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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로맨스] 연두의 '얼어죽을 놈의 나무'  

번호 : 89     /    작성일 : 2004-01-12 [03:07]

작성자 : yoony    



솔직히 이 책을 읽지 않으려고 했었다.
뒷 카피에 있는 이 말들- "제사 때 좆나게 일하고 나면 그 다음은 뭔데? 애새끼를 위해서 담배를 끊으면...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뒤돌아보면 난 네 집안 똥구멍 닦아주는 휴지가 되어 있겠지“ - 이런 것들이 딱 말장난 같더라.
내 남편이 장남이자 종손이기에 내가 제사를 직접 지내야하는 입장과 이런 저런 불만족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주부의 일을 해내고 있는 나를 딱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듯한 괘씸함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은 이유는 어느 싸이트의 리뷰란을 보니 모두가 여주인공의 용기를 부러워하고 추앙하는 듯한 분위기이라서, 어설프게 대강 훑어본 선입견으로 - 어떻게 주부의 일상을 똥구멍이나 닦아주는 휴지에 비유할 수 있냐, 누구는 그런 일 하고 싶어서 하고 그런 말 할 줄 몰라서 안 하느냐? - 이런 식으로 댓글을 올렸었다.
그런데 그 뒤로 줄줄이 올라오는 글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응? 거기에 달리 숨은 이야기들이 있나. 표면적인 것과는 다른 뜻이 또 있나 싶기도 하고 은근히 화도 나기에 책을 빌려와서 읽었다.


여주 나무는 제대로 된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다.
늘 노름으로 집을 말아먹는 아버지. 끊임없는 말다툼과 엄마의 눈물어린 하소연. 끝이 없어 보이는 가난함.
열아홉 고3이 시작되는 날 아침, 또 노름빚으로 집을 날리게 된 억울함과 분노로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던 나무를 남주 진혁이 보고 한 눈에 사로잡혀 버린다.
진혁은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혼자만의 깊은 사랑을 8년간 키워온다.

집안의 재촉으로 경영수업을 위한 유학길에 나무를 데려가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고 결혼계획에 착수한다.
늘 그렇듯 어떠한 우여곡절로 남주의 집에 여주가 들어가 살면서 새삼 서로 이성을 느끼고 또 그것에 불편해하면서 어떤 계기로 첫 관계가 이루어지고 점점 서로에게 빠져들고 익숙해져 버린다.
그러다 남자의 유학계획을 알게 된 나무는 이제 와서는 그와 헤어질 수도, 그렇다고 그 험난하고 고된 결혼의 고행길로 걸어 들어 갈 수도 없어 고민에 빠지고 혼란스러워 한다.
더 큰 장애물이 될 남자집안의 삐까번쩍한 배경도 또 한 몫 거들고 불거져 나온다.

보통의 로설에서는 이 부분에서 결혼 전후 시댁과의 치열한 심리전과 여주의 핍박받는 장면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용감무쌍한 나무는 하나하나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사랑하는 일을 버리면서까지 결혼이란 걸 해야 하나, 시집에 대한 충성을 강요당하면서 살아야 하나를 죽도록 고민한다.
모든 것이 시댁의 일로 귀결이 되고 여자의 몸은 후세를 품기 위한 그릇이 되고 남자의 뒷받침이 되어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리라.
거기에서 나무는 이 말을 쏟아내며 오열한다.
“제사 때 가서 좆나게 일하고 나면 그 다음은 뭔데? 애새끼를 위해서 담배를 끊으면 그 다음은 도대체 뭐가 있는 건데? 네 뒷바라지 위해서 내 그림을 취미로 하는 거?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뒤돌아보면 난 네 집안 똥구멍 닦아주는 휴지가 되어 있겠지”
이쯤에서는 나도 더 이상 나무의 말에 콧방귀 뀌며 같잖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더라.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하고 한 번쯤은 이것 비슷하게라도 고함질러 버리고 싶었던 기억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완전히 또 그 말에 박수 쳐 주지는 못하겠더라.
착실하게 집안일하고 아이들 거두고 나름대로 보람과 희망을 가지면서 주부의 길을 걸어가는 많은 이들은 그럼 바보라서 그리 한단 말이냐.
나의 꿈도 이상도 중요하고 내 자리도 중요하지만 그 내 자리가 가정이라는 울타리보다 더 무게감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
슈퍼우먼이 아닌 이상 두 개 이상을 동시에 제대로 공유하기란 말처럼 쉽지가 않은 것이고 많은 이들이 삶에 헐떡이면서 힘들게 유지하고 있다.
사람마다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일을 택하느냐, 가정을 택하느냐의 선택 또한 다르다.

나무는 여기에서 일도 가정도 원하고 또 선택하지만 시댁이라는 존재는 아직도 버겁고 껄끄러운 것이라 그냥 내던져 버린다. 진혁과의 사이에서 쌍둥이를 낳고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남자와 동거는 하되 결혼은 해 주지 않는다.
진혁의 월급으로 생활비를 하고 사람도 쓰지만 자신의 돈은 차곡차곡 유학자금으로 모은다.
귀여운 쌍둥이의 재롱도, 멋진 남자도, 그리고 자신의 일을 다 가지면서도 귀찮기만 한 시댁이라는 존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꿈같은 일상을 즐기고 있다.

이쯤이면 신종 대리만족, 신종 신데렐라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결혼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듯한 이야기들이 많은 것에 이런 류의 글은 또 다른 흐름을 만들지 않을까 싶다.
실질적인 문제로 떠오르는 동거에 대한 문제들...
나와 나의 가족만 존재하고 그 이외의 얽힘에 대해서는 딱 귀찮아하고 눈 돌리기조차 싫어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자유로운 성생활을 위한 동거.
앞으로 이런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현실적인 글도 많아질 것이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 보다는 글이 순조롭게 재미있게 쓰여 진 것 같았다.
다만 눈에 거슬리는 것은, 나무의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있는데도 초장부터 쏟아지는 하염없는 징한 욕들의 난무함이었다.

술과 도박에 절어 사는 아버지라는 이에 의해 살 떨리는 기억을 가진 이들이 어디 한 둘인가. 생활의 처절함을 겪어 본 이들이 어디 한 둘인가.
그런다고 그 자식들이 하나같이 이런 욕들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럼에도 나무는 철천지원수에게도 하기 힘들 욕들을 주구장창 해댄다.
더군다나 여기 한국 땅에서.
“미친 새끼, 그 나이 처먹어도 그 지랄이니, 원.”
“미친 놈, 웃기지도 않아,,... 난 나고, 그 새끼는 그 새끼야. 신경 꺼”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인간은 새대가리야.”
"감옥에 가서 뒈지라 그래!"
거참, 헛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욕들이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그 자식?의 아가리에 피 땀흘려 모은 자기의 전세금을 쳐?넣어준다.

살 곳이 없어진 나무가 진혁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지만, 그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또 나무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해도 되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는 욕들을 너무나 많이 쓰고 있다.
그런다고 끝까지 저런 욕들을 계속 지껄이느냐? 그건 또 아니다.
그녀 안의 저 깊은 곳 어딘가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 했음을 나무는 각성하듯 인정하고,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남의 입에서 아버지에 대한 욕은 또 듣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당연한 거다.
그런데 왜 그리도 쓰잘 데 없는 심한 욕들을 흩뿌려 놓았을까. 욕도 어느 정도껏 해야 봐 줄만 하다.

별달리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한 것이 있더라.
그녀의 이름은 나무이다. 사람들이 나무라 부른다.
성은 나씨이다. 그럼? 이름은 외자 ‘무’?, 아님 나나무?
또 한 가지, 소리 지르는 대목에서는 꼭 하나같이 이상한 소리를 지른다.
이렇게 - “너야말로 왜 그러는 거야야야야야?”
원래 말 하려면 “ 왜 그러는 거야아아아아?” 이래야 하지 않나?
어떻게 야야야거리면서 소리를 지른다니.

아무튼 책을 읽으면서 글이 가지는 힘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애초에 가졌던 기분 나쁨이 점차 읽어 들어가면서 동조가 되게끔 이야기를 끌어 나가고
‘뭐 이래? 이런 말도 안되는...’ 이런 말들도 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게 만들었다.
터무니없어 보이면서도 나름대로 풀어 나가는 솜씨가 있어 보였다.
내 말에 대해서 이모씨는 또 입을 삐죽거릴 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선입견과 또 달랐음을 말한다.
내가 글을 보는 지식이 없어놔서 작가들이 보는 시각과 어찌 다를까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여기에 끄적여 본다.



'코코' 고민 중이었습니다. 저도 뒷카피가 몹시도 마음에 안들어서 영 읽혀지지가 않았거든요(전 제 엄마 때문이었죠-_-). 이놈의 선입견을 버리고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2004-01-12 X

릴리 요전 수룡님의 '그림자의 사랑'에서도 느낀거지만 이 작가님은 아무래도 페미니즘적인 성향이 강한 분인가 봅니다. 아이들이 꽤 컸는데도 결혼을 안 한걸 보고 '에잉, 뭐 이래'했던 기억이...(나무만큼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해서? 결혼이 해피엔딩이라고 굳게 믿고있기 때문에?) 전 절대 페미니스트는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언제 여성인권을 부르짖어야 하는지 구분을 못한다는..) 2004-01-12 X

수룡 이책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음. 이 작가가 로맨스계의 진화론이 될지, 아니면 '외적인 것'으로 정립될지 좀더 두고봐야할 듯... 2004-01-12 X

라니 나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타입이라서 나무의 생각에 공감했습니다. 로맨스를 읽으면서 늘 찜찜하게 남아있던 부분이 바로 결혼과 그 후의 이야기였거든요. 마냥 행복한 현모양처로 귀결되는 보수적인 결말을 보면 과연 환상이구나 웃게 되지요. ^^  2004-01-12 X

김선하 보스적인 결말 이라뇨? 인간의삶인것을....아닐까요? 사랑한다면 <포기>도할줄 아는 거지요.저는그렇게 생각 합니다. 2004-01-13 X

정크 작가가 인물을 통해 어떤 화두를 던질 때는, 꼭 그 인물이 하는 행동이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설정하고 전개하는 건 아니겠죠. 다만 이럴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의 삶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쓰신 글이 아닐까 합니다. 라니님 말씀대로 결혼이 '나'를 포기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면 '나무' 같은 방식의 삶을 지지할 수 있고, 선하님처럼 사랑하기에 포기할 줄 아는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또 그건 그대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2004-01-13 X

정크 작가가 보여주려 한 건 '이런 건 어때?'지, '이런 게 옳아!'는 아닐 테지요. 다만 저 자신은 라니님과 선하님의 딱 중립선상에 위치해 있는 거 같아요. 예전엔 라니님에 좀 더 가까웠습니다만; 자신의 일부분을 포기한다고 해서 페미니즘에 거리를 두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포기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을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2004-01-13 X

정크 '제도'와 '책임'의 틀에 구속됨으로써 또 다른 나를 찾으면서 한 걸음 성장해 가는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나'를 잃을 게 두려워서 거부하는 것도 '나'를 찾는 한 방식이겠지만, 정면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인 채 한 걸음 물러섰다 두 걸음 나아가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찾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의 묘미 아닐까, 외람되지만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2004-01-13 X

'코코' (댓글이 많이 달리니 더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2004-01-13 X

yoony 역시..라는 말이. 정크님의 나를 찾는 한 방식..공감합니다. 2004-01-13 X

청 yoony님. 다음 리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2004-01-14 X

릴리 저도 기대합니다. 유니님^^ 정크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제가 그동안 글에 굶주린 나머지 생각없이 읽고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릴때처럼 책을 읽은 후에는 독후감을 한번 써봐야겠습니다. 그러다보면 저도 유니님외의 여러분처럼 멋진 리뷰를 쓸수있는 날이 오겠죠? 2004-01-14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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