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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수잔 엘리자베스 필립스(Susan Elizabeth Phillips)
출판사/현대문화센타

나쁜 남자, 로렌조 게이지. 그래서인가? 그는 할리우드에서 악역 전문배우로 이름을 날린다. 말할 나위도 없이, 둘의 만남은 예사롭지 않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하길 바라는 착한 여인이 살인을 일삼는 나쁜 남자(비록 스크린 상이지만)에게 빠져들면 어떤 일이 생길까? - <나에게 사랑은 있다> 뒷갈피에서 발췌
2002년 작이며 원제는 "Breathing Room"
수잔 엘리자베스 필립스-일명 SEP의 소설을 꽤 좋아한다. <그들만의 축제>라던가 <베레디스의 향기>는 그녀의 출간작 중에 내가 최고로 손꼽는 작품들이다. 독특한 캐릭터, 독특한 상황설정, 그리고 독특한 배경 등은 그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 나름의 환상이 꽉꽉 채워지는 느낌이다.
이번 작은 참으로 오랜만에 접한 SEP의 소설이라 꽤 기대를 갖고 읽었다. 솔직히 기대를 갖게 된 이유로는 그놈의 꿈 시리즈를 벗어난 작품이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난 그 꿈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꿈의 호수> <꿈의 화원> <꿈의 낙원> 등등등은 <그들만의 축제>의 주인공이 경영하는 풋볼 팀원들을 주축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정말 한숨을 나오게 할 정도로 재미없었다.
작품들을 따로따로 보자면 재미있을 법도 하다. 문제는 캐릭터가 다들 비슷하다는데 있다. 외형이야 물론 다르겠지만 각 시리즈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순수하고 착한 이성적인 여주인공이며 나쁜 남자로 대변되는 매력덩이의 남주인공이다. 게다가 풀어나가는 갈등과 오해 마저도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한 권을 읽고 나서는 괜찮았지만 시리즈를 모두 읽었을 때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리 말하건데, 시리즈를 싫어한다. 시리즈도 각각의 개성을 갖고 있는 작품이 있을 법도 하겠다. 그러나 로맨스 소설 중에서 그런 개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아직 보기 힘들었다. 요즘 들어 나오는 할리퀸 시리즈 중에 하나 괜찮은 걸 발견하기는 했지만 이것도 각 시리즈마다 작가가 달라서 그런지 몇 개는 재미있지만 몇 개는 영 아니었다.
대부분의 시리즈는 남자들이 친구나 형제였던가 아니면 여자들이 자매나 친척이나 친구라던가 혹은 집안 전체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시리즈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비슷비슷하다. 각기 나름의 개성을 소유할만도 한데-조연으로 있을 때는 개성이 있다. 그런데 막상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몰개성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연으로 등장해서 이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좋겠다 싶다가도 그 사람이 막상 주연으로 등장하면 앞권이나 뒷권이나 등장 인물이 비슷해져 버리니 말이다. 차라리 조연이었을 때의 매력을 간직하고 그대로 미련을 접어버렸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SEP는 한동안 나에게 있어 몰개성적인 꿈 시리즈 작들을 대거 선보였었나, 이번 작은 드디어 꿈 시리즈를 탈피한 작품이라 자못 기대해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결과는?
...실망이다.
아쉽다. 참으로 좋은 소재이고 배경이고 한데도 주인공들은 어떻게 그 꿈 시리즈를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예상하건데 이건 아마도 작가가 아직까지 그 시리즈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는 아닐까 싶다.
뒷갈피를 잠시 살펴보면 "이탈리아 토스카나로의 여행. 글감을 찾으려고 떠난 길은 아니었다. <꿈의 호수>를 끝낸 직후였기 때문에 창조적인 휴식이 절실했던 때였으니까."라는 말이 적혀있다. 휴식이 아직 더 필요했던 걸까(인신공격이다-_-;;;)? 꿈시리즈에 나왔던 인물 설정이 고스란히 <나에게 사랑은 있다>에 묻어나온다.
여주인공 이자벨 페이버. 남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삶을 살며, 조언과 타인을 위한 사랑에 함빡 길들여 있는 여자. 그럼에도 성적 자격지심에 빠져 어떤 남자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이 상처를 달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한 여자다. 물론 재정적으로도 파산 위기에 직면했기에 휴식을 취할 필요도 있긴 했지만 스토리 상으로 이건 부차적으로 느껴지고.
남주인공 로렌조 게이지(랜). 악역 전문이며 실제로 자신은 참 나쁜 놈이란 생각을 갖고 있는 남자. 마약을 탐닉하다가 죽은 칼리란 여배우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회의가 느껴져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 실제로는 엄청 마음 약하고 사랑에 목마른 스타일이면서도 끝까지 자긴 나쁜 남자라 이자벨에게 모자르다 중얼거리고 있다.
비록 배경과 생활 환경, 그리고 직업은 다르더라도 SEP의 전작을 살펴보면 이런 스타일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나와 옥신각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점에 있어 초기에 번역되었던 <그들만의 축제>가 훨씬 인상적이었다. 여기서도 주인공 피비는 겉으로 나쁜 소문에 휩싸여있지만 본래 착한 여자이며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길 좋아하고, 성적으로 위축된 삶을 살아온 여자였다. 솔직히 피비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개연성이 있다. 어려서 강간을 당했고, 피해자긴 커녕 엄한 사람을 모략했다는 질타를 받아 도망치듯 집을 떠나버렸으니 성행위에 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는 건 딱히 공감이 되었었다. 하지만 이자벨은 좀...아니었다.
또한 <나에게 사랑은 있다>에서 더욱 실망스러웠던 게 갈등을 해결함에 있어서도 두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부딛치는 것이 아닌, 신비주의 사상에 입각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비주의에 철저히 물들은 작가로는 제인 앤 크렌츠를 들 수 있겠다. 이 작가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바이나, 그 동양 판타지적인 사상만은 제발 사양하고 싶었다. 게다가 실제로 동양에서 살고 있는 나로써는 내 주위가 그런 신비주의로 물들어 있지 않음을 실감하고 있는 터에 제인이 그리는 세상은 어딘가 동떨어진 낯선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제인은 대부분 남자주인공에게 이런 신비주의 제복을 입히길 좋아하는 듯 한데 제복만 그럴싸할 뿐 자주 반복되니 식상하더라.
SEP의 이번 작품도 약간의 신비주의 사상을 접목시키고 있다. 로렌조가 떠나자 홀로남아 화를 주체하지 못했던 이자벨은 약간의 정신착란 증세를 보여 로렌조 말로는 '도플갱어'를 일으키고 말았다. 로렌조는 멀리 떠나서도 로맨스 소설 남주인공 답게 그녀를 그리며 애를 태우던 중, 그의 고향 사람들이 목이 빠지게 찾고 있던 조각상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축제에 다시 나타난다. 그때 이자벨의 도플갱어가 그의 눈앞에서 질투심을 조성하던 중 이자벨은 마침내 화를 폭발해 조각상을 들고 도망친다. 머리 속에서 어서 그걸 들고 "끌어안아라"라고 외치는 목소리에 굴복하고 만 이자벨. 그를 뒤쫓는 로렌조.
이자벨은 마세라티란 높은 고지에 올라 조각상을 부셔버리려고 하지만 쫓아온 로렌조가 말리기도 전에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혼돈 속에서 그들은 사랑을 나누고 그래서 결국 해피엔딩으로 이룬다는...약간은 정신없는 갈등 해소 과정을 거친단 말이다.
여기서 딱히 설명하기가 힘든 것이 그 장면이 진짜 신비롭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SEP가 이탈리아 지방으로 가서 신비함을 체험한 것은 알겠는데 그걸 작품에서 갈등 해소의 중요 포인트로 잡았던 건 좀 아니었다 싶다. 물론 주요 갈등 해소 장면은 철장안에서의 대화이지만, 그래도 마세라티에서의 장면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기에 내게 더 강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강함이 그저 강함일 뿐 공감되지 않아 씁쓸한 거였다.
그리고 주연과 더불어 등장하는 조연들. 그들의 이야기가 이자벨의 활약상을 단번에 보여주는 장치긴 하지만 정작 이자벨과 로렌조의 사랑이 무르익는 과정을 생략하게 하고만 것 같아서 아쉬웠다. 차라리 이자벨의 시각이나 로렌조의 시각에서만 그들을 조명했더라면 분량은 적더라도 더욱 깔끔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다.
온통 아쉬움만을 이야기한 것 같은데, 꿈 시리즈를 좋아했고 SEP 작가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본다. 나도 위의 몇 가지가 걸려서 그렇지 진짜 재미없다고 느낀 건 아니니까. 그러니 실망이지 대단한 실망이라 말하지 않았던 거다.
한 가지 만족스러운 거. 판형. 그동안 현대문화센타에 불만을 가졌던 게 그 변치 않는 판형이었는데 이번에는 근사한 판형을 들고 나타났다. 원서-일명 페이퍼북 스타일인데 페이퍼북보다는 조금 크고 재질도 좋다. 개인적으로 페이퍼북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이번 <나에게 사랑은 있다>와 코닉 브록웨이의 <사랑과 미움이 머물 때>의 판형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린다 하워드의 <미스터 퍼펙트>도 이런 판형으로 나왔을 텐데 말이다. 쩝.
Junk 작가 개인의 취향에 따른 남주와 여주의 정형성. 이거 하나만 타파해도 작가는 성장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더군요. 어떤 작가든 그 특유의 고정된 패턴은 좀처럼 버리기 힘든 것 같아요. 2003-10-27 X
다비 정확하게는 페이퍼백(paperback)이 맞는 표현입니다. 종이 표지, 보급판형을 일컬어 페이퍼백이라고 한대요.^^ 2003-11-09 X
다비 난 대표적으로 꿈 시리즈를 좋아한 사람이얌..^^ 사랑스러운 녀석들..;;이탈리아 사람이 정말 그렇게 잘 생긴 거야?ㅠㅠ 2003-11-09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