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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로맨스] 내 마음을 열어 줘  

번호 : 29     /    작성일 : 2003-09-28 [02:29]

작성자 : '코코'    


지은이/린제이 샌즈
출판사/큰나무



2002년 작이며 원제는 "The Key"

때는 1395년 6월, 장소는 스코틀랜드의 던바 성. 일리아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결혼한 셈이나 따뜻한 사람들 속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남편이란 작자가 좀 더러워서 그렇지, 또 성격이 좀 못되먹어 보여 무서워서 그렇지, 또 정조대를 매번 찼다 풀렀다해야 해서 그렇지...뭐 그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결혼 생활은 생각했던 것 보다는 괜찮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던바성에 도착했을 땐 얼마나 혼비백산을 했던지. 더러운 바닥에 더러운 벽들, 게다가 홀에 있는 큰 식탁과 의자들은 오물이 묻어 귀한 옷가지를 버리게 만들었다. 침실은 어떻고. 먼지와 진드기, 땟국물이 가득한 그곳이 침대라니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싶었지만, 어머니를 위해 부득불 결혼은 해야했다. 좋다, 다 좋다. 하지만 냄새나는 남자와 첫날밤을 치를 생각은 절대 없다! 눈감고 아웅식으로 대충 치뤄진 결혼식이더라도 그 남자는 앞으로 살을 섞고 살아갈 내 남편. 목욕을 일 년에 두 번 겨우하는 버릇을 고치기 전까지는 절대 침대에 발을 드려놓지 않을 생각이다. 결심은 확고했다. 그런데 이 남자와의 키스는 왜이리도 달콤한 걸까?


대략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저렇다. 린제이 샌즈란 작가는 처음 접했다. 어려서 글쓰기를 좋아했고, 심리학을 전공했고, 로맨스를 좋아하며 공포물도 즐겨 본다라. 제법 그럴싸하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은 딱히 마음에 와닿는 점이 없는지 모르겠다.

스코틀랜드라고 하면 더럽고, 우락부락하고, 원시적으고, 야만적인...어슴프레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이런 편견은 아마도 외국 로맨스 소설에 자주 나왔던 설명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대부분 남주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는 당연히 더럽고 지저분하며 미개해야만 하고, 이에 반해 여주의 고향인 잉글랜드는 청결하고 깨끗하며 세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청결한 곳에서 살다가 온 여주가 더러운 곳에서 사는 남자와 티격대격하는 맛이 있다. 또한 더럽기는 해도 그곳은 정신이 올바로 박힌 이들이 사는 곳이라 위험에 처한 연약한 여주를 돌봐주고 감싸주며 여자로써 억압받기만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주장도 과감히 펼칠 줄 아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자립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을 열어줘>와 비슷한 시대에 펼쳐지는 외국 로맨스 소설은 하나 같이 위의 전개 방식을 따르고 있다. 지금 당장 생각해봐도 줄리 가우드의 <아름다운 언약>, <또 다른 사랑의 이름> 등이 떠오른다. 줄리 가우드 외에도 스코틀랜드의 건장한 전사를 동경하는 외국 로맨스 소설 작가들이라면 한번 정도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대한 편협적인 시각 차이를 종종 보여주고는 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타국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갔다.

또한 허리우드식 해피엔딩이라던가 백인우월주의식 영웅주의 라던가처럼, 여주는 언제나 고결하고 한떨기 꽃잎 같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주인 잉글랜드 인이다, 항상. 이러한 여주가 미개한 남주 및 그의 고향 사람들인 스코틀랜드 인을 교화시키는 과정이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둘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만큼이나 이는 매우 중요하다). 사실 국내 로맨스 소설에도 우리 나라 여주가 백인 남주를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게 많으니 어찌 보면 이것도 각 나라의 특성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젠 식상하단 말이다.

식상하다.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내 마음을 열어줘>는 전체적으로 재미있었다. 술술 읽혔고 막힘없이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런데도 예전 이런 이야기를 읽었던 것처럼 환상이 풀풀 묻어나기는커녕 그저 그런 느낌 뿐이다.

우리에게도 반드시 지켜야할 로맨스적 정석이 있는 것처럼 그네들에게도 반드시 지켜야할 로맨스적 정석이 있는 것일까? 특히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할 때는 더욱 그런 것인가? 남주는 언제나 스코틀랜드 인이며 속정은 깊으나 외모적으로는 더러운, 여주는 언제나 잉글랜드 인이며 세련되고 신문물에 익숙한 그래서 스코틀랜드 인들의 의식 문화를 발전시키는 인물로만 나와야 하는 것인가? 도대체 왜!

이제 그만하자. 정말 식상하다. 더 재미있었을 지도 모를 글이, 흔한 패턴을 고스란히 따르느라, 남녀간의 심리를 정확히 짚지 못하고 적당히 넘어간 터라, 정작 중요한 것은 뒷전으로 미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클라이막스 등이 참으로 애석하고 애석할 따름이었다.

뭐 그래도 아직까지는 기대할만한 작가라 하겠다. 오랜만에 읽은 번역 로맨스 소설 중에서 최근작치고는 꽤 재미있게 읽혔으니 말이다. 아직 못 읽어본 분들은 한번 정도 읽어봄직한 번역 로맨스 소설이라 추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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