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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SS501 세미누드’를 목격하다

학창시절에도 연예인을 별로 좋아해본 일이 없는데 그건 매력적인 연예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절대로 나와 사귀어줄 일 없는 사람에게 온 마음을 바치기에는 너무 이기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부모에게는 그렇게 하느냐, 철없는 짓이다, 정신이 있냐 없냐, 빠순이 혹은 빠돌이라고 욕먹기 참 쉬운 사랑이지만 그래도 사랑은 사랑, 사랑은 죄다 가엾고 사랑스럽다. 단 한 점도 되돌려 받을 것을 생각지 않고 사랑하는 그 마음, 그것이야말로 정말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감탄하곤 했지만 나는 그런 순수한 사랑을 하기에는 사심이 너무 많았다.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사랑받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받는 입장의 사람들은 과연 외모나 재능 말고도 자신들이 얼마나 특별한 것을 받았는지 과연 알고 있을까.


나 SS501봤다!고 어디 자랑할 데 없나?
 
 
요즘 일이 있어서 한두 주에 한 번씩 방송국에 가는데 그때마다 정문 앞에 항상 그런 열렬한 사랑을 하는 소녀들이 서 있었다. 경비원들에게 제지당해 방송국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주차장 앞에서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서서 “××짱!”, 하고 나지막하게 외치고 있었다. 누구의 팬이기에 해도 져서 깜깜한데 이토록 애절한 눈빛으로 다리 아프게 내내 서 있을까, 싶었더니 의문은 금방 풀렸다. 내가 잠깐 라디오 방송을 하는 시각에 항상 맞은편 스튜디오에서 예쁘게 생긴 총각들이 왔다 갔다 하기에 작가 분들한테 저 사람들 누구에요? 연예인이에요? 하고 슬그머니 물었더니 어머, 더블에스도 모르세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SS501,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아까의 소녀들이 외치던 그 이름은 SS501 중에서도 가장 미소년의 이름이었던 것도 같았다. 문자라도 보내서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내 친구들은 이미 나이를 먹어서 SS501의 이름에 그다지 감동하지 않는 것이 못내 유감스러웠다. 안 그래도 인생에 자랑할 일 없어 죽겠는데.


“아니 저기 젊은 총각의 웃통이!”
 
그리하여 SS501의 실사판은 성인 여자의 일상에는 그다지 임팩트를 주지 않고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3월의 어느 날, 매일 늦다가 웬일로 스튜디오에 일찍 도착한 날이었다. 맞은편 스튜디오에서 문제의 SS501이 방송을 하고 있었다. 어라, 오늘은 다섯 명 중에 두 명밖에 없네… 하고 무심히 있는데 갑자기 그중 한 명이 티셔츠를 어깨 위까지 훌러덩 걷어 올리는 거였다. 소리가 안 들리니 무슨 상황인지 알 수는 없고 방송 중에 무슨 ‘등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등판이라지만 남의 총각 속살이 다 보이는 마당에 미혼 처자가 예의상이라도 아니 놀랄 수 없으므로 나도 모르게 “켁, 아니 저기 젊은 총각의 누드가!” 하는 소리를 냈지만 하필 이쪽 스튜디오 스태프들은 죄다 자기 일에 여념 없었고 출연 차례를 기다리던 나만 하릴없던 차라 졸지에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현진씨 헛거 본 거 아니에요? 아니, 정말 벗었는데… 아니 옷 걷었는데….


급기야 나중에는 나까지 헷갈렸다. 혹시 내가 마음속으로는 SS501을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헛걸 봤나? 아까 그건 내 환상인가? 방송을 마치고도 아리송해하면서 스튜디오를 나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아까 등판 걷어 올렸던 총각이 화장실에 다녀오고 있었다. 그는 모범적인 연예인으로서 방송국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하라고 교육받은 것이 틀림없는 듯,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고개로 가볍게 인사했다. 평소 같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같이 인사하고 말겠는데 좀전에 헛거 본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어서 내 자신이 꽤나 의심스러웠다. 혹시 그냥 바닥에 동전이나 금간 타일 같은 걸 본 걸 나한테 인사했다고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어쨌거나 어정쩡하게 마주 목례하고 나와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 나 더블에스 세미누드 봤다.
- …벗겼냐?
- 내가 그럴 재주가 어딨냐? 그들이 뭐가 아쉬워서.
- 그럼 그렇지. 난 또 니가 고소라도 당할까봐….


아이고 낯간지럽…지만 귀엽구나

어른이 되니까 어떤 것들은 참 시시했다. 열 살쯤 어렸다면 이 모든 건 밥도 못 먹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짝꿍이 지겨워할 정도로 했던 이야길 하고 또 하고, 인터넷 게시판에 후기를 올리고 수없이 질문 공세를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휴일에 빈둥대면서 텔레비전을 켜자 문제의 '더블에스’가 노래하고 있었다. 그래, 과연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 궁금하다! 그건 ‘unlock’이었다. 훤칠한 소년들이 몹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원한 길 위엔 너 엔젤, 날 기다릴 거니 엔젤. 내가 택한 삶에도 너 지젤, 날 사랑할 거니 지젤, 하고 노래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데굴데굴 구르며 웃고 말았다. 아이고 낯간지러워라!
 
그리고 구르는 걸 그만두고 일어나 앉아서 약간 씁쓸하게 생각했다. 아, 어느새 이런 게 낯간지러워 못 견디는 걸 보니 나는 정말로 어른이 되어버렸구나. 방송국 정문에서 끊임없이 사랑하는 오빠의 이름을 부르던 그 소녀는 오늘 밤도 수없이 돌려보는 영상 속 오빠들의 눈빛 하나하나에 가슴 떨릴 텐데. 허나 그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엔젤이고, 지젤일 수 있던 나에게 할당된 시간을 이미 다 써버렸으니까. 이루어질 수 없어서 더 씁쓸하고 한층 달콤한 꿈을 꿀 권리는 다른 지젤과 엔젤들에게 넘겨줘야 하니까. 음악성이 어떻고 얼굴만 반반하다며 아이돌 스타를 욕하는 시기도 지났고 그들을 사랑하는 소녀들을 골 비었다며 수군덕대는 시기도 지나고 그들이 죄다 귀엽게 느껴지는 때가 기어코 오고야 말았으니까. 지젤이고, 엔젤이고 싶은 소녀들이 한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밤이다. 이런 때는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기분도 그다지 씁쓸하지 않은 참 드문 순간이다.



너무 좋아하는 매거진t에서 이 기사를 본 순간 "아라"가 생각났지 뭐에요.ㅎㅎ
우리 철 없는 아라는 아직 어른이 아니었던가 봐요.
그나마 현과 러브라인(아우! 아직도 두근두근~)으로 어른이 되었지만...
저도 누군가의 팬질(심하게는 공식 팬클럽 서울지구 3조장;)을 했던 시절과
아직도 누군가를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이 있기에 남 얘기가 아닌 거지요.


누나팬 감상을 적어야지 하면서도 몸이 안 따라주는 대신에 리앙님께 보내는
마음이랍니다.

*첨부사진과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링크 걸었으니 가셔서 봐주세요.^^


매거진t - 김현진의 이상한 나라의 TV 


2007.04.17 05:42:42

저는 so님이 왜 라디오에 나오셨는지 더 궁금한데요? 아마 제가 늙어서 그런가요? 도대체 ss501 봤다는 말이 별로 감흥이 없는 것 보니...--;;;   [01][01][01]   [01][01][01]

핑키

2007.04.17 09:51:34

제가 그리 좋아하지 않다보니(특별히 잘 생긴 특정인물 1명 빼고는 키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말발도 그렇고^^::) 감흥이 생기지 않음을 용서하소서~ 만약 배용준이나 정우성 가수로는 차라리 동방신기나 배틀을 본다면 제가 순간 오빠를 외치지 않을까 싶어요. 소시적 놀아본 기질이 아직도 제 몸속에 살아 숨쉬니!!! 한때는 음악 프로그램 조명기사를 알아서 sbs로 놀러도 많이 가고 그랬는데, 친구가 그 남자랑 헤어지는 바람에 못가게 됐어요^^   [10][01][10]

리체

2007.04.17 10:46:51

김현진 씨 글 정말 재밌게 잘 쓰시죠.ㅎㅎ 동감합니다. 가끔 생각하건대..저는 이때 이만큼 열정적으로 빠순이 노릇을 해보질 못했어요. 지나고 나서 저도 가끔 빠순틱하게 빠지는 대상들이 있는데, 낯간지럽더라구요. 정말 다 때가 있더라는 말에 공감을...ㅠ

솔/ so님이 라디오에 나오신 게 아니라, 김현진이라는 필자의 경험담이라는 말씀 아닌가요;;;   [01][01][01]

2007.04.17 12:19:02

리체님, 저의 국어독해실력이 드러났군요 --;;; 저는 so님이 김현진님으로 착각을...(숨고 싶군요...)   [01][01][01]

Lian

2007.04.17 14:22:25

so/ 공식 팬클럽 서울 지구 3조장. <- 쓰러집니다. 으캬캬;;; 워낙 관심 영역이 넓으신 분이라 누군지 맞출 엄두조차 않나네요.
전 소심한 성격답게 누굴 좋아하든 TV에 전념할 뿐; -_- 입니다.
솔/ 에이, 그 정도 갖고 뭘 그러세요. 저도 컴퓨터로 글 읽으면 엉뚱한 해석 자주 하는 걸요.   [01][01][01]

so

2007.04.18 22:22:56

솔/ ㅎㅎㅎ 걱정마셔요. 저도 자주 그런답니다.
핑키/ 뭐, 그렇게 말 하자면 저도 더블 아해들은 취향이 아닌 관계로 그닥 두근 거리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그렇지 않을 어느 분이 생각나기에 올려 봤어요.^^
리체/ 어른이셨군요! 아님 쿨 한 여고생이시던가.ㅎㅎ;
전 많은 오라방과 언니님들을 두루 모시고 살아(보통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넘어가는데 저는 예전; 사랑도 고이 모시고 살았다는...;)정신적, 신체적, 경제적으로 황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현진님 글빨은 정말 감탄에 또 감탄이죠.^^ 저보다 나이 어린 분에게 이렇게 감탄하기는 몇몇 아오계 작가 빼놓곤 첨이라는...ㅎㅎ
리앙/ 수많은 오라방 중 국내 인지도가 극하게 낮은 모 중음쪽 분이라 제 주제에 조장;까지 할 수있었던 거죠.;;;   [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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