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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762
저자/가선
출판사/유로즈

1910년 상해. 그녀 유다연.
모든 것을 걸고라도 구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남자 장태인, 그를 따르기 위해 슬픈 목숨을 기꺼이 던졌다.
그리고 환상인 듯 그의 뒷모습을 쫓아 온 곳, 2003년 상해.
그 루카스 캐링턴을 만났다.
제목은 중요하다. 적당히 내용을 드러내면서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제목이란 모든 작가들이 욕심을 내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보면 이 <바람에 묻다>는 좋은 제목에 속할 거다. 그 전작인 <각의 유희>처럼 말이다. 솔직히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가 심히 곤란했다. 하지만 읽고 나니 그제야 알겠더라. 참으로 절묘하다 싶었다.
<바람에 묻다>는 <불멸의 연가>의 연작이다. <불멸의 연가>의 주인공 닉과 서영이 이 책에서도 심심찮게 나온다.
소재는 환생. 이 환생은 굳이 로맨스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등등에 자주 쓰이고 있는, 우려먹고 우려먹어도 또 우려먹을 게 남은 것 같은 소재들 중 하나 이다. 환생 자체를 고스란히 써먹어도 좋고, 이를 독특하게 비틀어 써먹어도 그것도 그런데로 맛나다. <바람에 묻다>는 전형적인 틀을 고수하면서도 나름의 재미를 살렸다.
작가는 전작 <각의 유희>에서 함축적인 지문과 생략 기법을 종종 사용하고는 했다. <바람에 묻다>도 그 방향을 고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분들이 뭔가가 미진하다 라고 느꼈을 것이리라 싶다. 미진하다 리뷰한 분들 중에 대부분은 구성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엉성하다 표현하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 이건 아니다. 단지 생략 기법이 많아 대다수의 독자들이 따라가기엔 힘든 면이 없잖아 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
["너는!"
자신도 모르게 허공으로 들어올린 손을 멈칫 움켜쥐며 그는 파고들 듯한 눈길을 그녀에게 박았다. 치명적인 침묵이 그들 사이로 번득이는 섬뜩한 칼날처럼 그리워졌다. 그의 전신이 한 차례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이 등을 돌려 태어날 때부터 숙명지워졌던 정혼녀를 버려 두고 떠났다.
1910년, 경성(京城)
단층의 기와지붕이 날아갈 듯 자태를 드러내고 엄숙하게 서 있었다.
그가 살아온 일본의 전통 가옥과는 확연히 다른 맛과 풍취를 감상하며 미나모토 마사유키는 늙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장중하게 버티고 있는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섰다./p.33]
위의 예시를 보면 갑작스런 장면 전환이 이루어진다. 만일 뒷부분을 읽지 않은 채 이것만으로 판단해보자면, 1910년 위의 장면은 훨씬 전의 전생이지 않나 하는 의문도 생길 지경이다. 사랑을 내치려 하는 여인과 이를 힘들게 받아들이는 남자의 심리만을 그리고 있는 장면일 뿐, 배경이 어떻게 되는지 어느 시대인지 왜 그들이 그래야하는 것인지 그 장면 자체에서는 확실히 알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책을 넘기다 보면 앞서 그 장면이 나와야했던 이유를 뒤에 가서야 언뜻 언급하고 넘어간다. <바람에 묻다>는 대략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급작스럽게 장면이 전환되면 독자들은 도대체 '왜' 그런 장면이 나오는 건지 의아해한다. '왜'란 독자들이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끊임없이 '왜'란 물음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다 결국 그 장면이 필요했던 이유를 발견하게 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이러한 뿌듯함을 주기 위해 작가는 먼저 각 장면을 교묘하게 배치한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 닿을 즈음 그 장면이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를 제시해 독자들에게 만족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것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예로 <비의 이름/남이서>을 들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는 장면은 있으되, 그 장면이 왜 반복되고 있는지 짚어주지 않고 끝을 맺었다. 때문에 산만하고 두서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는 작가의 오해에서 비롯된다.
작가 본인이야 이야기의 흐름 전체를 모두 꿰고 있기에 굳이 잡스런 설명이 필요 없다. 하지만 독자들은 주인공 혹은 장면의 흐름에 따라서 이야기를 습득하기 때문에 어떠한 결과를 앞서 제시했다면, 나중에라도 그 원인과 이유를 반드시 규명해야만 비로소 이해를 하게 된다. 그저 한 장면만을 제시한 채 그것이 생겨나게 된 과정 및 결과를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독자로써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고, 글 자체에 몰입이 안되며 결국 작가는 엄청난 질책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바람에 묻다>는 구구절절 하지는 않지만 그 원인과 결과를 뚜렷이 명시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일견 미흡하다 평을 듣는 이유는 뭘까?
여기서 잠시 일반적인 로맨스 소설의 경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인 로맨스 소설은 친절한 지문으로 각각의 장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즉시 덧붙여두고 있다. 주인공들의 심리라던가 주변 묘사에 대해 굉장히 친절하게 묘사해주고 있으며 대부분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이러한 친절함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이렇게 끊임없이 사고(思考)를 거듭해야만 하는 소설을 쥐어준다면 과히 여유롭게 따라올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기법을 다양하게 사용한 작품 중 하나인 <광란의 귀공자/이선미>를 떠올려보자.
당시 이 작품은 많은 탁상공론을 일으킨 적이 있다. 단순히 재미있다 재미없다를 떠나, 구성이 미흡하고 이야기 전개가 난해하다란 이들이 많았다. 이는 쉽게 전개되는 로맨스 소설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생각을 하고 사고를 해야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읽게 했으니 이러한 평을 쏟아낸 것이라 싶다. 순차적인 내용 전개에 익숙하기에, 일반 소설에서는 이미 흔히 쓰이는 구성을-그렇지만 로맨스 소설에서는 전무한 구성을 로맨스 독자들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로맨스 소설은 '감정 이입'을 초점으로 하기에 복잡한 전개 과정으로 결말에 다다를 때까지 주인공의 심리를 끊임없이 유추해야만 하는 작품은 과히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듯 하다. 그래서 난해한 장면을 따라가느라 벅차 결국 감정 이입을 하지 못한 채 책을 덮고만 독자들은 결국 '구성이 허접하다'란 평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바람에 묻다>는 절대 구성력이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다. 도리어 작가가 <각의 유희>에서 선보인 함축적인 지문과 유기적 플롯의 진행이 더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연작인 <불멸의 연가>와 <바람에 묻다>를 함께 읽게 되면 작가가 얼마나 성장을 했나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환생이란 소재를 사용하지 않고 닉과 서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연작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탁월한 구성력을 지닌 글임에도 불구하고 미진하다 여기는 분들이 생긴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 아쉬운 점에 기인한다.
첫째, 작가가 지나친 자기 발전을 꽤하느라 독자에게 충분한 배려를 하지 못한 점이다. 이에 대해 너무나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며칠 전 정크가 올린 글을 부분 인용해 보겠다.
[잡지를 비롯한 상업적인 인쇄물을 만들 때 흔히 회자되는 제1원칙을 충실히 지켰기 때문이다. 그건,
반 보 앞서라.
는 것이다.
한 발짝은 너무 위험하다. 독자들이 쫓아올 수 있을 만큼 딱 반 보. 반 보 앞서야 한다. 물론 그걸 할 수 있기 위해선 경쟁자들이 아는 만큼은 당연히 알아야 하고,
거기에 그 위에 한 계단 올라서서 내려다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로맨스 소설은 장르 소설이다. 장르란 장르에 길들여진 독자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바람에 묻다>는 로맨스 소설로 출판되었고, 그렇다면 독자들의 시선 역시 고려를 해야했다. 그러나 작가는 앞서 나가는 것에 치중해 독자를 배려하지 못했다.
전작인 <각의 유희>는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져 굉장한 호평을 퍼부은 사람들과 악평을 퍼부은 사람들로 나누어졌다. 앞서 나간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따라간 사람들은 호평을, 따라가지 못한 사람들은 악평을 한 셈이다. <바람에 묻다>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누군가가 악평을 했다고 그 사람이 반드시 '뒤쳐진 사람이다'란 섣부른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로맨스 소설은 "상업적인 인쇄물"이기 때문이다.
일반 소설은 다수의 대중을 지향하나, 로맨스 소설은 일단 장르 독자를 지향한다. 장르는 장르만의 색이 있다. 전형, 전개 방식, 구성 등은 작가마다 그 구체적인 쓰임새가 틀리기는 하겠지만 대략 엇비슷한 패턴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장르 독자는 이에 길들여져 있으므로 소설을 선택하기 전, 암묵적인 기대를 하게 된다. 이러한 기대를 져버렸을 때, 작품은 장르 소설로써의 효용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다수의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장르의 타이틀을 걸고 나왔다면 기본적으로 장르 독자들 역시 배려를 해야만 한다. 작가로써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화하길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장르 작가 역시 마찬가지이나, 장르를 쓰는 작가들은 장르 독자들을 아우르면서도 변화를 추구해야만 한다. 즉, 독자들이 여유를 갖고 뒤쫓아갈 수 있도록 반 보 앞서야한다는 거다. <바람에 묻다>는 이러한 면에서 충분한 배려를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지나친 말줄임표의 남용 역시 아쉬움이 되고 있다. 대사에서의 말줄임표는 캐릭터의 특성에 따라 늘이거나 줄일 수 있겠지만, 아무리 대사라 할지라도 지문으로 충분히 표현되지 못할 경우만을 제외하고 말줄임표는 되도록 자제하는 것이 좋다. 로맨스 소설이 감성을 이끌어내는 장르라고는 하나,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혼자만의 감상을 풀어쓰는 일기도 아닌 다음에야 종결 어미 대신 '……'만을 사용해 행간의 여유만을 두어서는 무리가 있다. 사실 <바람에 묻다>는 사건 중심이 아닌, 주인공 다연의 감정이 주를 이루므로 별 무리가 없었을지 모르나 가끔 넣지 않아도 좋을 말줄임표 사용이 눈에 띄곤 했다.
마지막 아쉬움은 소재적 진부함이다. 환생은 흔하디 흔한 설정이라 앞서 언급했다. 환생을 소재로 하는 출판작만 해도 벌써 몇 개를 꼽을 수 있고, 온라인상으로 연재되는 글 중에서도 다수 찾아볼 수가 있다. 게다가 전작인 <불멸의 연가>도 환생을 소재로 하고 있다. 때문에 아무리 연작이라 해도 이미 한번 쓴 소재를 다시 활용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생각해보면 작가의 출판작은 대부분 소재에서 특이한 면은 없었던 것 같다. 흠.
판단하건데, 작가는 진통을 겪고 있는 듯 하다. 흡입력은 있으나 개성이 나타나지 않은 문체를 버리고 수많은 모험과 변화를 추구하는 듯 싶다. 어쩌면 <바람에 묻다>는 과도기로 볼 수도 있겠다. 조금 더 정제하고 정제해 언젠가는 작가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나주지 않을까, 자못 기대해본다.
덧) 쏘오리. 정크.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네 글을 인용했음. 너무 적절한 비유인 것 같아서 말이지;;;
정크 영광이야요. 2004-01-13 X
수룡 읽으려고 했으나 언니가 바로 반납해버려서 못 읽은 책...; 역사성은 괜찮던가요? 2004-01-13 X
'코코' 역사성은 언급할 만큼 많이 활용되고 있진 않습니다. 그 시대를 적당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장치만 차용하고 있으니까요. 솟을대문 같은 것들로 말이죠. 사실 시간적 갭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게 문제인 듯 합니다. 이건 아마도 글의 초점이 예지력을 지닌 다연의 심리적 고뇌에 맞추고 있기 때문이겠죠. 2004-01-13 X
larissa 이른 반납에는 이유가 있는법... 불멸의 연가보다는 분명 발전했지만, 오히려 시리즈 물이 아닌 한권의 독립된 책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 합니다... 깊이 있는 글이라는 것이 반드시 생략과 압축의 묘미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럭저럭 볼만은 했지만... 서연과 닉이 빠졌더라면 하는 바람이.. 사설이 깁니다....ㅠㅠ 죄송.... 2004-01-13 X
'코코' 난제죠. 시리즈를 싫어합니다만, 시리즈가 다른 시리즈와 전혀 다른 맛을 내면 그것도 못견뎌 합니다. 이런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으니 웬만한 시리즈는 다 별로다 하는 거 같아요. 이것도 마찬가지였죠. 저도 <불멸의 연가> 주인공들이 안나왔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거든요. 아, 그리고 깊이 있는 글이라...글쎄요? 그렇게까지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시대적 고찰을 담은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특이한 설정의 여주에 대한 파고듬만 있었을 뿐인 걸요. 그게 아쉬웠죠. 차 2004-01-13 X
'코코' 라리 일제치하의 암흑기를 이런 식으로 담담히 풀어가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그러기 위해서는 로맨스를 팍 줄어야하겠습니다만^^; 2004-01-13 X
larissa 어쩜 그렇게 대단한 생각을 하시는지...전 그냥 글이 맘에 아주 들진 않았습니다.역시.. 리뷰를 쓰시는 분은 다르심... 2004-01-13 X
청 그저 저는 가선님이 부러울 뿐. 2004-01-14 X
청 그리고 코코님. 늘 멋진 리뷰 감사드립니다. 이제껏 리뷰쓰신것 모아서 칼럼 형식으로 출판해도 되겠어요.^^ 2004-01-14 X
yoony 맞어,맞어요! 정크님꺼랑 같이! 리뷰의 이론집 같어요. 2004-01-14 X
'코코' 라리싸/그게 정답일 겁니다. 재미있다, 재미없다 그렇게 느끼는게 대다수의 독자들인 걸요^^ 머리 아프게 '어째서'를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어차피 즐기자고 읽는 장르인 걸요;;; 단지 전 쓰는 입장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할 수 있는 게 저것밖에 없으니 이러는 거 아닐까 싶은-_-;; 청.유니/혼자 주절거리는 거라니깐요.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생각나는데로 주절거리니 제 취향과 편견이 팍팍 드러나지 않습니까?...아직도 멀었다죠ㅡㅡ;;; 2004-01-15 X
김선하 안되요~!유니언니. 코코님은 <중독>부터 내시고 리뷰의 이론집은 나중에.... 2004-01-15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