으려 애쓰는 남성을 투영할 수 있겠죠.
반면 그는 제우스로 대표되는 파워를 지닌 강한 남자인 아버지 앞에서 좌절감을 느끼는 아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가 그의 일탈적인 성격을 잘 발전시켜서 직업을 찾는다면 현대사회에서도 성공할 수 있지만, 대개의 디오니소스 남성이 현대의 경쟁사회에서 성공하기는 참 힘든 일입니다. 그는 권력, 경쟁, 학문, 연구 등 현대사회에서의 성공과 연결되는 어떤 요소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섹스, 술, 마약 같은 일탈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그가 결코 바람직한 결혼상대가 될 수 없으리라는 건 당연한 사실이겠죠.
이런 디오니소스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여인을 찾는 것이죠. 디오니소스가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아리아드네를 발견했듯이, 또는 민석이 사랑하는 현호의 죽음으로 상실감에 젖어 있던 마리와 만났듯이.
그렇다면 마리는 어떤 여신상을 구현하고 있을까요? 저는 그녀가 사랑과 미의 수호신인 아프로디테를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신화에서 ‘비너스’로 불리는 아프로디테에 대해서야 모두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바다에서 탄생하여 사이프러스 섬으로 흘러갔는데, 많은 신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습니다. 많은 로맨스의 여주인공들이 남주인공의 강압에 의해 그와 관계하기 시작하듯이, 그리스 신화의 많은 여신들은 남편이나 연인을 손수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헤라는 비에 젖은 새로 변신한 제우스에게 유혹 당했고,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에게 납치를 당했으며, 데메테르는 제우스로부터 강간당했죠. 그렇지 않은 경우, 아르테미스나 아테네의 경우에는 처녀 신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아프로디테의 경우는 달랐죠.
그녀는 자유롭게 자신의 연인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장인과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를 남편으로 맞은 후에도 전쟁의 신 아레스나 전령신인 헤르메스와 로맨틱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졌습니다. 이런 그녀는 남성들이 꿈꾸는 관능적인 연인상이며, 생식본능과 창조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런 여성들은 대개 다른 여성들에게 그리 좋게만 비춰지지 않습니다. ‘남자를 잘 꼬드기는 여시’로 폄하당하기 십상이죠. 노란 비옷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민석을 유혹한 관능적인 여자주인공 마리가 많은 독자들에게 불편하게 느껴진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나 마리라는 여성은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잃었을 때 공허하게 살아가며, 남자를 유혹하고 싶을 때도 그 감정에 따라 바로 행동에 옮기는 여자입니다. 디오니소스만큼이나 즉흥적이며, 또한 강한 페로몬을 갖고 있는 여신상인 아프로디테 모습 그대로죠.
또한 현호와 닮은 민석의 아기를 갖기 위해 민석을 유혹하는 대목에서는 생식, 종족보존의 욕구를 상징하는 아프로디테 코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아기 그 자체를 좋아해서 임신을 원하는 데메테르 여신과는 달리 연인의 아기를 원해서 임신하는 모습도 아프로디테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마리로부터는 또 다른 여신상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바로 디오니소스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여인인 아리아드네죠. 사실 아리아드네는 아프로디테와 동일시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사랑과 미의 신인 아프로디테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었고, 키프로스에서 아리아드네 아프로디테로 숭앙을 받았죠.
디오니소스는 여행 중에 낙소스란 섬에서 아리아드네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테세우스를 사랑해서 그를 도왔지만 그녀의 여동생 페드라에게 반해버린 로리콤 테세우스는 그녀가 잠든 틈을 타 섬을 떠나버립니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그녀를 발견한 디오니소스는 아버지 제우스에게 부탁해 그녀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어주고, 그 뒤 줄곧 그녀만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죠.
디오니소스 남성은 연애에 빠지기 쉽지만 그것은 대개 비인격적 혹은 초인격적인 만남으로 인간적 혹은 인격인 관계를 통해 성장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버림받고 배신당한 아리아드네를 발견하고 동정심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그녀를 구원하고, 또한 자신을 구원하게 되는 것이죠. 죽은 연인 현호의 기억에 아직도 얽매여 있던 마리를 단 하나의 여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민석은 ‘부잣집 망나니’에서 개과천선, 자기 가족을 책임질 수 있는 남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테세우스에 버림받은 아리아드네가 디오니소스와 결혼함으로써 여신으로 거듭나듯, 마리 역시 민석에 의해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각기 트라우마를 지닌 두 사람은 결합으로 인해 성장하는 겁니다.
즉,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에게 보이는 자유분방하고 일탈적인 이미지, 주변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광란의 주인공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외된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 채로 남아있던 그들. 중요한 것은, 그런 그들이 사랑을 통해 성장했단 사실이지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원형을 충실하게 구현한 주인공이나 스토리일수록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아마 인간 내부에 깊이 내재하고 있는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일 겁니다. 다음 편에서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코어에 대해 로맨스와 결부지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내용을 미리 알아차리실 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지루하다, 때려치우라고 말씀하시면 꼬리를 내리고 물러가겠습니다만.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7-14 13:49)
신화 저도 좋아하는데, 너무 재밌네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