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7.




“언니! 언니!”


현우가 계산을 마치고 나가자마자 윤지가 호들갑을 떨며 진하가 있는 주방으로 뛰어왔다. 창 너머로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엔도르핀이 샘솟는다는 남자와 직접 얼굴을 맞대고 쉴 새 없이 재잘거렸으니 감동이 제대로 샘솟는 모양이다.


“테이블부터 치우고 얘기해.”


식사하는 내내 현우의 옆에 바싹 붙어 서서 연방 웃음을 터뜨리는 윤지의 푼수 빠진 행동거지에 안 그래도 심기 불편해 하고 있는 마당에 감상까지 들어달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소리였다.


“언니, 지금 테이블이 문제가 아니에요.”


진하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흥분하는 윤지를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영양가 없는 수다 떠는 것보다는 큰 문제라고 보는데.”


윤지가 재미없게 구는 진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놀이터 사장님이 언니한테 마음이 있다니까요!”
밑도 끝도 없는 황당한 발언에 진하가 맹한 표정으로 윤지를 쳐다보았다.


“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자기 의기양양해진 윤지가 진하의 앞에 턱하니 서서 인심 쓴다는 표정으로 얘기를 시작하였다.


“놀이터 사장님이 언니한테 마음이 있다고요.”


“도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아니에요. 그 분, 언니한테 푹 빠졌더라고요. 어쩐지, 거의 2주간을 왕래도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찾아와서 값비싼 스테이크를 시켜 먹었을 때부터 좀 수상하다고 했어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에 진하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그녀가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에 어쨌거나 손님에게 결례를 범하게 된 셈이니 현우가 최소한의 경우가 있는 사람이라면 미안하다는 감정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없이 얼렁뚱땅 없던 일로 만들려는 얍삽한 행동이 어제 두 사람 사이의 일을 모르는 윤지에게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만든 것이다. 윤지에게는 시내 놀이터에 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소심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인까지 안 시킨 걸 보면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닌가 보네.”


적당히 농담으로 넘기려는 진하가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윤지가 정색을 하며 따지고 들었다.


“아이고, 이 언니야. 내가 지금 스테이크 사 먹은 것만 갖고 이래요? 언니, 제가 이래봬도 학창시절 내내 연애로 잔뼈가 굵은 여자라고요. 띄엄띄엄 보지 마세요. 놀이터 사장님이 나한테 은근슬쩍, 계속 언니에 대해서 물었다니까요. 완전 관심 작살이었다구요.”


“나에 대해서? 뭘?”


진하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다그치듯 물었다. 세상에, 어제 대답해주지 않고 넘어간 질문 때문에 온 것이라 생각하니 머리통이 뜨끈해졌다. 자기가 팔래스 주인도 아니고, 도대체 남의 가게 상호에 대해서 뭘 그렇게 궁금해 하고 캐내려는 것인지.


“어휴, 말도 마세요. 처음엔 정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 같더니, 가만 보니까 언니가 이 집에 사는지, 그게 궁금했던 거더라고요. 무슨 말을 하든지, 결론은 언니로 끝나요.”


“그 사람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우리 가게 상호에 팔래스 들어간 것 때문에 그래.”


진하가 놀이터가 있는 맞은편 쪽을 향해 표독한 눈빛을 쏘아 보내자 기대와 전혀 다른 반응에 윤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가게 상호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윤지 앞에서 센 척은 다 해놓고 휴무 날을 잡아서 시내 놀이터로 정탐 갔다는 얘기를 털어놓으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지만 자존심이 지키려고 침묵하고 있다가는 현우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기정사실화 해놓고 계속해서 설레발을 쳐댈 것이다.


“사실은 어제 시내에 영화 보러 나갔다가 어디 조용한 데서 차나 한 잔 마실까, 하고 걷는데 놀이터 간판이 딱 보이는 거야. 여기가 거긴가 싶어서, 딱 멈춰 섰는데, 누가 등 뒤에서 아는 척을 하더라고.”


살짝 각색을 해 가며 어제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있는데 미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윤지가 입을 떡 벌리며 괴성을 질렀다.


“그게 사장님이었어! 휴무를 맞아서, 완전 드라마를 찍으셨네요.”


이거야 말로, 물이 아니라 기름을 부은 격이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 하여간에 그래서, 놀이터에 들어가게 됐는데.”


“엄마야, 언니 성격에 제 발로 들어갔을 리는 없고, 사장님이 들어가자고 했구나. 웬일이야. 언니 당황했겠어요.”


윤지가 주방 카운터를 팡팡 내리치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끝까지 들어보라고, 분명하게 말을 했는데도 그새를 못 참고 불쑥 끼어들어 자기 입맛대로 각색을 하고 있다. 진하는 주방 카운터를 팡팡 내리치며 자지러지게 웃는 윤지를 짜증스럽게 쳐다보며, 웃음소리가 멎기를 기다렸다.


“그래서요, 언니?”
다음 얘기를 재촉하는 윤지를 향해 날카롭게 일갈하였다.


“중간에 끼어들면 뒷얘기는 없어.”


“알았어요, 알았어. 얼른 얘기 해 보세요.”


눈을 반짝이며 당치도 않은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윤지를 착각의 늪에서 꺼내기 위해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


“좌우지간 얼떨결에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이게 참 난감하더라고. 솔직히 당사자 앞에 두고 함부로 남의 가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판단을 했다는 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기는 하잖아. 그 판단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거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사과나 하자, 싶어서 사과도 하고 나름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풀어나가고 있었거든. 그런데 이 남자 꿍꿍이속은 다른 데 있더라고. 처음부터 나를 가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이유가 거기 있었던 거지.”


“뭔데요?”
“아니, 도대체 팔래스하고 자기가 무슨 상관이라고, 우리 집 상호에 왜 팔래스를 넣었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더라니까.”


잔뜩 기대하며 바라보던 윤지가 기막힌 표정으로 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어휴, 언니. 그거야 언니하고 대화를 풀어나가려고 그런 거죠. 놀이터 사장님처럼 잘생긴 사람들이 의외로 대화 풀어나가는 재주는 없는 경우가 제법 있어요. 왜냐! 자기가 먼저 여자한테 접근할 필요가 없거든요. 가만있어도 여자들이 먼저 말 걸어주고 호감 표시하니까. 그런데 언니한테는 본인이 스스로 나서서 이야기 화제를 끄집어내야 하니 서투른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단순히 대화를 하자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결론을 내리기엔 그 남자가 물어보는 수준이 아주 집요했다니까. 그냥 별 뜻 없다고, 그냥 지은 거라고 대답 했더니, 가게 상호를 그냥 짓는 사람은 없다고 무슨 범인 취조하듯이 몰아세우더라니까. 내가 진짜 기가 막혀서.”


어제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진하를 쳐다보며 윤지가 박장대소를 하였다.


“맞는 말이네요. 가게 상호를 그냥 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와, 우리 놀이터 사장님, 성격이 참 분명하시네. 완전 내 스타일이야.”


이 척박한 상황에서도 찬양 거리를 찾아내다니!


“그게 성격이 분명한 거니. 경우가 없는 거지.”


“언니 참 희한하네요.”


윤지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진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뭐가?


“아니,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아저씨도 아니고, 놀이터 사장님이, 저렇게 잘 생긴 남자가 언니하고 마주보고 앉아서, 가게 상호에 관심 가지고 물어봤다고 불쾌한 기분이 들어요? 그건 그저 언니한테 관심이 있단 말이잖아요.”


계속 다른 말을 하고 있는 윤지가 답답해서, 진하의 목소리에 슬슬 짜증이 배기 시작했다.


“아이고, 진짜! 답답하네. 그게 아니라니까. 범인 취조하는 수사관처럼 마구 몰아붙이면서,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거냐고 캐물었다니까.”


“수사관은 무슨. 사장님이 뭐 때문에 언니를 몰아세워요.”


“그 남자는 지금 내가 팔래스라는 상호를 함부로 도용했다고, 팔래스 문 닫자마자 잽싸게 가로챘다고 비난하는 거라니까.”


답답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던 윤지가 정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언니,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요. 언니가 팔래스란 호칭을 도용을 했든, 가로챘든 놀이터 사장님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거 캐낸다고 돈이 나와요, 술이 나와요? 그건 그렇게 받아들이는 언니가 이상한 거라니까요? 놀이터 사장님은 그냥 상호가 아니라 언니에 대해서 궁금한 거라고요. 수사관처럼 몰아붙였다는 거, 바로 그게 언니의 착각이라니까.”


설득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설득을 당하게 될 판이다. 윤지의 얘기가 제법 그럴싸하게 들려,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네가 그 상황을 봤으면 이런 말 못 한다.”


혹시라도 당황한 기색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찬찬히 바라보고 있던 윤지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언니의 바로 이런 점이 놀이터 사장님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나한테 이러는 여잔 네가 처음이야, 이런 거 말이에요.”


터무니없는 소리에 진하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너 지금 인터넷 소설 쓰니? 너 그럼 놀이터로 가서 그 남자 뺨 한 대 치고 와. 홀딱 반하게.”


자칭 연애 고수라는 윤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진하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언니, 내 말 잘 들어요.”


갑자기 눈에 이글이글 정열을 한 가득 담고 달려드는 윤지의 거센 기세에 진하는 저도 모르게 주춤 거려졌다.


“갑자기 왜 이래?”
“무조건 붙잡아요.”


“뭘?”


“놀이터 사장님! 저런 남자 언니 인생에 다신 없어요. 아니, 다음 생에도 만나기 힘들어요. 놓치고 난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다가올 때 붙잡으란 말이에요.”


진하가 붙잡힌 손을 거세게 흔들어 뿌리쳤다.


“턱도 없는 소리 그만 하고, 테이블이나 마저 치워.”


“아이참. 언니. 내 말 명심하라니까요. 나, 언니 아니었으면 놀이터 사장님이 언니한테 관심 갖든 말든 얘기 안 해줘요. 나 혼자 알고 꾹 씹어 삼키고 말지. 내 맘에 드는 남자랑 다른 여자 연결해주는 짓은 안 한단 말이에요. 아셨어요?”


“아이구, 퍽이나 고맙다.”


“고마운지 알면 제가 말 한 대로 좀 따라요.”


“그래서 연애 전문가 최윤지 씨의 조언은 뭡니까?”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윤지가 전문가 같은 포즈로 검지를 곧추세웠다.


“모른 척 해요! 놀이터 사장님이 언니를 좋아한다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여도 지금처럼 쭉, 모른 척 하면서, 적당히 예의바르게 대해요. 그렇다고 적대적으로 피하진 말고요. 아셨죠?”


잠자코 얘기를 듣던 진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상황을 종료시켰다.


“테이블 안 치워!”


퇴근을 하고 방 안에 앉아 있는데, 윤지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놀이터 사장님이 언니한테 마음이 있다니까요!


진하는 창가에 팔을 대고 앉아서 불이 환하게 밝혀진 놀이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는 무조건 반박부터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찬찬히 생각을 해보니까 윤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가게 상호에 대해서 묻는 현우의 태도에 다소 무례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어떤 숨은 의도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것은 아무래도 과민 반응이었다. 팔래스라는 상호는 그녀 자신에게나 중요한 의미이고, 다짐이지 그것을 전혀 모르는 제 3자에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일 뿐이다. 현우의 태도가 범인 취조하듯 집요했다는 것도 어쩌면 대답하기 곤란하니까 과잉되게 느낀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저 스치듯 인사나 하고 말아버릴 수도 있는데 굳이 가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음식을 대접하고, 뭔가 할 일이 있는 것도 미룬 채 마주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던 것은 오로지 호감에서 나온 행동


그렇다면, 윤지 말대로 그 남자가 정말로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한 번 그렇게 생각을 해버리니까, 현우의 모든 행동에 의심이 갔다. 스치듯 인사나 하고 보내면 될 텐데 굳이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가 음식을 대접하고, 뭔가 할 일이 있는 것도 미루어 두고 마주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또 오늘은 가게로 찾아오기까지 했다.


현우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괜스레 웃음이 났다. 뭐랄까, 내게도 뭔가 근사한 매력이 있나 보다 하는 뿌듯함과 고작 그런 것 가지고 이렇게 설레어하나, 싶은 한심한 감정이 절반쯤 뒤섞인 간지러운 기분.


팔래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와 언젠가는 저 자리를 차지해야지, 하는 여자와 연애라. 이건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만 황당한 웃음이 픽 터졌다.


미쳤다. 사춘기 여고생도 아니고 이제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게 웬 말도 안 되는 오버야.


내일이면 깨어날 민망한 개꿈일지라도, 낯선 남자, 그것도 만인의 눈에 근사하게 보이는 남자의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상상이 진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방이 캄캄한 한밤중에 이토록 행복한 기분에 젖어 해실거리는 것이 진하에게는 결코 흔한 경험이 아니었다.


댓글 '2'

윤소영

2011.02.14 18:31:22

현우의 이상한 오해로 나중에 진하가 상처받게되지는 않을까요??

편애

2011.02.14 18:34:54

리앙님, 재밌게 잘 보고 있어요^^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65 루아흐-7.끝 secret [2] 편애 2011-05-13
264 루아흐-5.6 secret [1] 편애 2011-05-13
263 루아흐-3.4 secret [1] 편애 2011-05-12
262 루아흐-0.1.2 secret [3] 편애 2011-05-11
261 러브 페널티 : 벌칙 2. Glasses [15] Junk 2011-05-11
260 러브 페널티 : 벌칙 1. Birthday [23] Junk 2011-05-05
259 당분간 연재 중단 합니다. [4] Lian 2011-03-06
258 맛있는 계승 <8> [6] Lian 2011-02-20
» 맛있는 계승 <7> [2] Lian 2011-02-13
256 맛있는 계승 <6> [3] Lian 2011-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